브런치에서 <인생에서 경이로운 순간을 느낀다는 것> 이란 제목의 글을 보았다. 미국에 사는 글쓴이가 개기일식을 보며 느낀 경이로움에 대해 쓴 글이었는데 그녀가 인용한 시인 심보선 님의 글에 따르면 경이로운 순간이 많으면 자기 연민에 빠져들지도, 낙관에 빠져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자세히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삶의 그런 순간들이 인생을 풍요롭게 할 것임은 분명 틀림없다.
그 글을 읽고 나니 내 인생의 경이로운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일본 오키나와 여행을 했을 때다. 오키나와 나하 시내에서 서쪽 해안길을 쭉 따라 츄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해질녘 노을을 즐길 수 있는 선셋 비치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의 이름은 그 자체로 '선셋비치'다. 노을 녘에 그곳에 들렀었는데 주홍빛으로 물드는 바다도 물론 멋있었지만 그곳에서 정말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끌었던 건 중학생쯤으로 보이던 학생들이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은 낚시를 막 마쳤는지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여학생들은 맨발로 물장구를 치고 놀았는지 손수건을 꺼내 손발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며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홍빛 노을이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가운데 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낚싯대를 들고 또 손수건으로 모래를 털어내며 서로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 만화 속에서 보던 장면 같았다.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하루를 그려보게 됐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삼삼오여 모여 집 앞에 있는 해변에서 낚시를 하고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다 노을이 질 때가 되면 집에 가서 온 가족이 모여 따스한 저녁을 먹는 장면을. 내 인생에는 정말 멋진 여행지가 많았지만 오키나와 선셋비치의 그 장면은 배경과 인물이 어우러져 나에겐 단연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이로운' 장면이다.
학창 시절 꼭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 세 곳 중 하나가 바로 그 오키나와였다.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청소년 문학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의 거의 모든 책의 배경이 오키나와였기 때문이다. 글로 접했을 뿐이었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며 오키나와의 청정하고 깨끗한 바다를 상상했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었다. 그리고 직접 본 그날 해안가의 장면은 내가 하이타니 겐지로의 작품을 읽을 때면 상상했던 오키나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지금도 누군가 인상적인 장면에 대해 물을 때면 그 순간을 떠올리고는 한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소설을 원어로 읽기 위해 일본어를 배운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린 시절 시험기간이면 책장에 꽂힌 그의 책을 빼서 다시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번역본을 읽으면서도 충분히 좋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에서의 그 장면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이 나에게 더 특별한 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나만의 이런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경이로운 순간이란,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외부의 강렬한 자극만이 나를 놀랍게 하는 건 아니니까. 감수성이 높아지면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감동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소믈리에들이 보통 사람들은 못 느끼는 와인의 특별한 맛을 알아채는 것처럼 인생에서 만나게 될 경이로운 순간들은 결국 그 경이로움을 알아보는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경이로운 순간들을 많이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나를 살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의 감동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하이타노 겐지로의 소설과 함께 내가 정말 좋아했던 책은 빨간 머리 앤 이다. 앞서 말한 꼭 가고 싶었던 세 군데 여행지 중 하나도 그 배경이 된 캐나다의 프린스 애드워드 섬인데, 오늘에서야 내가 왜 그녀를 그토록 사랑스러워하고 좋아했는지 알겠다. 그녀는 경이로운 순간을 알아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그녀를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군요!"
세상의 감동을 온전히 느끼던 그녀를 나는 부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고 많이 아꼈던 것 같다. 소녀에서 숙녀가 되었을 때, 엄마가 빨간 머리 앤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때도 좋았지만 나이 서른이 넘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선물이었구나 싶다. 그녀 덕에 세상의 감동을 느끼는 법을 배웠다. 내 인생의 경이로운 순간,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준 친구다. 훗날 내게 자녀가 생기면 나도 꼭 빨간 머리 앤을 선물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