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를 수령하니 이미 하늘은 까매져있었다. 숙소까지는 약 1시간을 달려야 했다. 황금연휴에 예약일정이 바트다 보니 싸고 좋은 숙소는 없었다. 좀 괜찮다 하는 숙소들은 호텔이고 에어비앤비고 일박에 30만원을 상회했다. 특히나 3인 여행자를 위한 옵션은 더욱 희귀했다. 고민 끝에 삿포로나 오타루도 아니고 후라노나 비에이도 아닌 그 중간의 시골마을인 미카사시 에어비앤비를 2박에 36만원을 주고 빌렸다. 찾아뒀던 식당도 문을 닫을 시간이라 마트에서 장을 봐 숙소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거의 없어 약간 무서워 보이던 겉모습과 달리 숙소 안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먼지 하나, 거미줄 하나 없고 사용법이 헷갈리는 거의 모든 것에는 영어로 설명이 붙어 있었다. 호스트와의 연락도 즉각 되었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깔끔하고 배려심 있는 호스트가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들만큼 마음에 드는 숙소였다.
정갈한 느낌의 에어비앤비 숙소
다다미 방에서의 숙면 후 드디어 여행 첫 일정을 시작했다. 드넓은 라벤더 밭과 자연풍광으로 유명한 후라노 지역과 비에이지역을 다녀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숙소에서는 약 1시간 정도의 거리다. 깜깜해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홋카이도의 산세를 보며 달렸다. 풍경은 산산산. 생각보다 햇볕이 강하고 온도가 높아 과연 라벤더가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라벤더는 꽃은 지고 허브잎만 가득했다. 그래도 다양한 방문객들을 환영하며 여러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이렇게 꽃밭을 일구어놓은 곳들이 주변에 제법 많았는데 도미타팜은 규모 측면에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농장이라고 한다. 주변 농가들이 라벤더 농사를 포기하고 모두들 감자농사로 돌아설 때 도미타 팜 주인만은 라벤더밭을 유지했고 그 꽃밭이 차츰 유명해져서 오늘날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홍보관에서 보았다. 입장료가 따로 없는 대신 라벤더 아이스크림, 멜론 등의 특산품을 이용한 먹거리나 라벤더를 활용한 소품 등을 팔고 있었는데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정말 사람이 많았다.
도미타팜. 홋카이도는 멜론도 유명하다. 2조각을 사먹고 아쉬워 마트에서 한통을 사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엔 고대하던 청의 호수를 찾아갔다. 청의 호수를 올라가며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가림목 사이로 보이는 소다색 호수와 자작나무! 청의 호수는 내가 봤던 사진과 정말 딱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사진만큼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는데 사진 속 그 장면이 청의 호수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청의 호수의 영어명은 Blue Pond였다. 사실은 '청의 연못'이었던 것이다. 지인의 말처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너무 후하게 번역을 해버렸다. 뉴질랜드의 데카포호수나 푸카키호수를 생각했던 나의 기대보단 사실 너무 작은 규모였다. 그래도 그 오묘한 물색만은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일종의 온천으로 알루미늄이 많이 섞여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나중에 보니 흰 수염폭포에서부터 흘러가는 강물이 다 그 색이었다. 그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계곡에는 정작 사람이 없었다.
널보러 왔어. 청의 호수, 아니 연못아...
내 기준 호수인 푸카키. 178 제곱킬로미터라고 한다.
사실 여기까지 보고 조금은 싱겁다고 생각했다. 홋카이도는 나에게 미지의 세계라 신비감이 있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꽃밭이 좀 많고, 물색이 좀 특이한 강원도 같달까. 더운 여름날 강원도의 국도를 운전할 때랑 느낌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예상보다 너무 높은 기온에 지쳐버렸다. 저녁에는 좀 나았지만 낮에는 32도까지 온도가 올라갔다. 더위보다 힘든 건 따가운 햇살이었는데 모자에 선글라스, 양산까지 썼지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여름철 홋카이도는 일본인들의 휴양지라고 들었는데 그렇기에는 서울과 비등하게 뜨거운 날씨였다.
마지막 여정으로 패치워크의 길을 가기로 했다. 유명한 나무가 있는 드라이브 코스라는 곳이었다. 크게 기대는 안했던 곳이다. 동선상 숙소를 가는 길에서 벗어났기에 뺄까도 했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양파밭, 감자밭, 콩밭, 논을 지나 꼬불꼬불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이 나타났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보니 길 옆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유명한 크리스마스 나무, 세븐스타나무 옆을 걸었다. 사방으로 드넓은 평원이 지평선으로 펼쳐진 곳이었다. 눈이 오면 정말 온 세상이 정말 하얗게 보일 것 같은 곳. 화려한 꽃밭도 없고 그저 넓은 들판 위에 나무 몇 그루가 서있을 뿐이었지만 그곳이 이번 삿포로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다. 이미 수확을 끝내 곳도 많아 완연한 초록색도 아니었지만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공간이 주는 힘이 있는 곳이다. 다음날과 그다음 날,오타루와 삿포로를 둘러보았는데 이번 여행에 통틀어 패치워크의 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삿포로 근처에 있는 부처의 언덕도 멋있었지만 홋카이도의 자연을 기대했던 여행이었기에 최고는 역시나 이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