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eso May 02. 2024

95번째 월급을 받고 떠나는 날

퇴사날 소회

<아침 출근길, 2호선에 앉아>


 째깍째깍. 시간은 잘도 간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나의 첫 회사생활에 희망퇴직으로 골인선이 생기고나니 완주는 금방이다. 어느덧 막날 아침 출근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4월 월급과 남은 연차수당이 담긴 월급이 들어와 있다. 회사는 최근 몇 년간 그리고 근 1년간 급속도로 힘들어졌지만 한 번도 월급을 밀리거나 못준 적이 없다. 7년 11개월간(세보니 총 95번의 월급!) 매월말이면 꼬박꼬박 꽂히던 저 월급이 언젠가부터 당연해졌지만 주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CEO의 의사결정에 대해 말이 많지만 이것만큼은 그 의지에 대해 박수와 격려, 감사를 보내고 싶다.


 지난 몇 주간 짐을 정리하고 여러 번에 걸쳐 그 짐들을 날랐다. 그러면서 과거의 물건들과 마주하고 회사에서의 추억들을 정리해 나갔다. 팀을 옮길 때 선물 받은 노란 프라이탁 안경집, 첫 출장 때 사용했던 동전지갑과 달러 동전들, 신입 당시 나에게 큰 프로젝트였던 회사소개서 등.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그걸 다 들고 들고 이고 끌고 집까지 가져왔다. 몇 번이야 더 들춰보겠나만은 그래도 차마 버리고 올 순 없었던 추억들이다.


 어제는 남는 사람보단 나가는 사람이 많은 퇴직이고 이미 연차소진으로 출근마무리를 하신 분들이 꽤 되어 이미 휑해진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돌리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교류가 있던 사람들도 그저 얼굴 몇 번을 마주 본 사람들도, 결국 모두가 거진 매일 아침인사를 하고 얼굴을 맞대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꼭 다시 보자며, 연락하자, 꼭 청첩장을 주라라는 이야기에 소중한 인연들이 다를 다시 한번 느꼈다.


 이제부터 내 인생 첫 무소속 자유인 신분이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불안에 점령당하고 싶지 않다. 해야 할 일도 많다. 팀장님의 말씀처럼 하고 싶은 분야도 정해야 하고, 나에게 핏이 맞는 포지션과 회사도 찾아야 하고, 그리고 그 열의를 태워 경력기술서도 채워야 할 거다. 팀장님께서 4개월간 일하며 나의 태도와 책임감, 그리고 동료로서의 든든함, 고충의 해소 측면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며 다음에 꼭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셔 정말 감사했다. 지난 회사생활동안 상사와의 불화가 없던 것이 아니었는데 마지막 선배가 그렇게 봐주니 내가 회사생활을 영 잘못한 건 아닌가 보다 싶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커리어가 꼬였다고들 이야기한다. 경영지원, 비서, 홍보, 전략기획, 부동산개발, 금융. 뭘 많이 하긴 했다. 썼다 하면 탈락메일을 받는 요즘이지만, 바보들 너네는 인재를 못 알아본다. 저렇게까지 다양한 일을 했는데 지금 일도 이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니? 흥칫뿡이다. 개인적인 앙탈이고 잘 찾아봐야지. 잘 어필해야지. 일단 첫 출근길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하루를 잘 보내고 오겠다.


마지막 출근길, 뚝섬역에서 내리며.






<마지막 짐정리 마치며 돌아오며>


 회사를 떠나 뚝섬역에서 괜찮다 생각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어?라고 물어보며 엄마는 웃었다. 어린애가 입사해서 어른이 되어 나왔다고. 가끔은 내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좀 덜 어른스러웠으면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는 항상 이야기한 것처럼 아쉬운 부분이 있겠지만, 감사한 마음을 잃지 말라했다. 지금 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이 나 혼자서 이룬 것 같이 보여도 결국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정말 별로였던 11층에서의 마지막 인사도 오히려 정을 떼려 그런 것 일수 있다고 나를 위로했다. 아까는 정말 정말 서운하고 또 화가 났지만 집에 돌아가는 일 그 시간을 돌아보니 그 또한 나의 욕심이었겠다 싶다. 뭘 바랐던 것일까. 아침에 생각한 95번의 밀림 없는 월급에 감사해야지.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우리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 응원해 주는 사람들,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들,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힘을 주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점심때 이야기한 것처럼 작년 말의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 지금 돌아보면 좋은 일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이별이 훗날 돌아봤을 때 결정적 순간이기를.


 좋은 추억과 애정하는 사람들을 가득 안고 나는 새로운 길을 떠난다. 훨훨 날아가야겠다. 안녕 첫 회사. 고마운 기억으로 보낼게. 안녕.


뚝섬역을 떠나며. 광화문에서 씀.


2024.04.30

작가의 이전글 눈이 펑펑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