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회피는 왜 사람을 두 번 멈추게 하는가?

퇴직연 자동가입이 보여준 비활동의 양면

by 엄윤성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선거를 하라고 독려하는 게시판이 있다. 아파트 옥상에 이동통신 기지 안테나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찬성 여부 투표이다. 참여율이 50%를 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투표에서 투표하지 않은 선택을 기권이라 한다. 투표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도 일종의 선택이다.


우리는 흔히 행동하지 않음을 중립적인 상태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다. 2001년 매드리안(Madrian)과 쉐어(Shea)는 미국의 퇴직연금인 401(k) 자동가입(Auto-enrollment) 제도 분석을 통해 인간이 서로 다른 국면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멈춘다는 사실을 보였다. 퇴직연금에서 자동가입이 왜 그렇게 강력하게 사람을 움직이거나 또는 멈추게 하는지를, 한 기업의 제도 변경을 이용해 거의 준실험처럼 보여준 대표 논문이다. 자동가입 도입 전후 경제적 조건이 바뀐 게 거의 없는데도 가입, 저축, 투자배분이 크게 바뀌었다.


자동가입 이전의 401(k) 제도에서는 다수의 근로자가 가입하지 않았다. 이들이 저축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는 결정을 미루는 비활동에서 비롯된 결과다. 가입을 위해서는 근로자가 스스로 기여율을 결정해야 하고, 투자상품도 선택해야 하고, 투자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 이 과정을 계산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중에 투자가 잘못되어 후회할 수도 있다. 미래의 부정적 결과에 대한 예상은 현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쉬운 선택을 한다. 아예 결정을 하지 않는 상태인 비활동을 하게 된다.


자동가입은 사람들에게 행동을 강제하지 않았다. 저축하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자동가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참여 상태가 되게 만들었을 뿐이다. 자동가입은 사람들의 비활동의 방향만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율이 이전의 37%에서 86%로 급등했다. 자동가입 이전의 근로자의 낮은 참여율은 저축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후회가 예상되는 결정을 회피한 결과였다.


자동가입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사람들은 또 다른 형태의 비활동 관성(inertia) 상태에 빠진다. 다수의 근로자가 기여율 3%, 현금성 자산인 머니마켓펀드(MMF)에 100%라는 디폴트를 장기간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기여율과 투자상품 변경은 언제든지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가입은 기본값으로 일단 하게 만들고, 이후 변경은 또 미뤄져서 디폴트가 유지된다. 또한 디폴트는 암묵적 투자 권고로 받아들이는 심리가 있다. 회사가 정한 기여율 3%, MMF가 추천처럼 느껴진다. 금융지식이 낮거나 자신이 없을수록 더 그러하다. 변경은 내가 디폴트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변경 후 성과가 나쁘면 후회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돌아온다. 행동해서 틀렸을 경우의 후회가 가만히 있었을 경우에 대한 후회보다 더 크게 다가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입 이후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둬서 디폴트가 유지되는 관성이 지속된다.


매드리안과 쉐어에서 분석한 퇴직연금 제도는 비활동이 두 번 작동한 사례이다. 참여 이전에는 가입결정을 미루는 것이고, 참여 이후엔 디폴트를 유지하는 것이다. 두 비활동 모두 감정과 인지의 산물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의 비활동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연금에서 자동가입 제도가 중요한 이유이다. 자동가입은 참여율을 극적으로 높이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사실 자동가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디폴트의 설계이다. 금액 자동 증액, 생애주기펀드(TDF), 리밸런싱 자동화 등이다. 한국에서도 제도적으로 도입된 지 얼마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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