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만들기 혹은 연인 만들기
눈이 오고 난 이후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눈이 더 바스락 거리게 되는데, 그때 눈 위를 밟는 기분이 꽤 좋다. 발자국이 더 짙게 남는달까. 이 계절이 조금 더 흐르고 나면 이제 물인지 얼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저분한 시즌이 오겠지.
이전에 핀란드의 어린아이들과 사계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봄’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재밌었던 것이 ‘똥’이었다. 산책을 하면서 볼일 본 강아지들의 흔적이 눈에 파묻혀있다가 눈이 녹으면서 자연스레 발견되는 것이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라 웃으면서 되물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녹은 눈과 응아가 섞인 잔디밭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면 봄이 오고 있다는 증빙이다.
한국의 봄과 이곳의 봄은 매우 다르다. 심지어 봄이란 계절에 부여하는 느낌조차 다른 듯 싶다. 한국이 이제 봄맞이를 하려 꽃과 새잎이 난 나무들이 고개를 들 때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기도 하니까. 그리고 녹았다가 얼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아주 서서히 눈이 사라지게 되고, 사라지는 모습이 깨끗하진 않다. 얼었던 강아지들의 응가들이 나오는 것처럼.
몇 해 전, 얼었던 잔디가 녹고 얼었던 눈언덕이 조그마한 시냇물을 만들기 시작하던 한국의 봄이 그리울 3월쯤 나는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그리 어렵고 어렵다는 핀란드에서의 연애의 비밀.
바로 데이팅 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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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대답인 것 잘 안다.
하지만 그 만남이 지금까지 수년을 이어져온 것을 생각하면 그 만남 자체가 너무나도 기적적이었다.
한국에도 수많은 데이팅 앱이 있다고 들었다. 유럽도 마찬가지. 5-6년 전만 해도 틴더 말고는 다른 데이팅 앱들이 그렇게 기세를 펼치지 못할 때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외국 생활에서 연애라도 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여느 다른 싱글들처럼 나는 틴더를 깔았다 지웠다 하는 틴더 주기를 겪으면서 손가락이 아프도록 스와입*을 해도 맘에 드는 남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틴더같은 데이팅 앱을 해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오른쪽 아니면 왼쪽으로 사진을 넘기고 상대도 나를 마음에 든다는 표시로 오른쪽으로 넘기면 서로 매칭이 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을 넘기는 기능을 Swipe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실 겁도 났던 것이 사실인 게, 본격적으로 우리 만나자! 하고 실제로 만나는 게 꽤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소개팅을 어쩜 그렇게 많이 했던 건지 놀랍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외국 사람이고, 여기는 다른 나라고, 그러니까 뭐, 아무튼 말이다…. 쉽게 그게 안되더란 말이다.
그럼에도 좋은 느낌이 오는 심성이 고우면서도 얼굴도 아름다운 사내를 보면 스와입을 하고 매칭이 되면 대화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아주 아주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 그중에서도 괜찮은 느낌이 그나마 오는 (조상신의 모든 촉을 동원해) 사람을 꼭 골랐던 것이 나의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실제로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소비하는 모든 노력이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만 시간을 내리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내가 틴더에서 대화를 나눈 누군가를 실제로 만나러 나선 것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일단 만나봐.
용기를 내서 만나보자! 하고 만났던 이들 중에도 너무나도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결혼을 할 사람을 찾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기독교 방송 피디가 있었다. 그는 우리 집이 불교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쉽지만 우린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포옹해주고 떠났다. 또 일 년 중 6개월은 핀란드에서 파트타임으로 공항 물류 일을 돕고 그 돈으로 남은 6개월을 여행 다니는 욜로 주의 서퍼도 있었다. 타투를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타투도 하고 취미로 친구들 타투도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온 몸이 타투로 꽉 차 있어서 손가락 마디가 접히는 관절 말고는 이제 그릴 데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대놓고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원한다고 한 놈도 있었다. 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구나 싶더라.
진지를 빼.
그래서 들었던 생각은 이럴 거면 아예 나도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지 말자! 였다. 어차피 회사건 학교건 파티던 어디던 내가 가는 곳에서 싱글남을 만날 확률도 너무 낮고 집에서 혼자 지루하게 지내는 시간이 너무 오래라면 같이 놀 친구라도 찾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히려 틴더를 켤 때 마음도 가벼웠고 쓱쓱 스와입도 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지금의 남자 친구는 일단 관심분야가 너무 비슷했다. 둘 다 중공업과 가까운 산업 분야의 마케팅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냐는 간단한 대화를 할 때도 서로의 전문 분야가 겹쳐서 짧은 대화도 재밌었다. 그러다가 서로 만나자고 말이 나오던 시점에 한 일주일 정도 연락이 안 됐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같이 놀 친구’를 찾는 중이었기 때문에 동시 다발로 연락 중인 사람들이 많았고 연락이 안 되던 그 시기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시간 많은 다른 애들이랑 농담 따먹기 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정도 뒤에 연락 온 그는 그간 감기에 걸려 아팠다고 했다. 연락을 주고받다가 일주일 정도 잠수를 타면 궁금하거나 왜 저러나 싶을 만도 한데 내가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감기에 옮으면 안 된다. 무조건 낫고 만나자고 해야지! 였다. 그래서 약속을 더 여유롭게 잡았다.
첫 만남부터 연인이 되기까지
첫 만남은 지금까지 아주 세세하게 기억될 만큼 아주 강렬했다. 핀란드에서 이렇게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게다가 난 심슨을 즐겨보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심지어 심슨 대사까지 외우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핀란드 방송에서 제일 쉽게 시청할 수 있는 게 심슨 시리즈다. 정말 매일매일 틀어준다. 어려서부터 티브이를 줄곧 많이 봐서 심슨을 통달한 인간이었던 것. 그걸 아직 몰랐던 나는 이걸 우연 중 하나로 삼게 된다.
그리고 밥을 샀다.
뭐가 놀라울 일인가 싶겠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엄청난 그린라이트였다!!!
누군가 밥을 사면 다른 사람이 그다음 술이나 커피를 사는 게 보편적인 소개팅 방식이겠지만 모든 게 더치페이인 핀란드에서 누군가 날 위해 저녁을 통째로 사는 건 참으로 겪기 힘든 귀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와인도 많이 마신 타파스 집이라 대충 계산을 굴려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는데. 다 낸다고? 이런 예외적인 상황의 겹침으로 그는 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고야 말았다. 나중에 이의 친구들에게 들은 바로는 술버릇 중 하나라고. 그걸 알턱이 없는 나는 또 한 번 큰 호감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나에게 한국어로 ‘닭강정’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내 귀를 의심… 후라이드 치킨이 아니고 ‘닭강정’을 만들어 준다고?
우연인지 인연인지 날 만나기 몇 달 전 한국 음식에 관심이 생겨 한국음식을 스스로 만들고 맛보고 즐기고 했던 형의 부부가 ‘닭강정’ 이란 걸 만들어줬는데 눈물 나게 맛있어서 혼자서 만들어봤다고 하는 것이었다.
기술 점수 100점.
이런 사람이 핀란드에 있긴 있구나…!!!!
그리고 실제 연인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두세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오래 걸린 것 같지 않다면서?
많은 서양 쪽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여기에서는 ‘사귀자!’라고 하는 날이 없다.
그럼 어떻게 아냐?
어느 순간. 시나브로?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서 이런 관계라면 우리는 in relationship이라고 자연스레 정의하는 날이 오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서로 자주 만나기 시작한 지 두세 달 정도 지난 후, 그에게 친구들에게 널 어떻게 소개해?라고 물으니 그때 처음으로 난 너의 남자 친구가 아니냐고 이야기를 했고 그때가 아마 처음으로 우리 사이를 아주 오피셜 하게 연인이라 인정했던 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기 시작한 지점의 나의 마인드 셋이 이 관계에 참 좋은 영향을 많이 줬다. 진지를 빼고 친구를 한번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여러 명과의 동시 다발적인 연락을 재미 삼아하게 된 시작이었고 그래서 외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관심 가는 누군가에 대한 섣부른 기대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실망도 적었다.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연락하던 사람들과 다 깨끗하게 정리는 했지만 여전히 나의 생각은 좀 가벼웠다. 원래 마음에 한번 들면 직진하던 나의 연애타입과 전혀 다르게 거리를 조금 두고 상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에 발맞췄다. 남자 친구가 될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시간이 생겼을 때 만나서 놀고 싶은 친구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상태기도 했지만 당시 남자 친구는 회사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게다가 석사과정을 시작하려고 하는 때여서 정말 정말 만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가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었을 때 우리의 관계에도 진전이 많이 생겼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수없이 많은 소개팅을 했던 나지만, 오히려 ‘좋은 사람’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사람’에 대한 기준이 사라지고 시간을 같이 보낼 친구로 생각을 바꾸니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운이 99%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이곳에 와서 연애뿐 아니라 결혼에 대한 단상도 매우 달라졌다. 확실히 연애와 결혼 이 두 가지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내 나이가 거론되면 자연스레 만나는 사람은 있고? 결혼은 언제 하고? 질문 시리즈의 연속이었는데 이곳에선 너무나도 개인적인 일이라 묻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힘 빼고, 진지 빼고, 고뇌 빼고 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다.
이것이 남친만들기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연애는 연애고, 여기에서의 결혼은 또 다르다.
일단 유럽에는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한국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다. 내 주변에만 해도 결혼은 안 했지만 아이를 낳고 사는 커플들이 꽤 있다. 그들은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아이를 공동 양육하고 서로를 지탱해 준다.
다음 편에서는 핀자 주변인들이 생각하는 결혼이란 대체 무언지? 에 한번 이야기해볼까 한다.
핀자가 회사에서 오고 가며 주워들은 것들을 통해 핀 결혼 라이프에 대해 풀어보겠다.
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