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열등감의 시발점
[모두 빠르게 투표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저녁은 제일 참여율 높았던 내일 저녁으로 잡겠습니다. 장소는 판교역 새로 생긴 레이니 펍으로 할 예정이고 저희가 전체 대관했으니 편하게 몸만 오시면 됩니다.]
그날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시 한 번 울린 진동이 울렸다.
유민정은 투표를 빠르게 정리해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사내 캘린더 앱을 통해 인비를 보내왔다. 유민정이 보낸 인비에는 단체방 인원 전원이 들어있었다.
난 투표하지 않았음에도 초대장이 온 거였다. 수락과 거절 버튼 사이에서 한참을 멈춰있자 액정이 기다리지 못하고 새카맣게 꺼졌다.
여기서 제일 거슬리는 건,
어차피 들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내 발로 단체방을 나가지도 못하고 투명인간처럼 부유하는 나였다.
엄마와는 이틀 연속 화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다 뭉개져 알아보기도 힘들어진 레터링 케익은 엄마가 냉장고 가장 중앙 칸에 넣어뒀다. 엄마는 이게 무슨 케익이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박스 겉에는 서리가 껴갔다.
[난 오늘 아침에 속이 안 좋아서 꿀떡 패스.]
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숙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난 오늘 문도형 모임 안 간다.]
밤새 고민한 결과였다. 성골들의 잔치에 진골도 못 되는 육두품이 가봐야 꼴만 사나워진다. 평소에 먹지도 않는 별식 먹었다가 탈만 날 거였다.
“연조님! 오늘도 역시 제일 일찍 나왔네!”
저 멀리서 태주님이 유민정과 함께 출근 중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이웃 주민답게 함께 출근하는 날이 잦았다. 오늘도 역시나 두 사람은 투썸 커피를 든 채였다.
“아니 민정님한테 들으니까 그 모임 벌써 오늘 모이기로 했다며!”
유민정이 본인 자리로 안 가고 태주님을 따라 내 자리까지 걸어와 섰다.
“아니 제가 어제 진짜 너무 정신 없어서 연조님 초대를 깜빡했더라구요. 진짜 어제 사람들 빨리 빨리 초대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가지구. 미안해요. 그래도 다시 초대하려구 하니까 이미 우리 방 초대 돼있어서 제가 진짜 얼마나 안심했는지.”
유민정은 굳이 태주님 앞에서 해명한다. 태주님은 처음 듣는단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 어제 연조님도 초대 됐다고 했잖아. 당연히 민정님이 해준 건 줄 알았는데? 그럼 연조님은 누가 초대했어?”
내 파티션 코앞에 서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도 꼿꼿하게 텀블러를 잡았다. 머신기에서 내린 커피계의 묵은지처럼 시어 꼬부라진 산미를 자랑하는 그 커피를 마셨다. 하필 텀블러가 엄마와 이모가 등산 모임 갔다가 받아온 텀블러였다. ‘북악등산모임 10회 정상 기념’ 글씨를 가리기 위해 텀블러 밑면을 묘기부리듯 잡았다.
“어제 연조님 초대한 거 개발팀 숙희님 맞죠! 저 전에 미팅할 때 숙희님 한 번 뵌 적 있었거든요. 두 분이 친하하신 거예요? 몰랐어요!”
유민정은 공사다망하다. 성골 21명만 챙기기에도 바쁠 텐데 노비들 우정까지 궁금해한다.
“네, 뭐,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됐어요.”
“숙희님이랑 접점 있으셨구나. 연조님 오늘 꼭 오실 거죠? 꼭 오셔야 돼요! 아직 수락 버튼 안 누르셨더라구요.”
초대할 땐 기억도 못했다면서 내가 초대장에 수락 버튼 안 누른 건 지켜보고 있다니. 내가 꼬인 건지 유민정이 듬성듬성 치밀한 건지. 그녀는 별안간 내 손목을 붙들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사실 유민정 말처럼 그녀는 어제 정말 정신이 없어 나를 잠시 까먹은 것일 수 있다. 그후 숙희가 날 초대해 내가 잘 가두리 양식장에 들어와 정녕 다행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지금도 내가 꼭 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진짜일 수도 있다.
“당연하지 우리 연조님 꼭 가야 돼. 그치 연조님!”
“오늘도 그 커피 드시는 거구나. 그럼요 태주님 제가 연조님 꼭 붙들고 데려갈 거예요!”
내 텀블러를 보며 미간을 예쁘게 찡그리는 저 얼굴의 속뜻을 근데 염병 도저히 모르겠다. 내 오해가 비뚤어진 열등감의 초상이래도 바로 잡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근데 연조님 태주님이 어떻게 도형님이랑 친해졌는지 궁금하지 않아?”
전혀. 노비는 성골들의 사랑과 우정이 싹트는 걸 궁금해하기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고군분투하느라 남는 에너지가 부족했다. 사회생활을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파르르 올려보였다.
“우리 솔루션 3실 교육을 도형님한테 민정님이 했대. 민정님 원래 교육팀이었잖아.”
어련하시겠어요, 답하는 대신 신 맛 커피를 후룩대며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연조님도 아시려나? 저 원래 교육팀이었던 거요.”
“예. 그럼요. 사내이동 하셨잖아요. 되게 되게 어렵다던.”
교만과 열등감 중 먼저 터져버리는 건 언제나 더 못난 표피를 가진 쪽이다.
처음부터 유민정을 싫어한 건 아니었다. 경계한 것도 아니었다.
못난 열등감이 씨앗이 되고 싹을 틔우고 구질구질한 향을 가진 꽃에서 더는 못 버틸 만큼 무거운 열매가 되어 이렇게 뚝 떨어지기까지. 첫 시작은 바야흐로 한별 입사 첫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별 입사일.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하루를 통으로 꼽으라면 염라대왕 앞에서 그날을 말할 것이다.
하늘 뚫을 기세의 높은 통유리 건물이 주는 위용. 동네를 압도하는 거대한 건물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됐다는 비현실적 성취감. 발바닥이 바닥에 안 닿고 자꾸 바닥에 붕붕 뜨는 거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들숨엔 긴장을 날숨엔 뿌듯함을 내뱉었던 그 첫날.
그날 점심은 플랫폼 솔루션 3실 사람들 전체가 함께 회식을 했다. 3실엔 총 4개 서비스 팀이 존재했다. 팀장님은 “연조님 환영 회식이야.” 한마디만 했고 나 때문에 이 거대한 3실 전체가 우르르 이동한단 사실에 어깨가 다 뻐근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3실 실장님은 전체가 이렇게 회식을 가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플랫폼 솔루션 3실은 한별에서 신규로 선보이는 신규 서비스들이 모여있는 실이었다. 지금은 자회사로 분사한 회사들도 모두 처음에는 솔루션 3실에서 인큐베이팅 되어 나간 거란다. 본사에서 TF형식으로 발제되어 시범 운영하는 신규 서비스들이 안정적 팀으로 자리를 잡으면 3실로 안착한다고. 마치 회사의 미래먹거리를 준비하는 가장 없어선 안 될 실로 느껴졌다. 1,2실에는 5년 이상 고도화된 팀들이 존재한다면 3실은 선보인지 5년 이내 서비스들이 모여있는 신사업실이었다. 물론 사업성을 찾지 못한 서비스들은 빠르게 정리되기도 한다는 건 숨겨진 맥락으로 파악했다.
-오늘은 3실 새 식구 환영 회식이에요. 같은 실 식구들은 오며가며 얼굴 마주칠 일 많으니 서로 얼굴 익혀놔도 좋아요. 신사업실이라 서로 유기적으로 도와줄 일 있을 때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주니까요.
면접 때 봤던 팀장 하영님 설명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펜을 꺼내들어 끄적이며 적자 하영님이 웃으며 이런 건 안 적어도 된다고 했다. 앞으로는 로또를 사도 3만 찍어야지 싶을 정도로 3이라는 숫자에 정이 들었다. 첫날이라 누가 누구인지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도 버퍼가 걸려 힘들었다. 다행히 사원증을 보면 이름과 소속이 보여 수월했다.
미리 예약한 고깃집은 커다란 룸이라 3실 사람들이 모두 앉을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오늘 저희 실에 새로운 식구들이 와서 모두 인사 나눠 주세요.
뜻밖에도 식구'들'이었다. 경력직 수시 채용은 입사 동기가 없다고 들었는데 의외였다. 실장님은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우리 셋은 테이블 맨 앞으로 가 3실 전체 인원 앞에 섰다.
-자 우리 어색해도 다 모이기 힘드니까 세 분은 자기 소개 좀 부탁드려요.
면접 날도 봤던 똑똑함이 안경테에서 뚝뚝 흐르는 실장님이 외쳤다.
-우리 연조님부터 시작할까?
새삼 실장님이 내 이름을 외웠단 게 신기했다. 빠르게 모두에게 허리 꾸벅 숙여 인사했다. 맨 끝 치크폴리오 팀이 가장 뜨겁게 박수를 쳐줬다. 호의 섞인 시선들이 일제히 꽂혔다.
-안녕하세요 저는 홍연조라고 합니다. 저는 치크폴리오 사업팀에 입사했구요. 합류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3년 동안 선배들이랑 작은 사업을 하다가 한별로 이직하게 됐는데, 나중에 한분 한분 뵙고 더 많은 얘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큰 회사 다니는 건 처음이라 정말 부족한 게 많을 텐데요. 경력 채용이라 오늘은 저만 입사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이렇게 입사 동기 분들도 만나서 너무 반갑습니다!
마지막 한 줄은 옆에 선 여자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바로 옆에 선 여자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이 내 입사동기라니! 앞날이 든든하다못해 저들과 함께란 사실에 가슴 벅차올랐다. 어쩌면 우리가 3실의 어벤저스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용암같은 포부가 끓었다.
-아 그렇지, 이것도 입사동기로 음, 칠 수 있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싶네. 발령을 같이 받았으니까. 이런 건 뭐라고 하나. 발령동기?
실장님이 안경테를 만지작대며 내 말을 바로잡았다. 무슨 뜻인가 싶어 갸웃하자 이미 순서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간 뒤였다.
-안녕하세요 유민정입니다. 지난달까지 한별 그룹인사실 소속 교육팀에 있다가 이번에 플랫폼 솔루션 3실 캐스트팀로 사내 이동을 했구요. 교육팀에 있을 때 제가 담당했던 플랫폼 솔루션 3실 소속으로 오게 돼서 영광입니다. 많이 부족한데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구요. 이동 도와주신 실장님 팀장님 그리고 팀원 분들 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제야 유민정 사원증을 바라봤다. 오늘 새로 발급 받아 주황색의 반질반질한 내 사원증과 달랐다. 유민정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세월이 묻어있었다.
소개 마친 유민정은 나와 끝까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방금 전 두 사람을 ‘입사 동기’라고 지껄인 게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이어서 발표한 여자 또한 사내 이동을 통해 3실로 이동한 사람이었다. 모두 한별에 들어온 지 몇 년 된 사람들이었다. 둘은 모두 신입 공채 출신이었다. 내가 3년간 무너져가는 사업에 매달린 세월 동안 그들은 착실히 한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연조님 우리 앞으로 잘 해봐요. 우리 다 연조님 입사하는 거만 기다렸어요.
자리로 돌아오자 팀장님이 고기를 덜어주셨다.
-오늘 같이 이동한 두 명이랑도 친하게 지내시면 좋을 거예요. 솔직히 우리 회사는 경력 가지고 입사하는 것보다 한별 안에서 사내이동 하는 게 진짜 훨씬 더 힘들거든요.
그날 태주 선배의 그 말은 명치에 탁 걸렸다. 형체 없는 가시라 밥을 아무리 뭉텅이로 삼켜도 안 넘어갔다.
-에이 우리 연조님 들어올 때 우리한테 서류가 몇 백개가 쏟아져 들어왔는데. 연조님도 바늘 구멍 뚫고 온 거야. 고생했어요!
세빈님이 와사비 그릇을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그 말에도 태주님은 끝까지 안 웃었었다. 백명이 잘해줘도 하나의 무심함에 혀끝이 쓰린 법. 고기도 맛있고 모두가 반겨주는데도 그날 첫회식은 묘하게 서러웠다. 자소서를 수백 번 고치고 읽고 어떻게든 변변한 스펙과 경력 없는 나를 알려보겠다고 용썼던 시간들이 스쳤다. 명문대도 대기업 출신도 아닌데 여기 입사하기까지 무슨 피눈물을 흘렸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듯했다. 오히려 태주님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입사한 내가 못마땅하다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방금 말은 경력직 수시 채용보다는 한별 내부에서 팀 옮긴 게 더 수고롭고 힘들다며 유민정 노고를 더 치켜 세워주는 말이 분명했다.
-이제 연조님이 우리 팀원 됐으니까 잘 챙겨줍시다 저희도! 그 옆팀 민정님한테 모르는 거 있으면 많이 물어봐요. 저분은 공채로 입사한 지 꽤 돼서 그래도 회사 시스템은 익숙할 거예요. 당연히 다 우리한테 물어봐도 되는데 우리한테 물어보기 껄끄러운 거 있을 수도 있으면 입사 동기 아니어도 발령 동기? 뭐 같은 날 왔으니 신세도 좀 지고 그래요. 태주님이 민정님이랑 친하니까 같이 자리도 좀 마련해주고 그럼 좋겠네.
세빈님 말에 태주님이 매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태주님 표정만 봤을 땐 퇴사할 때까지 태주님과 못 친해질 줄 알았다.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세빈님보다 잘 웃지 않는 태주님의 표정과 눈짓 하나하나가 더 신경 쓰였다. 게다가 태주는 옆 테이블 민정과는 눈을 마주치며 무어라 둘만의 수신호로 ‘많이 먹어라’ 등등의 언어를 나누는 게 보여서 더 그랬다.
-저랑 민정님이랑 대학 선후배에 또 여기서도 공채 선후배로 만나서 좀 친해요. 나중에 셋이 같이 한 번 밥 먹어요. 제가 민정님 소개시켜 드릴게요. 민정님 엄청 착하고 사람이 진짜 괜찮거든요. 저렇게 좋은 분도 드물어요.
태주님은 끝까지 유민정 칭찬만을 이어갔다. 내가 직속 후배로 와서 기쁘다거나, 앞으로 잘 해보자거나 하는 언약은 없었다. 예에. 왠지 자꾸 기가 죽어 태주님의 눈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답했건만 태주님은 고기 불판에만 시선을 던졌다.
와중에 실장은 각 팀 테이블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먹었다.
-연조님한테 우리 모두 기대가 커요! 얼마나 잘하는지 기대 중입니다. 당분간은 정신없겠지만 성장하는 팀 크루로 입사한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잘 해주세요. 하영님은 이제 원하던 인재 수혈해줬으니 더 달려줘야 합니다!
실장님이 와서 해준 격려사는 그게 끝이었다.
물론 실장님도 면접에 들어왔었지만, 내게 지금까지 했던 어떤 경험을 살려 잘 해보고 싶으냐 등등 각오를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고기도 못 먹으며 빠르게 고민했다. 하지만 실장님은 냉수 한 잔 건배를 끝으로 바로 옆 캐스트팀 테이블로 이동했다.
-우리가 인사팀 인재 데려왔다고 제가 아주 인사팀 실장님 뵐 때마다 요즘 잔소리 듣잖아요.
테이블 넘어간 실장님은 캐스트팀 팀장과 유민정을 두고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민정님이 교육팀에서 그렇잖아도 우리 실 교육 프로그램 잘 짜줄 때부터 내가 아 저 친구 정말 탐나는 인재라고 생각했거든. 민정님은 어차피 우리 실 돌아가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적응은 걱정 안 해도 되지?
이미 실장님은 유민정에게 말을 놨다. 걱정 말라고 웃는 민정이 너무 능숙해보여, 저런 사람과 입사동기는커녕 <발령동기>로 묶이는 것마저 사치임을 깨달았다.
같은 날 발령을 받았대도 대기업 시스템이 처음이라 사번을 외우는 것부터 버벅대는 나와 이미 날아갈 준비를 마친 유민정은 기세부터가 달랐다.
-근데 무슨 사업을 했다고 했죠?
날카로운 인상의 시니어 주연님이 물었다.
-예, 그게 책을 배달해주는… 그러니까 이런 녹즙배달처럼 집앞으로 책을…….
후식으로 나온 초록색 음료를 보며 긴장해 생각나는대로 지껄였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옆 테이블에서 계속해 넘어오는 민정의 웃음소리에 경직이 됐다. 유민정이 교육팀 시절 3실 사람들에게 찰떡같이 필요한 교육 프로그램을 세팅해줬던 것에 대한 칭찬일색이 넘어왔다.
-근데 요즘은 다 전자책 읽지 않나?
태주님 물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었다.
-예 그렇죠….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자소서를 읽었을 테니 그 사업이 망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다. 인생에 어떤 실패 경험도 없을 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실패 딱지를 가진 채 앉아있는 것 같아 불판에 익는 고기보다도 어떤 홧홧함이 등에 닿아왔다.
더는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물어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태주님은 아예 유민정과 따로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리고 입사 후 단 한 번도 태주님은 유민정과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물론 나도 시스템을 몰라 한참이나 버벅이는 한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유민정을 나의 가까운 발령 동기로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내 오해가 풀린 건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는데 세빈님을 통해서였다.
-사실 유민정님이 처음에 교육팀에서 솔루션 3실로 넘어오고 싶어했던 건 캐스트팀이 아니야. 우리 치크폴리오 팀이었어. 태주님이랑 친하니까 태주님한테 말한 모양이고. 태주님이 하영님한테 추천했거든. 근데 하영님이 일편단심 우리 연조님 자소서랑 면접에 꽂혀서 연조님 뽑아야 한다고 해서 민정님은 캐스트팀으로 갔지. 유민정 자존심에 3실에서 제일 좋은 팀으로 오고 싶었을 텐데, 매출이며 성과 제일 바닥이라 언제 없어져도 안 이상한 팀으로 갔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했겠어. 태주님이 좀 더 오래 텃세 부렸으면 내가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태주님도 연조님이랑 일하면서 맘 빨리 연 거 같길래. 지금은 누가봐도 태주님이 연조님 좋아하고 후배로 예뻐라 하니까 기 죽지 말라고 해주는 소리야. 지금 연조님 자리 넘보던 사람 엄청 많은데 그거 당당히 공채들도 제치고 꿰찬 게 연조님이라구.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의 유일무이한 황금 동아줄은 따로 있었다.
날 뽑아준 하영님. 가장 잘 나가는 팀은 사내이동을 청하는 수많은 공채들의 연락이 온다고 했다. 하영님은 그 모든 러브콜을 뿌리치고 나를 선택했다.
내게는 날 뽑아준 하영님이 있었다.
그거면 이 험난한 회사생활에 무서울 거 없는 천하무적 방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