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뜻밖의 초대

by 모정연

“야 우리 말고도 꿀떡을 노리는 놈이 생겼다.”

14층 비상계단으로 사원증을 태깅하고 넘어갔다. 거기 숙희가 씩씩대며 서있었다. 숙희 품에는 꿀떡 팩 하나만이 안긴 채였다.

“뭐야 너 벌써 먹었어? 떡 왜 하나야?”

“내가 분명히 꿀떡팩 세 개가 자판기 안에 있는 걸 보고 잠깐 화장실에 갔다 왔다? 근데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게!”

숙희가 억울하다는 듯 발을 한 번 굴렀다. 그러고는 품 안의 꿀떡 팩을 가리켰다.

“갔다 오니까 이게 하나밖에 안 남은 거야!”

일단 꿀떡 팩을 건네받고 차분히 포장을 뜯었다.

“누가 14층 자판기에만 꿀떡 있다는 소문 듣고 왔나보네.”

한 알을 꺼내 숙희의 입에 갖다 댔다. 숙희가 좋아하는 핑크색 알이었다.

직급도 계급도 없이 수평하다는 이곳에서 지켜야 할 룰은 딱 한가지. 서로에게 ‘님’자를 붙이는 거였다. 이곳은 창립자도 대표님보단 석준‘님’이라 호칭하는 게 익숙하다. 그런 곳에서 숙희와 내가 서로 마지막 규칙 '님'자마저 날려버리게 된 계기가 바로 꿀떡이었다.


우리의 역사는 14층에서 시작됐다.

플랫폼 솔루션 3실은 9층에 위치했다. 우리 팀은 월요일 오전마다 주간 회의를 진행한다. 다만 회사 주요 컨퍼런스 일정으로 우리 팀이 늘 예약해 쓰던 회의실 사용이 2주 간 어려워졌다. 그에 우리 팀은 빈 회의실을 찾기 시작했고 월요일 오전은 회의가 가장 많은 시간이라 14층에 겨우 잡았다.

우리 팀은 2주만 먼 14층으로 원정을 떠나 주간회의를 하기로 했고 그때 처음으로 14층에 가봤다.

월요일 아침. 처음으로 가본 14층은 풍경은 우리 층과는 다른 배열 공간 배열로 다소 낯설었다. 무심결에 지나치며 들여다본 14층 자판기 안에서 빛나는 꿀떡을 발견했다. 아침에 우리 층 말고는 가볼 일이 없어 층마다 자판기 메뉴가 다를 거란 생각 자체를 해본 적 없었다.

9층 자판기엔 요플레, 샐러드팩, 단백질바처럼 헬스인들을 위한 식단이 구성되었다면 14층은 달랐다.

무려 탄수화물인 '떡'이었다! 그것도 안에 꿀이 든 꿀떡! 10개의 알이나 들어있는 꿀떡 팩이 든 자판기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래졌었다. 너무 놀라 옆에 있던 세빈님에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저기 꿀떡이 있다고! 하지만 세빈님은 시큰둥하게 “그게 왜?” 반응했고 겸연쩍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모두들 점심 시간에 풀때기만 먹는 기인들이었다.

자판기에서 탄수화물을 만났다는 건 이제 아침마다 서울 꼭대기부터 강남까지 훑고 오느라 허기진 배에 점심시간까지 든든히 채울 식량을 찾았다는 기쁨이었다. 그 길로 출근하면 14층으로 도장을 찍듯 올라갔다. 심지어 점심에도 샐러드팩만 품절시키는 건강식 애호가들 답게 이 꿀떡은 언제나 비인기 아이템으로 늘 자판기에 품절 없이 존재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와 똑같이 꿀떡을 한 팩 자판기에서 뽑았다. 더 웃긴 건 우린 나란히 꿀떡을 품에 안아들고 승강기로 걸어갔다. 그녀도 나처럼 14층에서 근무하지 않는데 오직 꿀떡을 위해 아침마다 14층에 온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시간 꿀떡을 자판기에서 뽑았다.

“9층이시죠?”

나란히 품에 꿀떡을 한 팩씩 안아들고 승강기에 탄 어느날. 별안간 그녀가 본인의 업무층 12 버튼과 함께 나의 9층 버튼을 눌렀다. 물론 나역시 그녀가 12층에 근무한단 건 익히 외워둔 터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하고 헤어진 다음날.

“아침부터 배가 많이 고프신가봐요. 저도 그렇거든요. 엘베도 안 오는데 같이 걸어가실래요? 여기 비상계단에서 먹는 꿀떡 맛이 또 일품이거든요.”

어김없이 우리는 마주쳤다. 약속이라도 한 듯 기가 막히게 늘 같은 타이밍이었다.

그때 비상구 계단에 사원증을 태깅하던 숙희 뒷모습이란. 마치 교복 입고 함께 매점 가자고 불러낸 학창시절 친구같았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런 친숙함을 느낀 게 처음이라 얼을 타면서도 반가웠다. 학연지연으로 묶인 이곳의 다른 동료들은 서로에게 이런 시그널을 느껴 친해졌을까? 태주님과 유민정이 느낀 시그널도 이런 거였을까? 찌릿 전기 통하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대답하기도 전 이미 몸은 숙희를 따라 계단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판교까지 꼬박 한 시간 반 가까이 출근하는 직장인의 배고픔. 그걸 달래려다 우린 만났다. 도저히 나와 비슷한 허기를 가진 사람은 없는 모양이라고 체념한 무렵 만난 첫 친구.

“집이 많이 머세요? 어디 사시는데요?”

숙희는 회사에서 금기와도 같은 사생활 물음표 던지기에 거침 없었다.

흐릿한 조명과 퀴퀴한 시멘트 냄새로 얼룩진 비상계단이 가진 힘이었다. 그곳은 잘 재단된 회사의 모든 구역과 달랐다. 네모반듯하게 모든 선이 자로 그은 것처럼 일자로 그어진 사무실 정반대였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 투박하게 거칠거칠한 바닥면. 정수리가 도저히 닿지 않을 것 같은 높다란 천장까지. 회사가 아니란 생각이 드는 공간에서는 맘껏 재단선을 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인사규정 상 동료끼리 묻지 않는 것이 일품의 예의라 여겨지는 것들을 스스럼없이 물음표로 꽂아 던졌다.

아 예 저는 많이 멀리 살아요. 서울 위쪽에 살거든요. 서울 위쪽? 저돈데? 혹시 마포쪽? 아뇨 그쪽의 위 말고요 강북쪽이요. 리터럴리 강북요. 진짜 강북구요. 에 강북구? 난 노원구인데? 아 진짜요? 본가? 거기서 쭉 사셨어요? 저 학원 노원 쪽으로도 잠깐 다녔었는데 거기 중계동에 유명한 학원가 있잖아요. 뭐야 저 은행사거리 뒤쪽 사는데? 어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알고보니 같은 학원 다닌 거 아니에요? 저 올해 스물 아홉이요, 아 근데 제가 학교를 빨리 들어가가지고, 어 저도 스물 아홉인데? 96년생? 어 저돈데?

결과는 던지는 족족 명중이었다.

동갑에 초중고 나온 지역이 비슷했으며 굳이 한 시간 반의 통근을 감수하고 자취 대신 본가에서 사는 것까지. 모든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며 ‘비슷한 처지’란 것을 암시했다.

게다가 우정의 방점을 찍은 마지막 공통점이란.

“그럼 연조님은 입사 언제 하셨어요?”

“저 재작년에 했어요.”

“와 저돈데?”

“아, 숙희님 근데 저는 공채가 아니라서.”

“와 나돈데?!”

“어 경력직 공고로 입사하신 거예요?”

회사에서 엘리트 코스로 치부하는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점까지. 이 회사에서 비주류란 비주류의 모든 공통점은 죄다 석권한 완벽한 데칼코마니였다. 숙희는 첫회사에서 팀장님이 한별로 이직한 후 추천채용으로 입사했다고 했다. 결론은 똑같은 비공채란 타이틀이 같았다.

나는 쑥색 꿀떡을 제일 좋아했고 숙희는 핑크색 알을 제일 좋아했다. 이미 꿀떡에서 어느 알이 가장 맛있는지를 논하는 시점 무렵엔 ‘님’자라는 호칭은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를 달큰한 우정으로 묶어준 꿀떡은 투명 탄수화물처럼 누구도 누르지 않는 버튼의 비인기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 우리 꿀떡을 가져간 탓에 처음으로 한 팩 10알을 5알씩 먹고 헤어지게 된 것이다.

[회사에 우리처럼 또 배고픈 하이에나가 있나보네]

헤어진 뒤 자리로 돌아오며 숙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반 팩만 먹어도 떡이 주는 포만감은 든든했다.

아침 나절의 꿀떡과 점심의 특식이 주는 칼로리는 거듭되는 회의 몇 번에 매우 빠르게 증발했다. 당이 가장 많이 떨어진 오후 네시. 모든 회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밀린 잡무들을 시작하려 자리에 앉았다.

꿀떡 5알만 먹으니 기력이 평소보다 일찍 쇠한다고 숙희에게 메시지나 보내볼 참이었다.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갑자기 우르르 업무 메신저 팝업이 뜨기 시작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태어나 저런 속도로 계속 뜨는 팝업은 처음 봤다. 팀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엉덩이를 들썩여 팀원들 동태를 살폈다. 다들 평온하게 마우스만 딸깍였다. 즉 내 메신저만 불타오르는 중이란 뜻이었다. 실시간으로 울리는 팝업을 누르자 생전 처음 보는 대화방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초대 드려서 많이 놀라셨죠.]

방 이름부터 속한 인원들까지 아주 낯선 단체방이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단체방 초대 인원이 불어나는 게 보여 사내 메신저만 아니었어도 보이스 피싱인 줄 알 뻔했다.

가장 이상한 건 보통 프로젝트 별로 혹은 팀명으로 세팅되는 메신저 방 이름이었다. IT 기업답게 우리는 한별에서 직접 개발한 업무 메신저 프로그램을 썼다. 사내에는 이미 업무 방 이름을 개설하는 규칙이 있지만 이 방은 모든 규정을 따르지 않고 파괴했다.

‘한별 스물아홉 모임’

요상한 방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숙희에게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문도형이 뭔가 방을 판 거 같고 우리 개발팀 동기가 나 초대해서 내가 너 초대함.

우리 회사 스물아홉살들 모이는 방이래. 이게 뭔 일임?]

숙희의 말에 그제야 단체방 개최자 이름이 보였다.

명치까지만 나온 네모반듯한 프로필 사진 속 캐쥬얼한 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

한별 창립자 문석준의 막내아들이자 작년 연말 한별에 입사해 여전히 떠들썩하게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인간이었다.

[우선 지금 저희 회사에 스물아홉이신 분들을 실시간으로 초대 중인데요, 사전 설명 없이 방으로 초대부터 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우연인지 저희 회사에 스물아홉이 많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인사팀에 문의해 보니 이런 사내 사조직 대화방 만드는 건 사규 위반 아니라고 해서요. 가벼운 모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사에 동갑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만든 방이에요. 비정기적으로 한두달에 한 번 다같이 만나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도 나누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모두 주변에 아는 한별 스물아홉살 사우분들 있으면 초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아직 정식 동아리 클럽으로 개설한 건 아니라서 당분간 모임비는 모두 제가 사비로 내려고 합니다. 저랑 친하게 지내달라는 의미로 만든 방이니만큼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와주세요.]

첩첩산중처럼 긴 메시지를 보낸 이는 문도형이었다.

그 메시지에 단체방 속 모두가 열화와 같은 성원이 쏟아졌다.

이런 방을 만들어줘서 너무 고맙다, 지갑 여는 스케일이 다르다, 동갑끼리 모이는 동아리는 십년 전부터 기다렸는데 드디어 생겼다,(십년 전에 우린 고3이었다), 이렇게 통 크게 동갑끼리 모이는 판을 깔아줘서 너무 고맙다, 역시 스케일이 다르다는 둥……….

다들 본인이 스물여덟도 서른도 아닌 문도형과 동갑인 스물아홉이라 적잖이 감복한 듯했다.

여기 초대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 앞다퉈 따봉과 주저 앉아 눈물 줄줄 흘리는 이모티콘을 남발했다. 방 인원은 40명에서 순식간에 60명까지 불어났다. 60명이 판교 물가에 맞춰 저렴한 걸 먹는대도 인당 2만원씩 계산하면 120만원. 더 가성비로 간다고 쳐도 교촌치킨 허니콤보 2인 1닭 23,000원 곱하기 30개면 69만원. 내 한달 용돈보다 많은 금액이다.

게다가 60명이 한 번에 우르르 몰려다닐 식당도 있을 리 만무했다. 설마 출장 뷔페라도 불러 이 많은 인간들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겠다는 건가? 계산하는 와중 대화방에 투표 하나가 떴다.

[이런 번개 묘미는 빠르게 만나는 게 제맛이니 빠르게 투표 엽니다!

이번 주 저녁 중 만남 가능한 날짜에 투표해주세요. 가장 투표인원이 많은 날짜로 인비 드리고 자리 마련해볼게요!]

주최자 문도형을 두고 투표를 연 이는 다름 아닌 유민정이었다.

유민정은 이미 문도형과 아는 사이라 이렇게 잽싸게 진행도 도맡은 건가? 아님 이런 방을 만들자는 작당모의를 유민정과 문도형이 함께 한 건가? 이러나 저러나 나와는 상관 없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난 일단 모든 날짜에 다 투표함. 나 재벌한테 밥 처음 얻어먹어봐.

꿀떡과는 차원이 다른 포만감 예상됨.]

숙희에게 도착한 개인 메시지에 턱 끝을 쓸었다.

[뭐냐 저게? 재미 없을 거 같은데.]

시큰둥한 대답에 숙희는 물음표 가득 고개 갸웃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왠지 사람 맥이는 표정이라 전부터 제일 싫어하는 이모티콘이라고 말했는데 굳이 쓴다는 건 숙희가 날 놀린단 의미였다.

[재벌 아들이 사주는 밥을 재미로 먹나요? 맛으로 먹는 거죠]

막상 식당에 가면 식탐도 없으면서 늘 미식을 탐구하는 숙희 다웠다. 일단 다시 스물아홉 단체방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스크롤을 휙휙 올려봤다.

맨 위로 가니 누가 누구를 최초로 초대했는지 기원이 떴다.

방을 만든 최초의 사람은 문도형.

문도형이 제일 처음 초대한 건 단 한명. 유민정.

이후 유민정이 동시에 초대한 인원 21명.

21명이 한 마디씩 이게 뭐냐고 묻는 질문으로 산란해지기 시작한 대화창.

아무리 스크롤을 뒤져도 문도형은 유민정 말고 아무도 안 초대했다. 문도형이 이 방을 만들 때 유민정과만 상의했다는 증거였다. 문도형이 유민정을 초대하고 1분도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유민정은 21명을 초대했다.

그리고 유민정이 초대한 21명 안에 나는 없었다.

유민정이 부른 21명 안에는 같은 솔루션 사업실 3실 스물아홉 동갑내기 공채 곽우식도 있었다. 고로 유민정은 솔루션 3실에서 곽우식은 불렀어도 나는 안 부른 것이다.

유민정은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유민정이 나를 까먹었거나 고의로 필터링해서 떨궈냈는데 눈치 없는 우리 숙희가 나를 초대한 것이거나.

“와! 연조! 이게 뭐야?”

유민정의 실수인지 고의인지를 곱씹는 와중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스크롤을 성의없이 내리며 대화방을 읽는데 파티션 너머로 태주님이 쑥 넘어왔다. 태주님과 나의 자리는 사이 좋게 붙어있었다.

태주님이 내게 보여준 핸드폰 화면은 직장인 커뮤니티 어플리케이션 한별인들만 쓸 수 있는 ‘한별 라운지’ 게시글이었다. 특정 회사 직원들끼리만 쓰고 읽을 수 있는 게시판.

글 제목 : 도형이형 96년생 아니어도 그 방 초대해주면 안 돼?

글 내용 : 도형이형 86년생 형도 초대해주면 안 돼요? 저도 도형이형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10년 일찍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모임에도 안 껴주나요.

그리고 댓글들에는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댓글과 함께 실시간으로 상황이 퍼져나갔다.

-요란하게 입사한 창립자 막내아들께서 스물아홉살들 사우들만 모인 단톡방 개설하셨답니다.

역시 인터넷 강국 소문 빠른 IT기업 다웠다.

“연조님도 거기 초대됐지? 연조님 민정님이랑 동갑이잖아. 스물아홉!”

태주님은 내가 유민정에 의해 초대됐을 거라 맹신하는 눈빛이었다. 후배를 향한 순도 높은 믿음. 초대되긴 했지만 유민정이 초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시시비비를 가려 무엇할까. 나 역시 태주님에게 애정어린 후배로 남고 싶었으므로. 유민정이 날 초대하지 않았다는 째째한 일름보성 발언으로 민심을 잃을 필욘 없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주님은 신이 났다.

“나도 2년만 늦게 태어날 걸! 와 지금 우리 동기들 단톡방에서 다 그 얘기밖에 안 해! 어떡해 어떡해!”

태주님은 곧 내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만큼 기뻐했다. 도대체 무엇이 어느 포인트에서 태주님을 저토록 설레게 하는지 이해력이 부족했다.

“엄청 맛있는 거 얻어 먹겠네 우리 연조님! 가서 많이 많이 먹고 와! 우리 연조 도형님이랑 만난 적 있었나?”

나의 직속 선배는 마치 황금 동아줄이라도 붙들게 된 것을 축하하는 얼굴이었다.

“아뇨.”

“와 이 기회에 절친 되자.”

태주님의 세계는 심플하고 단순했다. 같이 밥 한번만 먹으면 절친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나와 태주님이 한솥밥 먹은지 1년이 지나가고 있어도 우리가 늘 겉도는 사이란 걸 그새 까먹은 걸까.

태주님이 자리로 돌아간 뒤 방금 태주님이 보여줬던 그 어플에 들어갔다.

태주님이 보여준 게시글 말고도 지금 개설된 이 스물아홉방에 대한 이야기가 3개나 더 올라와있었다. 다들 일은 안 하고 실시간으로 가십에만 열광 중인 거다. 쯧. 속으로 혀를 차며 글을 눌렀다.

-도형아 사회생활 힘들지? 그냥 엘리트들끼리만 놀고 싶은데, 그럼 그렇게 모인다고 욕먹으니까 일단 동갑내기들부터 모으고 그다음엔 ‘유학파 출신 모임’, ‘미국에서 초중고 나온 모임’, ‘청담동 거주자 모임’, ‘금수저 모임’ 이렇게 각 잡고 줄줄이 소시지처럼 방 만들어 줄 거지? 기다릴게!

-여러분 문도형 사우님이 진짜 동갑한테 의미가 있어서 친구 사귀려고 동갑들한테 먹을 거 사주려고 그 방 팠겠어요? 성골들만 빨리빨리 솎아서 사귀고 싶은데 벌써부터 그러면 우리 문석준 창립자님이 매번 말씀하시는 ‘사내 분위기 위협’할 수 있으니까 적당히 누구도 욕 안 할 모임으로 스타트 끊어주시고 그 안에서 맘에 드는 성골들만 쏙쏙 골라내겠다는 거 아니야. 육두품들이랑 진골들은 우수수 떨궈질 일만 남았죠? 그것도 모르고 문도형이 친구 없어서 순박하게 친구 사귀겠다고 그 방 팠다고 찬양하는 꼬라지가 너무 우습네.

-우리 팀에 젤 싫어하는 애 96이라고 저 단톡 초대됐다고 벌써부터 지가 예비 C레벨 된 거처럼 어깨 뽕 들어간 거 존나 꼴뵈기 싫어 죽겠음

댓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자 기분이 재빠르게 가라앉았다.

-아니 그냥 순수하게 한국에 친구가 없어서 동갑내기들 사귀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 다들 너무 꼬아서 생각하네. 도형아 힘내! 난 너 응원한다! 도형님 아버지와 같은 대학 동문 모임도 만들어 줄 거지? 난 그때 들어갈게.

-문도형이 친구가 없어서 회사에서 친구를 찾겠냐고요. 문도형 대학 친구들 다 아이비리그에서 노는데 한국 동갑내기들 친구가 필요하겠냐고요. 저 모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애들이 결국 우리 회사에서 한 따까리 할 예비 임원이라고 보면 되는 부분?

그리고 다시 단체방으로 돌아왔다.

[다들 격무로 바쁘시겠지만 투표는 최대한 빠르게 마쳐주세요!]

아마도 모든 반응을 다 모니터링 하고 있을 테지만 문도형은 털끝만큼도 언급하지 않았다. 유민정이 공지로 박아둔 모임 날짜 투표에 ‘참석 불가’ 따위는 없었다.

[난 안 갈래]

숙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차피 숙청당할 운명이면 첨부터 안 가는 게 가장 경제적인 선택지겠다. 결말 다 아는 영화나 소설을 프롤로그부터 꾸역꾸역 읽는 일이 가장 멍청한 낭비였다.

비주류에게도 얼마든지 꼴에 핏대 세운 빳빳한 자존심은 존재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 얻은 나의 주특기는 빠른 주제파악이었고

그것은 대개 반골기질의 탈을 쓰고 발현됐다. 지금처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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