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운 별 앞에
다음 날 출근 날 아침. 도착한 캘린더 인비를 보면서 미간에 힘을 실었다.
어제 왔지만 워낙 바빴던 탓에 누락해서 이제야 확인했다.
[96 재모임]
초대를 보낸 건 이번엔 유민정이 아니라 문도형이었다. 어제 하영님과 ‘조직개편’에 대해 갈피 없는 대화를 하느라 정신이 산만해 충동적으로 문도형이 만든 스물아홉 단체방을 나갔었다.
화장실에서 비웃었던 목소리들, 이런 불안감이라곤 일평생 모른 채 한별의 최고 꼭대기층에 갈 문도형. 모두 나와 상관 없는 인간들이었다. 지금 내가 당장 신경써야 하는 건 그들 말대로 오너 일가와의 친목질이 아니라 당장 내 팀에서의 입지 다지기였다. 입에 풀칠하기 바쁜 인간에게 그 외의 것들은 사치였다.
문도형이 보낸 초대장에 ‘거절’ 버튼을 눌렀다.
되먹잖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개무시만 당할 모임에 더는 자발적으로 나가 시간 낭비하기 싫은 꼴같은 자존심이겠다.
어김없이 환승역에 도착했다. 신분당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문에서 쏜살같이 튕겨나갔다.
“우리 연조님 뉴스타 성공적으로 데뷔한 거 파티 해야하는데!”
오늘은 팀원들이 모두 출근하는 날이었다. 태주님이 바람을 잡았다. 이런 면에서는 월등하게 감각이 앞섰다.
“맞아, 그렇잖아도 월말 돌아와서 회식 어디서 할까 정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하영님은 다시 다정하고 섬세한 팀장님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로 사람 마음 심란하게 한 얼굴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내 마음에만 은은한 불안이 남았다.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
내 이야기는 쏙빼고 본론만 묻는 규연님에게도 이젠 하나도 안 서운했다. 이런 유능한 팀원들과 내 자리를 지켜 계속 이 팀에 있고 싶단 생각 뿐이었다. 우리 팀 누구도 팀에서의 입지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회식의 주인공이면서도 단두대 올라가는 심정인 건 나 뿐이었다.
“우리 연조님 일단 뭐 먹고 싶어? 메뉴는 회식 주인공이 정해야지.”
팀장님이 내 면을 세워줬다. 혹시 작별회식을 염두해두고 나를 주인공이라고 치켜 세우시는 걸까. 좀스러운 생각들이 스멀스멀.
“저, 메뉴는 다 상관이 없고요.”
모처럼만의 팀에서의 발언권.
“그냥 회식을 오늘 저녁에 하면 어떨까요.”
쇠뿔도 단김에.
그러니까 내가 이 팀에서 얼마나 필요한 인재인지를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한번 더 어필하고 싶었다. 까짓 다시 면접 본다는 심정으로 못 매달릴 일 있나. 송지원은 어제 떠나야 할 숙명이라면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일단 붙어있을 수 있을 때까지 바짓가랭이를 붙잡아보고 싶었다.
“당장 오늘? 다들 약속 괜찮아요?”
게다가 좀 비겁한 생각일지 몰라도.
문도형 회식을 거절한 명분도 만들고 싶었다. 고민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지만 마지막 면피용 변명 정도는 살려놔야 했다. 문도형과 티끌만큼이라도 엮이면 인간이 이렇게 비겁해진다.
문도형이 절대 묻지도 않겠지만, 만일 물어보면 우리 팀 회식 때문에 못 갔다는 얄팍한 변명거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날 저녁 회식으로 우리는 새로 생긴 닭 요리 전문점을 택했다.
하루 종일 회식 때 내가 우리 팀에서 왜 꼭 필요한 인물인지 어떻게 어필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뉴스타 방송 준비를 하면서 내가 이 팀에 입사해서 얼마나 1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이 성장했는지 <서두>를 열고, 룩북 큐레이션 서비스를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것에 아직 ‘작게’ 기여하고 있지만 <본론을 위한 진정성 빌드업>, 곧 얼마나 ‘크게’ 기여할 것인지 <본론>, 결국 팀에서 가장 짜치는 모든 업무들은 내가 담당하고 있어 당신들을 잘 서포트 하지 않았는가! (이거야말로 너무 짜치는 이야기니까 기각), 모두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정신 없었을 때 내가 지난 9개월치의 개발팀과의 미팅 회의록을 아카이빙해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가장 본질로 놓치지 않으려 했는지 아무도 시키지도 않은 중간 랩업 자료를 만들어 줬을 때 다들 얼마나 감동했었는가! <본론의 증거자료로 제시>, 당신들 모두 재택할 때 나는 주 5일 그 먼 곳에서 왕복 3시간 이상 출퇴근을 하면서도 힘든 것도 모르고 우리 팀만 생각하며 달리고 있다! <약간의 감정적 호소>를 끝으로 앞으로 잘해보자는 <마무리>
이 정도의 대략적인 그림을 가져갔다. 각 한명씩과의 생각나는 에피소드도 어젯밤 일기장을 뒤져 찾아 읽었었다. 송지원과 맥주 세 캔을 마셔 알딸딸한 정신에서도 바로 잠들지 않고 이 팀에서의 내 쓸모 찾기에 몰두하느라 새벽 세 시가 다 돼서야 잤다고.
종업원이 익혀주는 닭고기지만 일부러 섬세하게 뒤집었다. 닭껍질이 타지 않게 신경썼다. 우리 담당 홀 직원분이 총 4개의 테이블을 맡아 정신 없는 틈에서였다. 난 우리 팀 막내답게 아무도 안 하는 닭 뒤집기도 한다고! 내가 없으면 이런 건 누가 하겠냐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꼬치 하나를 뒤집던 그때.
“연조님. 그거 자꾸 뒤적대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점원분이 다 시간 계산해서 뒤집어주고 계셔.”
입을 열면 팩트만을 읊는 사업팀의 인간 숫자 주연님이 정색하고 말씀하셨다. 딴엔 날 위한 말일 수도. 하지만 누가 봐도 우리의 닭고기 맛을 내가 헤치는 것 같아 경고하시는 거였다. 우리 한별같은 대기업 막내 인재상은 닭고기 뒤집는 게 아니라는 무언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북리버리 사업 시절. 선배들과 일 할때는 선배들이 꼰대라서가 아니라 막내라면 무릇 식탁 세팅도 내가 하고 고기도 내가 뒤집어야 했다. 날 아끼는 마음이야 한별 치크폴리오 선배들보다 우리 학과 선배들이 더하면 더했다. 그런데도 여기 와서는 거기서 하던 예쁨 받던 막내짓이 안 통했다. 학과 선배들은 싹싹하다고 귀여워해주던 걸 여기서는 불필요한 과잉 오바로 받아들였다.
일전에 주연님과 규연님이 얘기하던 게 떠올랐다.
‘중소에서 온 애들 특유 군기는 진짜 부담스럽더라.’
그건 주연님이 일전에 다른 팀에서 일할 때 겪었던 다른 후배를 지칭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또 고등어 가시처럼 자격지심으로 남아 가끔씩 따끔대고는 했었는데. 바로 지금이었다.
내가 없어 태주님이 우리 팀 막내였다면? 태주님은 절대 닭고기를 점원이 만져주기 전에 뒤적대지 않았을 것이다. 유민정이었다면? 뒤집을 타이밍에 점원을 불러 이거 뒤집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겠지 본인이 만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대기업 막내다운 예쁨 받는 법을 몰라서 결국은 내가 숙청당하나.
쪼그라든 자신감에 얼른 첫 레퍼토리를 읊어야 하는데 애꿎은 탄산수만 마셨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내가 뉴스타 방송을 끝내고 왔을 때 레터링 케이크도 주고, 박수도 쳐주고, 잘했다고 환호도 해준 사람들이다. 작아지지 말자. 내가 얼마나 필요한 막내인지 어필하자.
“저 뉴스타 방송 준비하면서 제가 진짜 1년 동안 느낀 게 많아요.”
조심스럽게 서두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흰 장갑 낀 능숙한 점원이 다가왔다.
“이거 계속 뒤집으시면 안 돼요. 제가 해드릴 거니까 그냥 만지지 마세요.”
아까부터 만지작대는 걸 봤는지 점원마저 나에게 한마디를 거들었다. 예, 죄송합니다. 개미 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연조님 와서 우리 팀도 진짜 활력이 생겼어요. 다들 짠이나 한 번 하시죠.”
세빈님이 모두의 분위기를 역시나 북돋았다. 주니어와 시니어 경계에 있는 세빈님은 우리 팀 진행 역할을 맡을 때가 많았다.
팀장님까지 웃으며 잔을 들었다. 분명 분위기 좋은 한 때가 맞았다. 이제 이 건배가 끝나면 내 이야기를 시작할 거다.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하영님에게도 무언의 어필을 하는 거다. 난 이렇게 필요한 인재니까 제발 어딘가로 보내버리는 생각은 다시 한 번만 해보셔라. 나를 뽑을 때의 마음을 잊지 마셔라. 대기업에서 인재 하나가 성과를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2년. 날 2년도 안 봐놓고!
“지금 우리 팀 난 너무 좋은데. 다들 맨날 열심히 해주는 거 다 알아요. 내가 출산휴가 다녀온 동안 공백 하나도 느껴지지도 않잖아.”
하영님이 모두를 격려했다. 하영님 다운 말이었다. 하영님은 출산휴가 가는 것도 미안해하셨다. 그럴 필요 없다고 모두가 입이 부르트도록 말했지만 하영님 딴에는 신경 쓰인다고 하셨었다.
“연조님 갈증나? 하나 더 시켜줄게.”
태주님이 내 빈잔을 보고 섬세하게 호출벨을 눌렀다. 라임맛 탄산수 한 병을 더 주문해주셨다. 빈잔을 입에 가져다대며 이제 다시 입을 좀 떼보려고 하는데….
“솔직히 몸조리도 잘 못하시고 다시 복귀하셨는데 하영님이야말로 너무 몸 상해가면서 하시면 안 되죠. 저희도 다 걱정해요.”
규연님의 사회생활 모먼트가 튀어나왔다. 규연님과 하영님은 비슷한 나이다. 규연님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자식도 있다고 들었다. 워낙 본인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라 잘은 모르지만.
“저희 와이프도 사실 둘째 임신했거든요.”
규연님의 폭탄 발언. 컥컥. 닭꼬치 하나가 거의 목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내가 이제 본론을 위한 서두 빌드업을 시작해야할 타이밍이었는데! 규연님은 아까 혼자 하이볼을 시켜 먹더니, 주량도 약한 사람이 벌써 눈가가 붉었다.
“아 진짜? 규연님 둘째 생각 없다더니!”
하영님이 기쁨에 반색했다. 팀원 대소사에도 눈 밝히며 기뻐해주는 팀장님.
“와이프가 그래도 애가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냐고 해서.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이제 병원에서 안정됐다고 해서 말씀드려야지 싶었어요.”
와, 축하드려요! 세빈님이 박수 치기 시작하자 정신 차려보니 나까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박수치는 내 앞으로 탄산수가 놓이고, 탄산수 뚜껑을 돌린 것 뿐인데, 활화산처럼 탄산이 분출되고…. 콸콸 쏟아진 탄산수를 눈으로 보는데 시원해지는 건 허벅지였다. 내려다보니 내 청바지로 쏟아지고 있는 탄산수. 모두가 급하게 건네주는 티슈. 감사합니다. 입으로 중얼대며 청바지를 툭툭 닦아냈다. 태주님에게로 안 튀도록 최대한 소심한 몸짓으로….
“안 되겠다, 괜찮아? 화장실 가서 닦고 와요.”
심각해보였는지 하영님까지 나섰다. 어색한 걸음걸이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여기 화장실이 어딜까요.
물어보자 건물 화장실을 써야한다는 점원의 안내. 판교는 어떻게 된 게 다 건물 화장실을 써야하냐. 구시렁대면서 화장실로 들어왔다.
청바지에 멍처럼 남은 시커먼 물자국이 흉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면 기회를 틈타 나에 대한 어필을 해보는 거다.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 아!”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순간적으로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앞에 걸어오던 사람 운동화를 밟은 것 같아, 반사적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마주한 얼굴을 보자마자 턱이 다물렸다.
가타부타 괜찮다거나 혹은 인사도 없이 바로 남자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버린 사람과 시선이 맞닿은 건 대략 3초. 혹은 4초.
남자 여자 화장실이 바로 붙어있어 내가 너무 빠르게 나오면서 상대 발을 밟은 거였다.
3초 정도의 짧은 찰나였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봤다.
내가 밟은 운동화 앞코 주인이자 냉랭한 얼굴로 바로 들어가버린 건 문도형이었다.
바로 숙희에게 연락했다.
정전 때문에 문도형이 다시 잡은 회식 장소가 우리 닭고기 집과 같은 건물 돼지고기 집이었다.
숙희는 의리파답게 내가 없다고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말도 없이 단체방을 나가고 재모임에도 아무 이유를 대지 않고 거절 버튼을 눌러 화가 난 걸까.
무감한 얼굴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린 문도형은 대놓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 회식에서 기회라는 건 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세빈님의 비혼 이슈로 넘어갔다. 술 들어간 주연님은 세빈님에게 소개팅을 다섯 번이나 해줬는데 모두 거절한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하소연이었다. 주연님이 세빈님에게 여자를 소개팅 시켜줬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주연님한테 여자 사람 친구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팀에서는 감정 없이 일하는 로봇 같은 분에게도 친구들이 있다니. 주연님이 사석에서 동성도 아닌 이성 친구들과 노는 모습은 너무 낯설어서 혼자 대화를 더듬더듬 상상하며 따라가는데 오래 걸렸다.
태주님이 우리도 하이볼을 시켜 먹자기에 몇 잔 홀짝댄 것도 여파였다. 어제 잠을 못 잔 탓인지 순식간에 정신머리가 노곤노곤 해졌다.
“저는 정말 우리팀을 사랑합니다.”
막판에 한 어필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그 말을 들은 모두는 그냥 웃기만 했다.
“어, 우리도!”
세빈님의 대답에 모두 와하하 웃는 것으로 자리는 쫑났다.
회식 이후 일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주말을 거치면서 하영님의 그 대화는 그저 정말 순전한 호의에서 ‘우리 치크폴리오팀 말고 다른 팀도 경험해봐라. 단, 아주 먼 미래에!’ 정도의 격려는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하영님의 말을 멀리서 해석하게 되었다.
그것은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나쁘지는 않았다.
일상은 정말로 그대로였다.
아침에 꿀떡 먹는 사람이 둘에서 셋이 되었다는 것 정도만 제외하면.
“연조님 혹시 오늘 점심 약속 있어요?”
하지만 역시나 내 인생의 고요는 태풍의 눈 뿐이었다.
“아 아뇨 하영님 저 점심 약속 없는데요!”
늘 누구와도 점심 약속 없이 팀원들과 먹는다는 걸 알면서 하영님이 물었다.
“그럼 오늘 나랑 둘이 먹을까?”
하영님이 다시 달라졌다. 태주님이 왜 둘이서만 맛있는 걸 먹냐며 부럽다는 소리를 해도 껴주지 않았다.
어디 가냐는 세빈님의 질문에도 비싸고 맛있는 것을 먹을 거라는 팀장님 답지 않은 부러움 유발 멘트를 날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와 단 둘만의 식사?
하영님이 그 어떤 팀원에게도 이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심장이 새파래진다.
올 것이 오고야 말 것 같다.
밥 먹는 내내 병 든 닭처럼 먹었다.
“연조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하영님은 무려 7만원짜리 일식 코스를 시켜주셨다. 도합 15만원도 넘는 점심을 먹고 나왔지만 맛이라곤 하나도 안 느껴졌다. 그리고 하영님이 회사에서 아주 먼 곳에 날 데려와놓고 단골 카페라며 이름도 해괴한 원두의 드립 커피를 시켜주셨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회사에서 먼 곳까지. 사색이 되어있는데 하영님이 사람 속도 모르고 그러는 것이다.
“아 그냥요 왜 이렇게 저한테 비싼 밥까지 사주시나 싶어가지고.”
“지금 제일 속상한 사람은 사실 난데. 연조님이 벌써 그러니까 내가 얼른 말해야 할 거 같네.”
드디어 ‘그것’이 온다. 내가 밀려나는 이유는 뭘까. 유민정이 우리 팀으로 오는 걸까. 그렇다면 유민정은 일평생 다져온 고급 패션 센스로 내가 모르는 브랜드들을 척척 우리 팀에 제안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통 담당하는 팀도 아닌데 브랜드를 잘 아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그렇게 우겨보고 싶다. 우리는 유료화 서비스를 구축하고 기획하는 팀인데. 사업 모델을 잘 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수저가 결정하는 지갑 열어 완성해야하는 고급 취향 따위가 중요한 재능 소스가 아니지 않느냐고.
“나 연조님이랑 오래오래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우리 연조님 일 잘하는 거 너무 여기저기 다 소문 났나봐.”
피말리지 말고 본론으로 말해달라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저는 무슨 팀으로 가나요. 거기서도 정 붙여서 일하면 이런 식으로 여기 저기 핀볼하듯이 떠밀다가. 그렇게 퇴사 엔딩을 맞는 게 공채 아닌 인간의 숙명입니까.
“지난달에 3I 위원회에서 통과된 아이템 하나가 있대.”
3I 위원회. 이건 우리 회사에만 있는 시스템이었다. 한별의 모든 서비스들이 처음 선보일 땐 테스크포스 형태로 시작된다. 그러다 자리를 잡으면 정식 조직으로 자리한다. 한별이 여태까지 몸집을 불려온 방식이 그런 식이었다. 처음의 사업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3I(Initial & Inventive & Independent) 시스템을 통해 누군가 공정하게 사업 아이템을 발의하면 위원회가 검토한다. 3I 위원회 검토가 끝나고 해당 팀을 테스크포스 형태로 가동할지 말지 최종 위원회가 검토한다. 정식 테스크포스 진행이 확정되면 사내에서 지원을 받아 해당 팀에 근무할 인력들을 꾸린다. 혹은 3I 발의 시점에 이미 함께할 인력들과 함께 아이템을 발의하기도 한다. 우리 치크폴리오도 개발자 5명이 발의한 아이템이었다. 인공지능 모델을 의류쇼핑 사업과 접목시키자는 목적이었다. 그 개발자 중 한명이 하영님 남편이었다. 매일매일 남편에게 이 서비스 비전에 대해 소개 받던 하영님은 이전에 있었던 쇼핑몰 쪽 플랫폼 서비스 담당에서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영님 남편 역시 치크폴리오 개발팀 팀장이었다.
“우리 회사가 요즘 MZ세대 맞춤형 플랫폼 개발하고 싶어 혈안인 것 알지? 우리 치크폴리오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한 거였잖아. MZ세대 타깃하려고.”
“예. 알고 있어요.”
“이번에 3I 위원회에서 통과된 아이템이 MZ세대 타겟하는 소통형 소셜 플랫폼이래.”
한별은 소셜 플랫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시도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플랫폼들에 밀렸다. 20년 전쯤에는 그 시대에 맞는 나름 소통형 소셜 플랫폼으로 선도하기도 했지만. 시대가 급변하며 변화를 읽지 못해 서비스는 접었다. 언제나 신규 유입을 늘려야만 하는 IT회사 숙명처럼 젊은 유저들을 어떻게 계속 유입시킬지가 가장 골머리 썩는 숙제였다.
“그 모임 나가라고 추천한 게 나였으면서 이젠 내가 내 발등을 찍었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사견이고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까 아쉬움의 사설 같은 건 절대 넣지 않으려고 해. 이 모든 걸 차치하고 지금 연조님을 가장 아끼는 선배로서 말하자면, 나는 연조가 이 기회를 꼭 잡았으면 좋겠어. 나도 고민 정말 많이했어. 연조를 우리 팀에 계속 남겨두고 싶었고 또 욕심도 많이 났으니까.”
“곧 조직개편이 시작되고… 저는 우리 팀을 떠나야 하는 거죠? 근데 팀장님 저도 우리 팀에 더 있고 싶은데…….”
내 말에 하영님이 잠시 또 눈을 키웠다가, 이내 약한 웃음소리를 냈다. 시원한 웃음이 아니었다. 어딘가 허탈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였다.
“내가 옛날에 이상한 소리를 해서 연조님 괜한 걱정 시켰구나. 조직개편 같은 건 없어.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야.”
여기는 비싼 카페라 커피도 점원이 직접 가져다줬다. 우리 앞에 각각 한 잔씩의 커피가 놓였다.
“이번 3I 아이템 발의자는 문도형님이었어. 바로 통과가 됐대. 나같은 직원도 3I 아이템이 정식 검토가 끝나고 승인이 되어야만 알 수 있어. 그 전까지는 모두 대내비잖아. 그게 우리 회사에서 누구든 3I 아이템을 자유롭게 발의할 수 있는 문화로 자리잡은 이유기도 하고.”
문도형? 내가 아는 그 쥐띠 문도형? 우리 앞에 놓인 잔에서 수증기가 약하게 일다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도형님이 1차적으로 함께하고 싶은 인력들을 리스트업해서 인사팀에 전달했다고 해. 그 인력에 해당되는 팀장급들에게 오늘 최종적으로 그게 누구인지 통보가 됐고. 물론 그 전에 인사팀에서는 팀장들이 마음의 준비할 시간을 좀 줘야하니 귀띔을 해줬어.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연조님 데리고 카페 가서 괜히 횡설수설 했었던 거야. 그날 아침에 알게 됐거든.”
“그, 도형님이요? 그 문도형?”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문도형과 제대로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다. 나의 비전에 대해 말을 한 적도 없고, 내가 무슨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경력을 가졌는지조차 입 뗀 적이 없다. 우린 거의 초면과 비슷하고. 심지어 지난 주 건물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땐 냉랭하게 쌩까고 무시한 채 지나갔다.
하영님 숙제에 마지못해 96모임에 나가긴 했어도, 그날 거기서도 문도형에게 삼양동 사는 우리에게는 관심 갖지 말라고 못박아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차 태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도 갈 길 다르다고 말했으니 신경 끄라고 일갈했었다.
“최초 아이템 발의자는 함께 하고 싶은 팀원들을 적어서 낼 수가 있어. 검토야 직책자들이 하고 실무 인터뷰도 해야하고 관문들이 많지만. 이건 연조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니까.”
곧 인사팀에서 연조님에게 연락이 갈 거야.
인터뷰를 수락하면, 정식으로 그 테스크포스로 이동할지 말지에 대한 간단한 미팅이 진행 돼. 3I 검토 위원들이랑 인사팀에서도 같이 면접을 진행할 거야.
연조랑 나랑 이렇게 짧게 일하고 헤어지는 건 정말 너무 아쉬운데, 문도형님이 연조님을 아주 좋게 본 게 확실해. 그 모임 다녀오고 나서 다음 날 나도 이 이야기 전해 들은 거거든. 다른 사람들은 누가 뽑혔는지 모르지만, 연조님, 나는 연조님이 여기로 가서 일해봤으면 좋겠어. 이건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 도형님은 대표님이 무슨 비전을 그리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니까. 실패하는 프로젝트로 끝나지 않을 거야. 석준님이 계속 코칭을 해 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 석준님이 제일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도형님을 통해서 시작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연조님, 인사팀에서 연락이 가면 인터뷰를 수락해.
거기서 6개월 근무하고 다시 이전 팀으로 돌아올지 말지는 그때 가서 다시 정할 수 있어.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걸로 하고.
모든 이야기들이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수중기처럼 귀에 맴맴 맴돌다 흩어질 뿐이었다.
문도형이 3I 시스템을 통해 사업 아이템을 발의했다. 거기 추천 팀원으로 나를 선택했다고.
회사에 아무리 찾아도 홍연조 동명이인은 없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나를 왜? 도대체 왜?
그리고 그날 밤.
인사팀에게서 3I 위원회에서 승인 검토 된 프로젝트에 내가 TF일원으로 제안되었으며 인터뷰 의사를 묻는 내용 메일이 도착했다.
프로젝트 명은 코지버블(Cozy Bubble) 테스크포스.
첨부파일 몇 개를 통해 최초 발의자 문도형이 쓴 기획안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와 연결되고 싶다. 타인의 일상이 궁금한 마음 그리고 나의 일상을 부풀려 포장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시종일관 사진을 찍어 SNS에 일상을 업로드한다.
한별은 장기간 1020 주요 소비자들이 소비하는 SNS 형태에서 외면당해왔다. 1020 주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에 대해 어느 때보다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바. 실제 세계에서 구현해야 하는 일상의 포장이 아닌 내가 구현하고 싶은 일상을 만들어 보여줄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제안하는 것으로 새 시대의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 패러다임을 한별에 제안하고 싶다.
코지버블 프로젝트는 타인과 ‘연결’ 되고자 하는 본질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가상 세계 속 우리는 모두 귀엽고 동그란 버블 속에 나만의 세계를 만든다. 비눗방울은 가볍게 곳곳을 떠돌듯, 이 코지버블은 언어 국가 한계 없이 날아다닌다.
가장 나를 나답게 표현할 수 있는 비눗방울 속을 닮은 코지 버블은 가상 세계 속에서 내 공간을 가장 나답게 꾸밀 수 있다.
나의 코지버블은 불특정 다수 혹은 나의 가까운 현실 세계 친구들에게도 공개할 수 있다. 현실 SNS에서 나의 피드를 값비싼 것들로 꾸며 주목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수반된다. 좋은 호텔, 좋은 음식점, 남들이 가는 혹은 가보지 못했던 경치 좋은 해외 여행지. 내 피드 사진에 담으려면 물리적 이동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이 들어간다.
하지만 코지버블은 현실과 분리된다. 가상의 공간이지만 내가 정한 테마대로 꾸밀 수 있다.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가수를 꿈꾸는 누군가가 현실에서 가수가 되지 못했다면 이곳에서는 나의 코지버블을 무대로 꾸미면 된다. 줕외해 아쉬움 남은 나의 전공이 미술이었다면 내 코지버블 테마를 화실로 꾸밀 수 있다.
나의 코지버블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얻어 ‘포토 지수’를 획득하면 이것을 코지버블 서비스 내에서 재화로 사용 가능하다.
SNS에서 일상이 더 많은 공감과 부러움을 살수록 ‘좋아요’를 받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멋지게 드러낸 코지버블을 만들수록 타인들이 내 코지버블을 앱 속에서 사진 찍어가고 ‘포토 지수’가 올라가고 나는 획득한 포토 지수로 프리미엄 한정판 에디션 혹은 유료 아이템들을 구매한다.
지인 뿐만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 나와 관심사가 통하는 사람들과도 비대면으로 함께 이어질 수 있다. 독서에 특화된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나의 코지버블을 서재로 꾸몄다면 함께 서재로 꾸미고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설 수 있고, 똑같은 관심사로 뭉친 나의 ‘버블 번치’를 만들 수 있다.
동일 관심사 가진 사람들끼리 비눗방울이 뭉쳐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우리 버블 번치의 덩치가 특정 도달값 이상에 달하면 코지버블 서비스에서 그 무리들을 위해 특별 리워드를 줄 수도 있다. 책 모으는 걸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책장을. 혹은 현물의 전집을 집으로 보내주는 이벤트를 할 수도.
와인 위스키를 좋아하는 이들의 버블번치 전원에게는 특정 시음권을,
아직 브랜드를 개설하지 못한 조향사들의 버블 번치에게는 실제 향을 만들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그들만의 상품을 첫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취미가 맞는 사람들끼리 ‘버블 번치’를 이루면 서로의 방을 쉽게 드나들 수 있고 서로에게 맘껏 방명록도 남길 수 있으며 같은 버블 번치들끼리 교류할 수 있는 커플 아이템도 제공해준다.
우리 서비스의 최종 목표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여러 개의 버블 번치에 속하고 싶다면 나의 코지버블을 여러개 생성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 아무런 제약 없는 코지버블 속에서이지 않을까.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SNS를 오히려 포기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새로운 솔루션을 내놓는다. 가장 본인 답게 살고 싶고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코지버블 속에서 나를 대신하는 나의 캐릭터는 가장 나 다울 수 있다는 뜻의 ‘버블비(Bubble, Be)’
나에게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되고자 하는 모든 이상을 실현해줄, 가장 나다운 버블비의 공간 코지버블. 우리 한별은 젊은 세대와 호흡할 수 있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소셜 플랫폼을 세상에 내놓는다.
추후 각종 한별 서비스와 코지버블이 연계될 수 있도록 고도화한다.
…….
코지버블 프로젝트에 대해 길게 쓰인 내용의 일부를 읽으면서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어딘가에서 봤던 아이디어들이 군데군데 뭉쳐있다는 생각, 또 대단히 기발하다거나 참신하기보다는 일전에 자리잡지 못하고 사라졌던 어떤 수십년 전 그리고 최근 서비스들을 파편적으로 모아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일 가장 아래 부분에는 인사팀의 제안이 적혀있었다.
3I TF 발의자 문도형님은 위 프로젝트 팀원으로 홍연조님을 추천했습니다.
만일 해당 프로젝트 참여 의사가 있을 경우 하단 설문 링크를 통해 인터뷰 참여에 수락해주세요. 추후 인사팀, 3I 위원회, 최초 발의자와 함께 간단한 프로젝트 핏 미팅이 진행됩니다.
모든 내용은 대내외 각별한 보안 유지를 부탁드립니다.
하영님이 했던 한마디 말이 마음에 내내 떠올랐다.
이 프로젝트가 아주 대단해서, 문도형의 아이디어가 너무 참신해서, 이게 회사를 이끌어갈 어떤 대단한 새 동력이라서가 아니다.
-내가 이 회사에서 그래도 끝까지 가봐야지, 그런 믿음이 있는 상태로 일하면 동기부여 자체가 달라질 수 있거든. 연조님. 나는 연조님도 한 번 그래봤으면 좋을 거 같아.
하영님은 내가 공채가 아니란 이유로 언제든 수 틀리면 떠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버려질 걸 알기 때문에 너무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일정 부분 다 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내 앞에 다시 한 번 밝은 전구가 타오른다. 어떤 날벌레는 날개가 타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그 뜨거운 빛에 홀려 돌진한다. 불을 보면 달려들어야 한다고 학습받아서가 아니라, 본능 속에 이미 그것이 각인된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날개가 실은 돌연변이라 뜨거운 별에 닿아도 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