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by 모정연

꿀떡을 먹고 내려오자 하영님이 복도를 걸어오고 계셨다.

“아, 역시 연조님 나왔구나.”

본래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인데 출근하신 것이다.

“연조님 커피 마셨어요?”

“아, 아뇨. 아직요.”

방금 먹고 온 꿀떡과 아메리카노가 아직 그대로였지만 왠지 안 먹은 척해야 할 것 같았다.

“잘됐다. 우리 회사 카페 같이 가요.”

가방을 두자마자 지갑을 챙기는 하영님을 따라 일어섰다.

“하영님 오늘 재택하시는 날 아니세요?”

“아, 맞아. 맞는데. 연조님 보러 나왔지.”

둘이 반드시 대면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던가? 그런 이슈는 전혀 없어 잠시 눈이 커졌다.

“그냥 우리 둘이 이렇게 티타임 가진 지 되게 오래된 거 같아서.”

본래 하영님은 팀원들에게 관심 많고 케어 잘하는 팀장님이었다. 하지만 하영님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마터면 걸음이 꼬일 뻔했다.



다시 온 카페 라운지는 한바탕 인파를 치르고 난 뒤라 한산했다. 팀장님은 언제나 팀원들과 오면 브루잉 커피를 주문하셨다.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팀장님과 함께 있으면 시간에 쫓겨 먹지 않아도 된단 뜻이었다. 작은 쉼이라도 선물해주는 팀장님이었다.

“어제는 잘 다녀왔어요? 재밌었어요?”

“어제 갔던 식당이 새로 생긴 호프였는데 정전이 돼서요. 자리 막 시작하려고 할 때 파했어요.”

축약된 진실이지만 거짓 한 톨 없었다. 팀장님은 어김없이 정전이란 단어에 눈을 밝히며 궁금해 해주셨다. 다정한 염려에 기분이 좋아졌다. 같은 의미 말도 하영님 입을 거치면 특별해졌다. 각자에게 동기부여해주는 말들을 아끼지 않는 팀장이면서 팀원들과 대화할 때면 늘 눈을 맞춰줬다. 일에 대한 열정과 진심을 귀하게 여겨주는 팀장이라 언제나 고마웠다. 비록 마모되는 일만 남은 일개 나사의 운명이더라도 하영은 연조가 꼭 필요하고 듬직한 부품임을 명기시켰다.

엄마와 회사원. 내 인생에서는 영원히 겸직이 될 일 없는 두 가지의 포지션을 완벽히 수행해내는 사람이었다. 가지 않을 길이라고 해서 동경이란 감각까지 불능이 되진 않았다. 집 가서 오롯이 쉬기만 해도 출근이 힘든데 도대체 어떻게 병행이 가능한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근데 연조님 있잖아.”

잠시 생각이 샛길로 새던 중, 진동벨을 손에 꼭 쥔 하영님이 평소와 달랐다. 그제야 정전 이야기 할 때의 토끼같은 눈매가 사라진 팀장님이 보였다.

“연조님은 우리 회사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물론 그렇긴 한데, 우리 회사 서비스에 우리 서비스 말고 다른 사업팀 가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이제껏 팀장님에게 들었던 모든 말 중에서 가장 뜬금없었다. 플랫폼 기업이니 한별 내부에는 수많은 서비스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서비스들이 출시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추억의 블랙홀로 또 어떤 것은 신성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치크폴리오는 가장 큰 규모로 빛을 발하며 새로 태어난 별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 서비스였다. 연말에 유료화 서비스까지 개설하고 나면 그 성장률이 얼마일지 최초 일원으로 함께할 기쁨이 동태처럼 절여지는 현실을 그나마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었다.

“어 아니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요.”

선배들과 하던 실패는 생존의 기로에 놓였다. 하지만 여기서의 실패는 절대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 자본의 맛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 회사를 살릴 수 있던 일말의 자금이 여기서는 휘발돼도 그만인 판관비로 쓰였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저는 우리 팀이 너무 좋고.”

웅변하듯 당황해서 어영부영 덧붙였다. 때마침 하영님 진동벨이 울렸다. 브루잉 커피 두 잔 나왔습니다, 바리스타 분들의 따끈한 목소리에 일어나야만 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룩북 아이디어는 최초 하영님 발의로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지난해 서비스 유입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아이템이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도 치크폴리오는 촉망받는 팀이었다. 이제 우리가 굳건히 신사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썼다는 반짝임 말고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파이프라인을 확실히 만들어준다는 확신을 줄 타이밍이었다. 잘 되는 팀에서 유능한 팀원들과 생사의 기로에 서지 않아도 되는 성공 전략을 세운다는 게 얼마나 짜릿한 감각이었는데.

“커피 맛있겠다. 맛있게 마셔 연조님.”

이미 아메리카노와 꿀떡을 마셨으니 이깟 브루잉 커피에 감흥이 동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굴었나? 너무 나태했나? 대기업은 이렇게 잘 다니고 있는데도 갑자기 팀을 옮기기도 하나? 설마 유민정이 우리 팀에 오는 건가? 생각이 멋대로 널을 뛰었다.

“너무 놀랄 건 없구, 그냥 연조님은 그런 생각 안 해봤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더 재밌고 우리보다 이용자수 훨씬 많은 재밌고 DAU 높은 서비스에서 일해보고 싶을 수 있잖아. 그래도 명색이 사업인데. 우리는 아직 수수료만 받는 장사니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순 있겠지만 문제는 지금 하영님이 너무 각잡고 하고 있다는 거였다. 설마 재택근무인데도 본사 출근한 이유가 나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아뇨 하영님 저 치크폴리오 팀에 말뚝 박을 거예요.”

순간 절실한 진심으로 말했다. 정규직이라는 세글자에 내가 너무 나태하게 나의 고용안정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안 했던 건가. 커피는 삼키기도 전인데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했다.

“전 하영님도 너무 좋고, 우리 팀, 우리 팀원들이 너무 유능하잖아요. 전 태어나서 이렇게 데이터 지표도 잘 보면서 손익 계산도 잘 하는 팀원들 처음 만났어요. 제가 예전에 왜 망했냐면요, 저희는 피엔엘을 볼 줄을 몰랐어요. 그냥 마음이랑 열정 가는대로 움직였어요. 사실 전 그게 되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니라는 걸 배우고 왔으니까, 여기서 숫자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배우고 있고…. 물론 제가 제일 부족하지만 정말 유능한 선배님들이랑 팀장님들 보면서 우리 룩북 서비스 어떻게 더 퍼트릴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손익 개선해서 선보일 수 있을까 매주 개발팀이랑 미팅하는 것도 정말 너무 재미있고…. 제가 많이 어렵다고 했던 건 그냥 개발자분들이 쓰는 용어가 어려워서….”

하영님이 웃었다. 하필이면 컵을 입에 대고 마시던 타이밍에 웃음 터진 바람에 입가에 커피가 흘렀다. 얼른 테이블 위 티슈를 뭉텅이로 집어 건넸다.

“이래서 내가 연조님 예뻐했는데.”

젠장! 왜 과거형으로 말하시는 건데요 팀장님! 앞으로도 예뻐해 달라고! 이제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하영님을 바라봤다. 말하고 나니 나의 말들은 또 지나간 실패에 연연하며 열정 나부랭이만 내세웠다. 학교가 학원도 아닌데 ‘배우겠다’는 태도로 어필했다. 면접 보는 것도 아닌데 나의 성실성을 어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다소 억울했지만. 저의 모르는 이런 떠보기 식 질문은 아직 완전히 한별에 두 발 내디디지 못한 내겐 너무 어려웠다.

“젊을 때 다양한 경험 하면 좋으니까. 나도 그게 항상 늘 아쉬웠거든.”

하영님은 차분했다. 앞에서 어린 팀원이 어쩔 줄 모르고 헤매는 것과 달리 차분했다. 입술 닦은 티슈도 보기 좋게 구겨 손 안에 쥐었다.

“우리 회사는 서비스들이 정말 많아. 연조님이 한 번 회사 조직도 본 적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우리 회사 다니면서 어떤 팀이 있는지도 잘 모르기도 해. 조직개편도 적지 않게 자주 하다보니까. 계속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조직개편! 이거구나! 이렇게 잘 되는 우리 조직이 개편하는데 거기서 내가 나가 떨어지게 되는 거구나! 이제 불안은 거의 현실이 되어 정수리를 댕댕 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 팀에 오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던 스타일이었어. 연조님도 알다시피 나는 좀 안정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잖아. 어떤 면으로는 또 보수적이기도 하고. 근데 내 동기는 아니었거든. 뭐든 다 도전을 하는 거야. 어렸을 땐 나랑 같이 들어온 친구인데 뭐하러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할까? 왜 아무도 안 가려는 서비스를 저렇게 하려고 하는 걸까? 왜 그냥 조용히 일만 해도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에서 저렇게 불나방처럼 날아다니는 걸까 사실 이해가 하나도 안 갔었거든?”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태주님에게도 해주신 적 있었을까 문득 묻고 싶었다. 이건 비공채인 나를 위한 이야기일까.

“처음에는 그 친구가 회사에서 그렇게 에너지를 쓰는 게 너무 낭비같아보였어. 내 같잖은 선민의식인지도 몰라. 난 그렇게 할 에너지가 없으니까 무시하는 게 내 자존심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을 수 있지. 젊었을 때 내가 더 비겁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우리 포털에서 검색한 걸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랬었어. 이게 하나의 추억과 정보에 대한 아카이빙이 되는 한 사람 인생의 빅데이터가 될 수 있겠다고.”

SNS가 이렇게 대규모로 유행하기 전 우리 회사에서는 개인이 우리 어떤 서비스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지 감성적인 데이터 분석 지표로 뽑아내 제공하는 단발성 서비스를 했었다. 휘발되는 정보로 본인의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유의미한 지표라는 면에서 몇 년 동안 반짝 인기가 있던 서비스였다. SNS가 대세가 된 이후로는 그렇게 길게 아카이빙하는 정보가 시류에 안 맞아 밀려났었다.

“근데 그 친구는 하겠다고 하면 정말 다 해내는 거야. 나중에서야 알았어. 그 친구는 에너지가 많은 게 아니라 그냥 특별한 사람이야. 일하는 걸 좋아하고 모두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그때 생각없이 테이블 위에 엎어놨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 핸드폰 봐도 괜찮아. 우리 어차피 오늘 오전 여유 있으니까.”

하영님이 두 손으로 얼른 보라고 손짓했다.

아니 괜찮아요, 말하지만 하영님은 계속 울리는 진동에 얼른 확인하라고 했다. 전원을 꺼버릴 생각으로 잠시 액정을 켰다.

[우리 내일 다시 모여요. 이번에는 제가 제대로 된 장소 섭외 해놨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실 수 있을 거예요.]

문도형이었다.

아버지 회사에 온 문도형은 결코 이런 은은한 조직 개편의 불안함과 정규직임에도 팀장 한 마디에 고용 불안정성을 느끼며 나부끼는 촛불처럼 심장이 천박한 박자로 구를 일 없겠지.

[룸 2개 벽을 틀 수 있어서 저희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았어요. 예약도 마쳤습니다. 어제는 정말 너무 죄송했어요.]

“그냥 스팸이에요.”

하영님에게 말하며 웃었다. ‘이 방에서 정말 나가시겠습니까?’ 한치의 고민 없이 빠르게 ‘예’ 버튼을 눌렀다.

“여기도 이제 사람들 많이 몰려오려나봐. 시끄러워진다. 일어날까?”

하영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얼굴로 일어났다. 똥 싸다 만 느낌이었다. 그래서 하영님의 본론은 뭐였을까? 조직개편을 하니 이제 우리 팀에는 유민정 같은 허울 좋은 공채가 들어와야하니 나는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걸까? 이렇게 유능한 팀원들 있는 촉망받는 팀에 비공채 하나가 자리 차지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서?

“아, 연조님 있잖아. 내가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 생각을 왜 했냐면.”

컵을 반납하면서 하영님이 다시 천사같은 웃음의 팀장님 얼굴로 돌아왔다.

“연조님을 보면 그 친구가 생각나. 그 친구 보는 거 같아. 열정 많고 꿈 많고 하고 싶은 거 많고. 어디로든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친구.”

자유롭게 훨훨?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조직개편으로 저 멀리 날아가게 되어도 난 잘 해낼 거라는 격려?

“연조님은 그 친구를 정말 많이 닮았어. 그래서 내가 많이 부럽고 좋아해.”

결론은 좋아한다는 한마디면 심신의 안정을 얻어도 되는 걸까.

“저, 저도 하영님 조 좋아하는 거 아시죠.”

바보같이 더듬었다. 하영님이 다시 특유의 그 휘핑크림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보고야 말았다. 승강기를 타기 전 잠시 다시 어두워지는 팀장님의 안색을.

팀원을 아끼는 팀장님으로서는 조직개편으로 저 멀리 유배 떠나야하는 팀원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가 심적으로 너무 힘드신 것일 테다.

이제 맘 속으로 나의 유배는 확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퇴근 길. 편의점에서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1+1이거나 혹은 2+1의 횡재수를 노릴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제 할머니와 송지원이 생수 채우던 야외 냉장고 앞에 섰다. 오늘도 지원슈퍼 간판은 밝았다. 저토록 글씨가 큰데 난 왜 여태 인지하지 못했을까? 하긴 암만 송지원 슈퍼라고 대문짝만하게 박아놨어도 그 송지원이 그 송지원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 송지원과는 접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더니 맥주야?”

할머니가 웬일로 아는 척을 해주셨다.

“크게 다친 것두 아니에요. 여기 이것도 붙였어요.”

니트를 살짝 내려 짱구 데일밴드를 보여드렸다. 오늘은 먼저 핸드폰 케이스를 빼고 삼성페이 인식이 잘 되도록 카드 단말기에 갖다댔다. 할머니는 맥주 두 캔 바코드를 찍으셨다.

“평상 아직 추운데. 이거 가져가든지.”

따끈한 할머니 체온 묻은 담요를 건네주셨다. 오늘은 넙죽 받았다. 누구의 온기라도 필요한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요즘 부쩍 술을 달고 사는 엄마와 마주쳐 실갱이 하기도 싫었다.

하루종일 고등어 가시 박힌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하영님이 브루잉 커피 대가로 얹어준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서였다.

평상에 나와 앉자 그래도 엄마와 싸웠던 며칠 전보다는 날이 풀렸다. 아무래도 봄이 올 모양이었다.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맥주 한 캔을 땄다.

숙희는 왜 단톡방에서 혼자 나가느냐고 난리였다. 정말로 관심 없는 모임이라 정신 사나워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숙희의 사회생활을 위해, 숙희는 나오지 말고 있으라고 신신 당부도 했다. 숙희는 경력 공채인 나와 다르다. 아무리 공채가 아닌 것에 동병상련이라지만 숙희는 팀장님이 데리고 온 인재였다. 우리 하영님이 나를 밖에서 데려왔다면 이런 식으로 조직 개편에서 제일 먼저 숙청당하는 친구로 정하진 않았을 거였다. 난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룩북 서비스 까지는 정말 함께하고 싶었는데. 유민정이 내 자리에 앉을 것을 상상해봤다. 왠지 내가 아니라면 그 자리는 당연히 유민정 것일 수밖에 없겠다는 비약이 절로 됐다.

“와 새우깡도 없이.”

맥주 한 캔을 반 정도 비웠을 즈음이었다. 쑥 가게에서 튀어나온 건 송지원이었다.

사실 이런 우연을 기대하고 편의점 프로모션 대신 여길 택한 거였다.

“와 송지원님이다.”

송지원이 평상에 턱 내려놓은 것은 새우깡과 맛동산이었다.

“맛동산! 이거 비싸서 제가 잘 사먹지도 않는 건데!”

“슈퍼집 손자 찬스요. 저 안에서 창고 정리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친구 왔다고 늦게 알려주시는 바람에. 벌써 다 마신 거 아니죠? 알았으면 더 빨리 나오는 건데.”

“안에 계셨구나. 오늘 퇴근 엄청 빨리 하셨네요.”

“외근 나갔다가 바로 직퇴하느라 빨리 왔어요. 우리 평상에서 먹는 맥주맛이 일품인 걸 아는 분이 또 계셨구나. 역시 연조님은 뭘 좀 알아.”

송지원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슈퍼 손자는 이렇게 바로바로 꺼내서 먹어도 되는구나. 부러움에 탄식했다. 봉지 가른 맛동산과 새우깡은 극락의 조합이었다. 단맛과 짠맛 거기에 맥주의 톡 쏘는 맛까지 더해지니 일품이었다. 문어숙회와 하이볼 따위가 감히 견줄 수 없는 맛.

“지원님이 과자를 사주셨으니까. 제가 친구 얘기를 해드릴까요?”

“좋죠.”

송지원도 나를 따라 새우깡과 맛동산을 하나씩 조합해 입에 넣었다. 그 꼴이 우스웠다. 오늘도 밝은 금발 머리가 어둑한 동네 가로등처럼 밝았다.

“제 얘긴 아니고 제 친구 얘긴데요. 제 친구는 회사를 자기가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영원히 다닐 수 없단 건 알아요. 정년을 채울 수 없단 것도 알아요. 저처럼 아주 자기 주제파악을 잘 하는 친구거든요. 그리고 걔는 자기 회사를 되게 좋아해요. 아주 힘들게 들어갔거든요. 저처럼요. 저도 한별에 힘들게 들어갔거든요. 아 근데 오해하지 마요. 내 얘긴 아니니까.”

“그럼요. 나 지금 되게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얼른 뒷얘기 계속.”

송지원이 맥주를 마시며 경청했다. 레디 고 커리어에서 팀원이 아무리 개소리를 해도 경청하던 그 눈과 같았다. 본방 재방 삼방 챙겨본 내겐 익숙한 눈이었다.

“아무튼 제 친구가 팀장님도 좋아하고 팀원들도 좋아해요. 제 친구가 명문대가 아니거든요. 새로 생긴 대학교였어요. 돈 많은 재단에서 만든 곳이라서 장학금 빵빵하게 나온다고 해서 둘 다 입학한 거였거든요. 당연히 저처럼 집이 뭐 여유로운 친구도 아니고.”

송지원 앞에서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어차피 같은 서울 변두리 달동네 사는 마당에 가릴 게 없었다. 말하면서 사이사이 맥주를 먹느라 거의 비어갔다. 귀신같이 눈치챈 슈퍼집 손자는 잽싸게 냉장고에서 맛있는 맥주를 꺼내왔다. 카스 먹는 취향까지 암튼 우린 같았다.

“듣보잡 대학 나온 우리가 이렇게 좋은 회사 취직한 게 어떤 의미론 기적이니까 잘 다니는데. 오늘 그랬대요. 팀장님이 제 친구한테 갑자기 너 다른 팀 가보고 싶은 생각 없냐고. 우리 회사는 조직개편도 자주 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하다보니 흥분해 크레센도로 데시벨이 높아졌다. 송지원은 변함없는 목소리로 들어줬다.

“이거 완전 너 나가리 될 거니까 마음의 준비하고 짐 쌀 준비 하고 있어라 이거죠? 심지어 내 친구도 공채가 아니거든요. 거기 회사도 공채들만의 세상인데! 걔 팀이 지금 한참 잘나간대요! 거기 자리 호시탐탐 하이에나처럼 노리는 공채들이 그렇게도 많다는데! 그 잘난 서울대 출신 공채들이 그 자리 원하니까! 내 친구가 밀려나는 거예요! 왜냐 걘 되는 언어도 없지, 누구들처럼 해외대도 아니지, 그렇다고 서울대냐? 것도 아니고 국내 듣보잡 대학이지, 아니 우리 딴엔 수능도 드럽게 잘 봐야 들어가는 거였는데, 장학금 한두푼에 눈이 멀어서! 스펙도 후달리지! 딱 봐도 집안이 잘난 것도 아니지!”

말하다보니 내가 왜 밀려나야 하는 건지 화가 났다.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데 얼굴이 시뻘개졌다. 필시 알콜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친구분이 지금은 너무 당황스럽고 되게 억울하긴 하겠지만. 그 친구가 제 친구면 전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레디 고 커리어에서 반나절 미션(방송에서는 하여간 어린 출연자 애들한테 별 걸 다 시켰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 애들 데려다가 무료 아이디어 착취해간 못돼 쳐먹은 방송이었다!)으로 해괴한 아이디어를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물리적 시간 주고 실행하라고 할 때 침착하게 반응했던 송지원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은 당황스럽겠지만 그것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나 버린 거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이 악물어서 후회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고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건 내 몫이잖아요. 혹시 알아요? 가게 된 팀에서 내가 더 날아다니게 될지. 더 인정 받고.”

송지원이 갑자기 짠을 하자고 굴었다.

“제 친구 얘기도 해드릴까요 그럼?”

송지원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제 친구도 엄청 가진 게 없는 친구인데, 걔는 너무 너무 회사에 시끌벅적하게 입사를 하는 바람에 회사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얼마나 부족하고 부적합하고 회사에 안 어울리는 인간인지. 회사가 가십을 위해서 입사 시켰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아는 거예요.”

송지원이 덤덤히 이야기했다. 들으면서 차분히 맥주를 마셨다. 새우깡 와그작 씹는 소리도 미안해서 액체만 넘겨야 할 것 같아서.

“아무도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잘할 거라고 기대도 안 하는데 그 친구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한대요. 하다보면 그 친구한테도 분명히 기회가 올 거라고 믿어서. 그냥 그 친구한테 이 얘기가 혹시 위로가 될까 싶어서요. 연조님 친구한테 제 친구 얘기도 전해줘 보세요. 제 친구는 팀장님이 입사할 때 부탁까지 했대요. 제발 사고만 치지 말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가만히만 있으라고. 그 친구한텐 그게 그렇게 들렸대요. 그냥 네 발로 못 버텨서 나가는 그림이 우리한텐 제일 아름다우니까 오래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로. 근데도 아직 안 그만두고 잘 다니고 있어요.”

아무래도 송지원은 이게 내 얘기인 걸 아는 거 같다. 그게 아니라면 송지원도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두 친구를 소개시켜 주고 싶네. 아주 절친이 될 거 같은데.”

맥주를 갖다대자 송지원이 웃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8화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