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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열정 증후군

월간 성찰 1

by 반딧불


12월은 특별하다. 연말의 남다른 분위기나, 크리스마스의 설렘이 아니다. 왠지 느긋하게 지내도, 이불속에서 고구마를 까먹으며 종일 넷플릭스만 봐도, 해야 할 일을 다 미뤄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때문이다.

얼마나 흐뭇한 그림인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끝내주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이불속에서 뒹굴뒹굴하며 귤을 까먹는 기분이란.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그 느낌.


이렇게 좋은 12월은 항상 쏜살같이 지나가고 새해가 온다. 1월이 되면 거창한 1년 계획과 함께 쫓기듯 새벽부터 일어나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하나씩 격파하고 운동하고 공부하며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숨차게 살아야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본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일 년을 다 산 피로감으로 기진맥진이다.


이런 태생적 속성으로 인해 열심히 사는 사람 옆에 있으면 힘에 부친다. 뭘 하지 않아도 괜스레 숨이 차고 쓸데없이 죄책감이 든다. ‘열심히 사는 것 = 인생’ 기본값인데 그 기본값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잉여 인간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드니 꼭 열심히 사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뭐 어때. 꼭 에너지 넘치게 사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니까. 난 내 방식대로 살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 옆에 가지 않을 거야. 그곳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내 맘대로 뚜벅뚜벅 가다 보면 이상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내가 놓여 있다. 만화에서 본 것처럼 사람 많은 거리 한복판에 내가 누워있는 딱 그런 느낌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절로 이런 소리가 나온다. 나는 왜 또 이곳으로 나를 데려왔는가. 아무 제약 없는 곳에서 내 멋대로 살고 싶은데 왜 나를 이곳에 욱여넣었는지. 지금이 또 그런 상황이다. 브런치 작가들과 함께 성장메이트를 하며 매일 감사 일기를 쓰고 매달 책을 읽고 나누며, 성찰 보고서까지 써야 하는 그런 상황.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만 벅차 보인다. 그녀들은 한 달에 골치 아픈 책 10권은 너끈히 읽고, 여러 가지 활동에 SNS를 운영하고 필사를 하며, 글을 쓰고 운동을 한다. 일을 하며 아이들을 살뜰히 돌본다.


나와 격이 다른 그녀들에게 압도당한 마음 때문에 25년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이미 에너지는 ‘0’에 수렴되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쳇’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시작했으니, 꼴찌로라도 쫓아가는 수밖에. 올 일 년도 상당히 피곤할 거 같은 생각에 계획했던 다이어트는 살포시 접었다. 사람이 어떻게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다 하겠는가, 하나를 선택했으면 하나를 포기해야지.


내 레이더는 아마도 과잉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파수가 맞춰져 있고 그쪽으로 몸이 반응하는 증후군일 것이다. 다행이다. 올 한 해 읽기에 진심이고 싶었는데 강제적으로 진정성을 부여받게 되니 태생적 속성을 부수고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야말로 줄탁동시.


삼일 후면 원래의 나로 돌아오겠지만 과잉 열정 증후군으로 인해 다시 열정이 넘치는 그쪽으로 가겠지. 올 일 년은 또 이렇게 살아지나 보다. 돌아보면 의미있는 해로 기억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나저나 벌여 놓은 일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일의 내가 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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