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원짜리 바지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 흰색 바지라 관리가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이템은 아닌 것 같아 안 사기로 했다. 내가 4만원짜리 바지로 이렇게 고민을 하다니.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절약, 재테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사실 올해도 과소비를 조금 했다.) 버는 족족 다 쓴다거나 빚을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던 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1년에 유럽여행 2회, 회사가 잣 같으면 아시아 여행 2-3회 더 가고, 갖고 싶은 아이템은 가격 고민 없이 사는 삶이었다. 옷을 자주 사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 브랜드에 꽂히거나 회사가 또 잣 같으면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질러줬다.
친구들한텐 말하기 창피한 소비 경험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파리+런던 여행에서 천만 원어치 쇼핑을 한 것이다. 사실 정확한 금액은 모르겠다. 신용카드 한도가 천만 원이었는데 파리 백화점에서 한도 초과로 승인 거절되었다는 것만 안다... 더 기가 막힌 건 카드사 홈페이지를 확인하기 전까진 한도 초과로 카드승인이 거절됐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같이 여행 간 친구 카드로 소비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샀는가. 기억나는 아이템은 버버리 트렌치코트 (무려 본점에서 서비스 음료 마시며 우아하게 샀다.) 바버 재킷 3개, 멀버리 백, 입생 로랑 지갑, 캠퍼, 레페토, 백화점 옷 몇 벌. 남들 사는 건 다 샀다.
여행에 쓴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여행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매우 자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여행 사진을 볼 때, 여행지에서 듣던 음악을 들을 때, 요가 수련 중 좋았던 여행지가 드라마처럼 지나갈 때, 코로나로 여행 가기 힘들어졌다는 뉴스를 볼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물건에 쓴 돈은? 아깝다. 아깝다... 그 돈이 지금 내 잔고에 있으면 은퇴가 더 빨라질 텐데.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과거의 소비 덕분에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디에 돈을 써야 행복해지는지 더 잘 안다.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부르고, 사고 또 사도 욕심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배웠다. 물론 안 쓰고 배웠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현명하진 못하다.
어언 7년의 맘껏 소비하던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원하는 물건이 아닌 필요한 물건만 들이려고 한다. 현재 내 방엔 침대, 작은 철제 서랍장, 스피커, 선풍기뿐이다. 이미 웬만한 물건은 구비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물욕도 줄었다. 쇼핑몰 사이트를 뒤지던 시간에 이렇게 글도 쓰고 있다.
통장의 잔고 숫자도, 나의 마음도 변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나의 지랄 맞던 소비 덕분이라 정신 승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