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love letter

발칙하지만 순수한 아이들의 성장 일기

by always봄

집 대청소를 하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종이 상자 속, 낡고 빛바랜 편지들 사이에서 유독 시선이 쏠리는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love letter'


내가 가장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인 1995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졸업앨범 속에서 찾은 첫사랑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지는 진실과 고스란히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감정선 그리고 흘러나오는 애틋한 ost가 아직도 생생한 'love letter'


그 편지는 내가 처음 받아 본 러브레터였다.

누구든 love letter를 써보지 않은 경험은 없었으리라. 깊은 밤 잠 못 이루며 온전한 사랑과 떨림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 그 편지의 시작은 25년 전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기말이었던 1999년, 그 해 사회는 세상이 멸망한다는 종말론이 퍼지고 휴거를 믿는 신흥종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사회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한 해였다.

떨리는 손으로 내게 편지를 건네고는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던 그녀. 그게 첫 번째 편지였다. 일상의 얘기를 쓴 짧은 편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 대한 호기심을 표현하고, 급기야 사랑까지 고백한다.

그 편지들을 받았던 나는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에 답장을 하지 못했다.


'금지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계속 이어나갔다.


세기말이 지나고 2000년 6월 어느 날, 그녀는 급기야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협박성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 당시 내 나이 29, 그녀는 학원강사로 첫 발은 내디딘 나의 첫 제자들 중 한 명이었다. '금지된 사랑'인 '사제지간'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던 더 큰 이유는 18년이라는 나이 차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 소녀가 쓴 편지 하나를 공개한다.


to 영어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클때까지 장가 가시면 않되요. 알아죠!

그면 ♡해요.

답장써주세요

2000년 6/8

이슬이 올림


그 저돌적이면서 사랑스러운 아이는 '혜자'였다. 매 수업마다 제일 먼저 학원에 도착해 맨 앞자리에 앉아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볼살이 앙증 맞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쓰던 cute, lovely한 그 아이. 오타는 많지만 정성스럽게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표현했던 나의 사랑스러운 첫 제자.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짓게 만드는 마법의 소녀. 내가 그 아이의 첫사랑이었던 게 너무 행복하다. 위에 있는 편지에 '이슬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소녀가 '혜자'다.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개명까지 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뭉클하고 가슴 떨리게 만드는 말이 어디에 있을까? 혜자의 그 고백이, 그 말이 초보 학원 강사인 나에게 많은 힘을 줬고, 그 순수한 눈빛의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를 사회라는 고여 있고 조금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물에 더디게 물들게 했다. 갑자기 내 자랑 하나 하고 싶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상스러운 욕을 해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첫 학원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초등학교 아이들과 보낸 덕인 거 같다.


미안하게도 혜자에게는 답장을 보낸 적이 없다. 2000년 12월을 마지막으로 그 학원을 떠났고, 그 이후 그 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오늘 그 시절의 혜자, 아니 이슬이에게 'love letter'를 보낸다.


To. 나의 사랑스러운 이슬이에게

오랜 시간이 지났네.

너는 겨울을 녹이는 햇볕처럼 따스하고

밤하늘을 비추는 별처럼 빛나는 아이야.

좋아해 줘서 너무너무 고마웠고

지금처럼 밝고 빛나게 자라줘.

2023년 8월 5일

너를 ♡하는 영어 선생님


Tip 오늘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짧은 편지를 쓰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몇 배로 그 사랑을 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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