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기 전 나는 그 특유의 향기. 얼마 전 유튜브에서 비가 오기 전에 나는 향기에 대해서 말을 한 적이 있다. 작은 미생물과의 화학작용으로 기억이 난다. 정확한 원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만 들어도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 아니 좀 더 아린 듯 한 느낌의 향기가 생각이 난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여러 고민을 해봐도 왜 흔히 얘기하는 비냄새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 오는 날 헤어진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직 사랑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도 비가 오기 전에 나는 냄새를 맡으면 괜스레 슬픈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면 새로운 감정들이 찾아온다. 설레는 느낌 같기도 하고 긴장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향수 같다고 할까...
그런 향수가 유독 물에 많은 느낌이다. 비냄새뿐만 아니라 바다냄새, 수영장의 락스냄새,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간 목욕탕 냄새 등등...
어릴 때부터 유독 물과의 향수가 많다. 부산에서만 20년을 살았고 처음 내 손으로 찍은 사진이 광안대교가 없는 휑한 광안리 해변가였다. 그래서인지 바다 근처에서 나는 그 짭짤한 향이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육사를 목표로 체력검정 시험 준비를 위해 같이 광안리 바다를 끝에서 끝까지 쉬지 않고 뛰었던 그때, 불꽃축제를 보고 나서 밤새 친구들과 바닷가의 쓰레기를 치우던 그때, 겨울방학에 할 일 없어 가만히 파도가 부서지던 모습을 살 에는 바람에 1시간을 지켜보던 그때. 지금은 그 추억들을 같이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문자 속에서 안부를 묻고 있다. 바다에 가면 이런 향수가, 이런 향기가 자꾸만 날 과거로 보내준다.
어릴 땐 태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위험한 일인걸 알면서도 그 억센 비바람을 뚫고 커다란 파도가 치는 걸 꼭 구경하러 갔다. 하지만 겁쟁이인 탓에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길 건너 먼발치에서만 지켜보고 다시 집으로 걸어왔다. 그러고 나면 온몸이 비에 젖어 오들거리면서 씻으러 들어갔었다. 한 번은 어머님이 내가 그렇게 혼자 나가는 게 위험해 보였던지, 아니면 어머님 마음에도 부서지는 파도에 같이 날려버리고 싶은 근심이 있으셨던 건지,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나가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둘이서 투명한 비닐우산을 가지고 바닷가 근처로 나가봤다.
내리치는 빗 속에 우산은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100m 남짓 먼 거리에서는 평소 보여야 할 백사장이 온통 파도로 뒤덮여 온 모래를 다 쓸어버릴 듯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려고 해도, 그 속에 있는 마음에 못 이겨 파도에 몸을 맡기려 해도 덩치 큰 바람이 앞길을 막아섰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그럴 때가 아니다. 내 귓가의 바람은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 바람의 등쌀에 어머니와 나는 우산은 잃어버리고 거센 비바람 속을 큰 웃음으로 헤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바다와의 슬펐던 기억도, 기뻤던 기억도 이제는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얇은 슬라이드 필름지로 남아있다. 당장에 그때의 사진을 펼쳐볼 수 없지만, 바다에 가면 필름지 너머 남아있는 나의 작은 모습들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한 롤이 다 지나가면 새로운 필름지를 채워야겠지.
지금은 바다에서의 마지막 한 두장 필름이 남은 것 같다. 아직 내 필름에는 한 아이만 있으니, 다른 아이와의 필름도 남겨야 새로운 필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저 아이와 천방지축 새로운 환경에 신나 여기저기 뛰어다닌 또 다른 아이의 모습이 벌써 눈에 보인다.
바다의 향수가 바뀌어 간다.
점점 더 따뜻한 향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