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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 윤집궐중 Oct 03. 2021

0. 시작

눈발떼기_1


다윗과 골리앗    

 

지난 토요일 새벽, 오랜 시간 망설였던 일을 결행했다.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미루고 있었던 ‘브런치 작가 신청’을 ‘바로 지금’ 하기로 말이다. 그동안 끄적였던 글들이 모여 있는 폴더를 열어 본다.    

  

‘어떤 글을 연재하겠다고 해야 하지?’


또 여기다. 오늘도 이 과속방지턱에 덜컹 걸리고, 내 몸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한다. ‘바로 지금’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 자리에 ‘언젠가는’이 냉큼 다가선다.      


‘아니, 아니, 잠깐만. 브레이크 밟지 말고 몇 초만 참아봐. 그래, 천천히 파일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자, 일단 한 번 훑어보기라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언젠가는’에게 양보하자고. 응?’     


그날 새벽,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나는 드디어 한 편의 글을 골라 작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화요일 저녁, 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기뻤다. 처음 내 방이 생겼을 때처럼 무엇을 들여놓을까, 커튼은 어떤 무늬가 좋을까...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달고 싶은 커튼이 너무 많아 망설이는 동안 시간이 또 흐른다. 화요일 저녁,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희석되지 않는 기쁨에 두려움이 섞여 들기 시작한다.    

  

네 가지 커튼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없다면 창을 네 개 만드는 건 어떨까? 지금 발행 주제를 정하지 말자고, 일단 쓰고 싶은 글들을 쓰고 싶을 때마다 쓰다 보면 저절로 결정될 거라고 내가 속삭인다. 


‘그래, 이 정도는 양보해 줄게. 네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천천히 알아보렴.’


내가 대답했다.           




네 가지 이름     


눈발떼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나를 ‘눈발떼기’라고 부르셨다고 한다. 돌 무렵의 에피소드와 함께 전해 들은 이 별명의 의미는 ‘눈이 밝아서’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세상에, 이 나이가 되어 처음으로!) ‘송사리의 강원도 방언’이라고 나왔다. ‘송사리? 나랑 전혀 안 어울리는 이미지인데’라는 생각도 잠시, ‘송사리’의 특징을 검색해 보고 나서 바로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다.(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하게 쓰기로 하자.) 그래서 정해진 카테고리명, ‘눈발떼기’에는 내 마음을 스쳐 가는 감상이나 생각들을 낚아채 담기로 한다.    

 

童蒙교실

8살에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다)에 입학한 이래, 나는 내내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1월 1일이 아니라 3월 1일이 새해 첫날처럼 느껴지는 생체리듬을 갖게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명의 교사로 살면서 서서히 보게 된 것들이 있다. 교과의 아름다움, 인간 마음의 위태로움과 영롱함, 관계의 힘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학교에서 지내 온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학급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몽교실’에 담기로 한다. (재작년에는 ‘코끼리를 삼키는 동몽교실’이었고, 작년에는 ‘몰 뮤직이 흐르는 동몽교실’이었으며, 올해는 ‘로지와 함께 걷는 동몽교실’이다.)     


유희충동

학교에서는 초등학생을 만나고, 집에 오면 사춘기 아이들을 만난다. 엄마로, 교사로 산 덕분에 그림책이라는 세계를 만났다. 그림책을 읽어 주는 일은, 연년생 남매를 키우는 좌충우돌 육아 중에서 유일하게 쉬운 일이었다. 그림책 덕분에 눈물 나는 초보 엄마 시절을 명랑하게 통과할 수 있었고, 육아휴직 5년 공백을 눈 질끈 감고 건너뛰어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책 덕분이라고? 그렇다. 나는 아이들을 핑계 삼아 그림책을 양껏 사 모았고,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동시에 은밀하게 나를 만났다. 나에게로 날아가는 타임머신은 그림책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고, 함께 그림책을 함께 읽는 아이들의 말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충동이 나를 낯선 어딘가에 데려다 놓곤 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그림책 이야기는 ‘유희충동’에 담기로 한다.     


산수유

책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나에게 책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는 두 그루의 산수유나무가 있다. 한 그루는 어릴 적 우리 집 뒤꼍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6년 동안 다닌 중·고등학교의 정원에 있다. 우리 집 산수유나무는 어린아이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지점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던 탓에,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산수유나무 하면, 껍질이 자꾸자꾸 벗겨지던 갈색 줄기가 떠오른다. 산수유꽃이 유난히 화사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학교 정원 잔디밭에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해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노란 꽃에 매료되었다. 뒤이어 꽃이 사라진 자리마다 돋아난 연두가 여름을 통과하며 초록으로 가득 해지는 그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빨간 열매가 특별한 인상으로 마음에 각인된 것은 아마도 교과서에 실린 시 한 편을 배우고 나서였을 것이다. 산수유나무가 바로 내려다보이던 고2 교실, 그곳에서 산수유와 나는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사계절을 보냈다. 

내게 책은 산수유나무다.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할 때부터 함께 한,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산수유나무다.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이자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인 책, 그 책을 읽은 이야기는 ‘산수유’에 담기로 한다.      

 


   

약속하지 않은 약속    

 

매일 올릴 수 있을까? 자신 없다. 엄마로, 교사로 살아가는 내 삶이 함부로 약속해서는 안 된다고 말린다. 일주일에 한 번 올리겠노라 약속하는 건 어떨까? 그럴 수 없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서두는 내 마음이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아쉽다고 보챈다. 이 두 마음을 안고 어르는 동안 또 한 녀석이 다리를 잡고 기어오른다. 시간이 지나 이 열기가 사그라들면 1주일 간격도 너무 촉박하게 느껴질걸? 


학교와 집에서 매일 화해시키고 중재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력이 났을 법도 한데 여전히 갈팡질팡하다가 애매모호한 말로 마무리한다. 꾸준히 쓰겠노라고. 이것 하나 약속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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