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달살기에서 포기한 것, 포기할 수 없는 것

by 러닝뽀유

제주가 이토록 아름다운지 왜 이제껏 몰랐을까? 1년 중 제주가 가장 찬란하게 무르익는 계절 가을의 끝을 남편, 아이와 여행하고 있다.


대략 한달의 시간을 제주에서 보낼 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아이의 유치원 생활이고, 둘째는 우리의 서울 생활이다.


5세 때 다니던 어린이집이 인원 수 감소로 폐원이 되면서, 어떤 유치원에 보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 화려한 시설, 영어 몰입교육을 하는 곳까지 많은 선택지가 엄마의 손 앞에 놓여있다. 결국 '잘 노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넓은 운동장과 놀이터, 텃밭이 있으며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꾸며진 국공립 유치원을 선택했다.


새롭게 시작한 유치원 생활에서 아이는 많은 지식을 배우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이집에서 매일같이 가져오던 학습지는 1년 내내 한장도 받아온 적이 없었고, 그 흔한 알림장도 없었다. 6세가 되면 누가 먼저 떼는지 레이스 시합하듯 하는 한글, 영어 알파벳, 숫자 공부는 아이와 거리가 먼 듯 했다. 대신 아이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익혀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친구와 3초만에 어울리는 초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부모를 비롯한 어른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고, 매일 1시간씩 했던 바깥놀이 덕분인지 걸으면서 늘 주위 동식물을 유심히 보는 관찰력이 생겼다. 유치원 생활이 얼마나 재밌었던지 주말이 되면 유치원에 가지 못해 아쉬워했다.


우리는 아이와 장기간 여행을 한 적이 많았다. 3달동안 미국의 동부와 서부 구석구석을 자동차로 누볐고, 1달 반동안 유럽의 문명을, 1달동안 호주의 드넓은 자연을 탐험했다. 많은 기회비용이 들었기에 그간의 여행으로 아이가 행복했으리라 우리 부부는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엄마 아빠와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경치도 보고, 새로운 곳에서 잠자는 것이 어떨까 하고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당연히 엄청 신나고 들떠하리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그럼 '엄마, 그럼 유치원은 못가? 나는 유치원이 더 좋은데.' 하고 대답했다.


제주 한달살이를 하려면 아이는 유치원을 포기해야 한다. 익숙했던 친구, 선생님과 매일 만날 수 없고 규칙적인 일과를 통해 배우던 단체 생활의 규율과도 멀어진다. 6세부터 많이들 시작한다는 예체능도, 학습지도 할 수가 없다.


유치원을 포기해야 하는 아이와 같이, 우리 부부에게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 어차피 둘다 휴직 중이었기 때문에 일하러 가지 않는 것은 같았지만 아이가 유치원 가는 시간동안 소소하게 했었던 자기계발과 집에서 보내는 부부만의 조용한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활발한 6세 아이의 손을 잡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스마트폰, 노트북과도 멀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자정 전에 손만 까딱하면 도착하는 장바구니 배송도, 익숙한 음식들이 들어있는 냉장고도, 집에서 5분만 나가면되는 각종 생활 편의시설과도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나의 손과 발이 익숙한 자동차, 아이의 손때가 묻은 놀잇감, 추억을 담아줄 카메라와 노트북, 가족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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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가장 편하지만 일상에서 잊고 사는 것, 그것은 아마 집과 자동차이리라. 집을 들고 올 순 없어도 오랜 기간 렌트를 하면 비용과 불편함이 있기에 가져가기로 한 것은 자동차다. 비포장길과 굴곡이 많은 제주의 길에서 우리를 편안하게 쉬도록 해주는 suv 자동차는 렌트를 하려니 하루에 10만원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직접 가져가려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탁송료도 만만치 않았다. 고민하던 남편은 임신한 아내와 장난꾸러기 6세 남자 아이를 위해 자기가 희생하겠다며, 서울에서 차를 몰고 광주에서 하룻밤 묵고는 여수에서 차를 배에 실어 가지고 오는 셀프 탁송을 감행했다. 남편은 힘들었지만, 공항에서 5분 거리에 사는 나와 아들은 덕분에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만에 제주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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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하루 전날 밤, 손가방 하나를 건네주며 아이에게 1달동안 가지고 놀고 싶은 놀잇감들을 넣어보라고 했다. 짐 꾸릴 때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 저것 넣을까 뺄까를 고민하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아빠를 닮았는지 5분 안에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가방에 담아냈다. 아이의 놀잇감 가방은 로봇, 자동차, 팽이가 가득했고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목걸이나 손으로 접은 딱지까지 들어있어, 어딜 가든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작은 보물 상자로 변신했다. 긴 시간동안의 교육 공백이 가장 걱정인 것은 엄마의 입장이었는지 아이를 책꽂이로 데려가 여행 기간동안 읽을 책들을 뽑아오게 하고, 스케치북과 색연필도 담았다.


아이의 놀잇감과 같은 존재는 우리 부부에게는 전자기기이다. 먼 곳을 떠날 때 항상 가져가는 삼각대, DSLR 카메라, 노트북, 태블릿까지 잊지 않고 가방에 담았다. 결국 시간 지나면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옛말은 여행을 해보니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간 많은 여행을 했으나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몸을 맡기고, 다음날이 되면 하얗게 사라지는 주옥같았던 기억들을 이번에는 꼭 놓치지 않고 기록하리라 다짐해본다. 그리고 번개처럼 뛰어다니는 남자 아이를 안정감 있게 찍어보려고 짐벌도 급히 주문해 가방에 담았다.


모든 짐들을 꾸릴 생각을 하니 피로가 몰려와 시작도 전에 그냥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유치원을 보내고 우리는 여유있는 서울 데이트나 할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정말 모든 계획을 황급히 취소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만약 여수에서 제주로 가는 배만 예약해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렇게 캐리어 3개에 작은 가방, 아이의 놀잇감 보물상자까지 싣고 남편은 우리보다 하루 전날 차를 타고 떠났다. 다음날 저녁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남은 짐을 싸는 동안 아이는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러 유치원에 갔다. 오후 간식도 먹지 않고 엄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는 아이, 유치원이 좋다고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여행이 기다려지는 것은 아이도 마찬가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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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짐의 무게는 잊고 여행의 설렘만이 우리를 감쌌다. 아이는 평소에 잘 허락하지 않던 과자 한봉지를 손에 쥐고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했으며,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아이 손 잡고 뛰어오느라 긴장했던 나는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와 아이가 비행기에 탄 순간, 남편은 제주로 가는 배에서 GPS 사진을 보여준다. 바다 한가운데에 빨간 점이 찍혀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점처럼 작게 멀어져가는 서울 집을 보며 아이와 손을 흔들었다. 2박 3일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제주 여행이 이번에는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아마 여행이 아닌 머뭄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으리라. 무거운 가방은 차에 싣고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 3명은 제주의 어딘가를 헤매일 것이다. 서로의 바쁜 일상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엄마, 아빠, 아이가 만나 잊혀지지 않을 인생의 추억을 한가득 마음에 담아온다면 그것은 제주 여행으로 인해 포기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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