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전엔 몰랐던 여행의 조건
안전하다는 확신 - 제주 한달살이의 추억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가는 하루의 삶이 모여 1년이 되고, 어쩌면 삶이 된다. 그 속에 크고 작은 고민을 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닐까?
인생 그래프 만들기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선으로 이어 그래프로 그려보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수많은 오르내림이 있겠지만, 길게 보면 가장 가치있는 순간들은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유한 시간일 것이다.
열심히 학업에 몰입했던 10대와 20대를 지났고, 스스로 갈망하던 사회적 성취를 이루면서 30대 초반을 보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했고 "내 새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라는 말이 절절이 깨달아지는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아내와 엄마로서 만 5년을 보냈다.
상위 1퍼센트 역마를 지닌 남편의 손에 이끌려 아이와 함께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다.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은 남편과 내가 아이와 함께 웃고, 함께 길을 거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코로나는 잠시 우리의 여행을 멈추게 했고 나름의 행복을 집에서 찾아갔다. 그렇게 코로나로 여행은 그저 과거의 트로피가 된 듯 우리 기억 저 멀리 아스라이 묻히는 듯 했다.
하지만 주말 아침 우연히 틀어본 텔레비전에서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볼 때면 마치 지금 내가 그 곳에 가 있는 듯 설레였고, 묻어두었던 여행의 발자취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서점에 갈 때면 이제는 구석에 잠든 여행 코너를 찾아 기웃거렸으며 여행 에세이를 보며 울렁이는 마음 가득했지만, 확진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아직은 때가 아니지. 나 좋자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여행을 해서는 안되지" 하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자체가 죄책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참동안 월급쟁이의 삶을 멈추고 있었던 우리 부부에게 여행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은 시간도 돈도 아니었다. 여행에 있어 시간과 돈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이유인 듯 하지만, 사실 없으면 없는대로 떠나면 그저 그 뿐이다.
그동안 몰랐었던 여행의 필수 조건을 코로나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확신'이었다.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곳곳이 봉쇄 조치럴 내걸었고, 일부 국가가 굳게 닫았던 문을 열기는 했으나 아직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뉴스를 기다렸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 여행이 허락되는 시기가 머지 않아 오기를 바랬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1단계로 바뀌면서 정부에서도 방역 수칙을 지키는 내에서의 여행을 장려하고 소비를 촉진하면서 그간 침체되었던 여행업을 살리고자 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마침내 우리는 제주로 떠나보기로 했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오늘도 내일도 특별한 계획이 없는 우리가 왜 서울에만 살아야 할까",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살아보는 것인데 이왕 가는 것 한달 정도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해 결국 '제주에서 살아보기'로 마침표를 찍었다.
전국에 수 많은 관광지가 있고 그 중 제주를 선택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안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곳이다: 제주도는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아 코로나 전파 위험에서 비교적 안전하며, 국내의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2.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가 풍부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관광에 특화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며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충분한 관광지들이 확보되어 있다. 우리 부부는 자연을 좋아하고, 아이도 자연에서 뛰어놀 때면 시간가는 줄 몰랐기에 '따로 또 같이' 힐링할 수 있는 여행지인 것이다. 제주의 오름을 오르면서 체력을 키우고, 곶자왈 숲에서 피톤치드향을 맡으며 생태 체험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3. 도서관이 많다: 이제 6세가 되어 교육에 대한 부담이 조금씩 다가오는 부모로서 제주는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지역 주민에게만 개방되는 대부분의 타지역 도서관과는 달리, 관광 친화적인 섬이기 때문인지 제주의 도서관은 폭넓은 개방성을 자랑한다. 신분증과 휴대전화만 있으면 도서관 카드를 만들 수 있고, 공공도서관 어디에서든 반납이 자유롭다. 또 스마트도서관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어 길가다 문득 책이 생각날 때면 언제든 들러 도서를 대출하고 반납할 수 있다.
4. 먹거리가 다양하다: 풍요로운 바다가 주는 먹거리로 가득한 식당, 제주만의 감성을 살린 돌담집에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카페가 아른거렸다. 생선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도, 카페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도 최적의 공간이 되어줄 것만 같았다. 특히 해외여행에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건 어른인 우리가 아닌 바로 5살난 아이여서 늘 쌀밥과 반찬을 찾느라 분주했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한식이 지천에 있는 제주도는 가장 중요한 식사에서 5점 만점을 받는 곳이다.
5. 숙소가 충분하다: '한달살기' 키워드로 검색하다보면 가장 많은 숙소가 확보된 곳이 제주도임을 알 수 있다. 사실 가족 단위로 장기적으로 머물기에는 거실과 방이 딸린 집이 제격이다. 값비싼 호텔보다 고급스럽지는 않더라도 원할 때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어 가족을 위한 든든한 한끼를 요리할 수 있고 장기간 같이 붙어있어도 각자의 공간을 확보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리조트와 펜션, 오피스텔이 제주에는 충분하다. 또 장기 숙박을 할수록 할인율이 더 커지는 숙소가 많았기에 선택의 폭이 다양하다.
6. 날씨가 온화하다: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의 특성에 맞게 언제나 바람은 많이 불지만, 일교차가 크지 않고 계절에 따른 날씨의 편차도 육지보다 크지 않아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 적합하다. 특히 우리가 여행한 11월 서울의 기온은 제법 쌀쌀하지만, 제주에서는 가벼운 외투만 걸치면 무리가 없을 수준이다. 그리고 코로나 여파로 인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미세먼지로 인한 스트레스도 접어둘 수 있다.
한번 결정하면 자기합리화를 잘하는 부부는 '제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한달살기 여행지다' 라고 되뇌이며 하며 짐을 꾸렸다. 벼락치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버리지 못해 언제나 그렇듯 짐도 최후의 순간에 짧게 꾸린다. 장기 여행이라 해서 짐도 오래싸지 않았다. 하루 반나절 필요한 것을 후두둑 챙겨 차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