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는 잠시 쉬어가도 좋다
서울엔 없으나 제주에는 있는 것
서울에 살던 시절, 코로나로 인해 남편의 휴직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임신 중 복직이 우려스러워 나도 결국은 휴직 카드를 꺼냈다. 그래서 부부의 일상은 마냥 한가로울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걸 하더라도 같이 있는 것이 습관이 된터라 일상의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소화하다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당시 6살이었던 아들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달을 집에 머물다가 코로나 사정이 조금 나아질 때 유치원을 가기 시작했다.
첫째를 낳고나서 휴직과 복직을 반복한 나는 휴직 생활이 익숙했지만, 평생 한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는 남편은 '출근 없는 삶'을 매우 신기해했다. 업무 시간인 평일에 한산해진 거리를 여유있게 걸을 수 있으며,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방인 브런치 카페를 아내와 갈 수 있으며, 은행과 각종 공공기관까지 대기 시간없이 편하게 갈 수 있는 터였다.
남편이 또 신기하게 여긴 것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은근히 빨리 흘러간다는 것이다. 출근을 하지 않는 삶은 노는 삶이고 가정주부가 최고의 직업이라 생각했던 때론 야속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휴직을 하고 나서는 집안일과 육아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딱 맞다는 나의 말에 비로소 공감하게 되었다.
타의로 인한 출근이 없어지기에 자의로 집과 한 몸이 되는 날에는 유치원 등하원이 하루 외출의 전부가 되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내 집이 최고다' 라는 말이 뼛 속 깊이 깨달아지면서 코로나와 미세먼지의 방어막이며 장바구니 배달로 내 집은 지구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되었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우리 부부에게 거주지로서 서울은 어떤 의미인가? 어린 시절 큰 아버지댁이 있는 서울은 그저 동경의 도시였고, 사촌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무거운 짐을 들고 강남 한복판을 헤매일 때면 눈 감으면 코 베어갈까 정신을 다잡곤 했었다. 또 얽히고 섥힌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시계를 보며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샐러리맨들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들으면 "나도 저 무리 중 일부가 되어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싶다" 라는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는 결혼을 했고 남편과 일을 찾아 서울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바지런히 서울의 여기 저기를 찾아 남편과 데이트했지만, 길어지는 휴직으로 코로나로 바깥 외출은 점점 줄어들었고, "우리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서울에 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매서운 코로나의 기운이 사그라지던 어느 날에 스물스물 솟아나는 역마의 정신은 '제주 여행'을 검색하게 했고, 어차피 공식적으로 우리를 찾는 이들도 없으니 서울이 아닌 제주에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우리는 지금 제주에 있다.
제주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이 바로 집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면에서 제주의 집은 서울의 집보다 편안했다. 제주의 낮은 서울의 낮보다 우리에게 한가로이 걷는 여유를 주었다. 동네 마을을 산책했으며 가까운 숲을 찾아 하루 만보가 넘게 그렇게 천천히 걸었다. 11월이었지만 낮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추었고, 제주의 바람은 육지로부터 온 미세먼지를 씻어주었다. 햇볕을 받으며 푸르른 나무 향기를 맡으며 사랑하는 가족과 많이 웃고 많이 걸었다. 그래서인지 제주의 밤은 서울의 밤보다 깊은 잠을 불러왔다.
가득 채워진 냉장고가 없다는 사실은 엄마로서 주부로서 이따금씩 불편했다. 내 가족에게 직접 봐온 먹거리를 배불리 먹이는 것이 주부의 행복이 아닌가. 하지만 완전한 주방과 세탁기가 갖춰진 집에서 몇 일을 보내보니 알게 되었다. 없는 것 없는 집에서 주부는 오히려 더 바쁘다는 사실을. 요리와 청소를 하느라 나는 주방을 벗어나지 못했고 심심해진 아이는 태블릿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방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식당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제주에는 가격이 착한 백반집이 많아서 인당 7천원이면 따뜻한 밥과 생선에 고기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는 시간을 아낀 덕분에 나는 가족과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루 3~4시간의 집안일 하는 시간을 아껴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 않더라도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상의 일들을 제주에서는 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갈 수 있기에 하루 하루 빡빡한 스케쥴을 짜지도 않았으며 숨가쁘게 이동하지도 않았다. 순간 가고 싶은 곳에 찾아갔고 순간 하고 싶은 일에 집중했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는 곳, 제주였기에 우리는 뒹굴뒹굴 그저 천천히 가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그래. 제주에서는 잠시 쉬어가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