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갈망의 대상이 되어본 적. 제주 보름살다

by 러닝뽀유

한달살기의 매력에 빠져 제주여행 시즌 2. 보름살이를 감행했다. 제주도 보름 여행을 마치고

제주에서 보낸 마지막 밤에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여행은 주로 편의시설이 편리한 호텔에서 보냈는데 세 식구에서 네 식구가 되니

여행 패턴에 큰 차이가 생겼다. 호텔이 아닌 리조트가 내 집처럼 편안해 리조트에서 자주 머물렀다.


호텔 침구의 바스락거림 사소함도 배려가 묻어나는 직원들의 친절 서비스도, 숙면을 약속하는 암막 커튼과도 작별을 고했다. 대신 넓은 방과 거실 주방이 있는 리조트의 집과 같은 푸근함을 맞이하게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불안감에 적극 사교육 공세를 펼친다는 7세 말 8세 초 1월에 굳이 제주도에 차까지 싣고 가야 하는 2주간의 제주살이를 선택한 이유는 함께 있는 순간의 소중함을 만끽하기 위해서이다.


늦은 시간 어지러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부지런히 놀았으며 제주도를 바지런히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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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학교라는 진짜 제도적 교육기관에 아이를 보내면서 엄마 성적표를 받게 될터이니 마지막 체크리스트를 확인해야 할 법도 했다. 대신 나름의 불안감이 찾아오면 도서관과 놀이터를 찾아 더 읽고 더 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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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는 가성비의 발휘가 필요하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매번 여행에 특별함의 꼬리표가 붙고 한도 끝도 없는 소비가 이어질테기 때문이다.


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좋은 호텔 대신 저렴한 리조트에서 잠을 잤다. 대신 맛있는 요리가 있는 식당을 찾아 미식 탐방을 했고 부부가 아이와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안아주었다. 육지로 돌아가면 엄마는 주방에서 아빠는 서재방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될 것이고 아이들은 일을 하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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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 날 오래간만에 큰 마음 먹고 5성급 호텔 숙박을 예약했고 우리를 위해 차려진 식탁을 룸서비스로 호사스럽게 맛보았다. 혹여나 아이들이 의도치 않은 민폐를 부려 식당을 노키즈존으로 만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고 제주의 석양을 즐기며 간만에 느긋한 식사를 했다.


오래간만에 생긴 수영장에서 큰 아들과 아빠는 마스크를 내내 끼면서도 행복한 둘만의 데이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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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나는 둘째와의 고요한 밤을 보냈다.


그러던 중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며 왈가닥 엄마의 적성을 유감없이 표출하게 되었다.


사건 하나.


아들이 먹고 싶어해서 주문한 메뉴라 수영하고나서 먹이려고 아껴둔 스파게티 그릇을 호텔 방문 앞에 내놓고 빈 밥알 하나없이 싹싹 긁어먹은 볶음밥 그릇을 방 테이블에 남겨두는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허기질 때 먹이려던 토마토 스파게티는 뚜껑이 덮혀져있어 손도 대지 않은 채 회수를 기다리며 문 앞에 놓여진 것이다. 돌아오면 먹여야지 하며 기분 좋게 열었던 그릇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건 둘.


당황한 채로 빈 접시를 객실 문 앞에 놓아두다가 깜빡하고 돌쟁이 혼자 있는 객실 문이 철커덩 닫히고 말았다.


맨발에 열쇠도 휴대폰도 없던 나는 굳게 잠긴 문 앞에서 엄마가 사라진 사실을 머지않아 알게 될 돌쟁이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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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0.5초만에 결심을 하고 29층 끝방에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맨발로 달렸다.


맨발로 다녀도 하나도 쑥쓰럽지 않았고 엄마가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처량한 돌쟁이가 방을 헤매다 다치지나 않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하필 이 순간에 왜 이리 늦게 도착하는 것인지

한겨울에도 진땀이 났다.


다행히 객실 키를 다시 받을 수 있었고 나는 복도 끝으로 내달리면서 아이의 소스라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는 순간 아이는 재해 현장에서 소방관을 만난 사람처럼 '나 여기 있어요!' 외치듯 꺼이꺼이 울었다.눈물 콧물 한달치를 5분 안에 다 쏟아낸 모습이었다.


모유 수유 더 길게 하겠다고 항생제도 안먹고 버텼던 것이 고마운 찰나, 아이는 나를 본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젖을 빤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호흡을 가다듬고 미소를 지었다.


몇 시간 뒤엔 샤워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닫은 샤워실 문에 손가락이 끼여 남편과 아이를 부여잡고 겨우 손을 빼내는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을 끝내고 긴장 풀며 순식간에 잠든 갓 돌아기, 엄마아빠 눈치 살피느라 책 읽다 잠든 갓 8살 아들이코를 기리며 잠들었다. 아기 혼자 있는 방 문이 잠겨버리고, 샤워실 문에 아기 손이 끼었을 때 찰나의 고뇌를 느꼈다. 정상 상황으로 돌아온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니 너무 긴장이 풀렸는지 제주여행 마지막 밤은 오한과 요통에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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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숨이 멎도록 찾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이, 정상으로 가뿐히 내려앉을 수 있음이 감사한 밤이었다.


육아,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큰 존재라는 깨달음을 순간 순간 선사하기에 더 아름다운, 오직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느끼며 육아에서 지친 에너지를 급속충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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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배터리가 천천히 떨어지기를 바래보며 매일 나는 행복한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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