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첫 번째 갈등 source?: 남편
결혼은 사랑의 연장이 아니다. 결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 사고방식, 가치관이 매일같이 내 삶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일이었다.
나는 뒤늦게 알았다.
결혼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계속 살 수 없게 되는 구조"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원래 버전의 나로 살려고 할 때면, 상대방이 힘들어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수 있구나를 처음 느끼면서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나의 가장 큰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남편과의 불화였지만, 내적으로는 나 자신과의 불화에 가깝다. 남편은 그 갈등을 촉발한 가장 분명한 타자일 뿐이다. 남편을 통해 나는 다시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자기 객관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연애할 때는 서로의 다름이 개성이었고 끌림이었다.
각자 자기 삶을 살면서, 겹치는 시간만 사랑으로 포장하면 됐다. 하지만 결혼은 달랐다.
결혼은 “그래도 되는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을 매일 재정의하는 일이었다.
내가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가 상대에게는 사치가 되고, 상대가 당연하게 여겨온 기준이 나에게는 억압이 되는 과정이었다.
결혼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나 혼자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됐다.
내 선택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망치고,
내 무관심이 누군가의 분노가 되며,
내가 미뤄둔 일이 누군가에게는 쌓이고 쌓인 절망이 되는 삶. 그게 결혼이었다.
우리는 늘 누가 틀렸는지 보다는, 누구 말이 더 합리적인가의 문제로 싸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합리적인 쪽은 나보다 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느냐”를 묻고 있었고,
그는 “이건 누군가는, 그리고 상대방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변형되기 시작했다.
조금씩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은 뒤로 밀리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기본’이라는 이름으로 내 삶의 전면에 배치됐다.
나는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선택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관계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혼은 삶의 재구성이었다.
기존의 나를 조금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의 작동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사람에게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들이 끝없이 주어지는 구조.
그래서 나는 결혼이 사랑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는 문장은 낭만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나 잘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은 사랑 이후에 시작되는,
전혀 다른 성질의 삶이었다.
사랑이 감정이라면, 결혼은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 시스템 안에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그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나는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갈등을 치렀다.
예전의 나로 살 수 없다고 해도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거지 나 자신의 살아온 관성으로 인해 쉽게 변화하기 어렵다.
남편은 매우 성실하다. 주말에도 출근하고, 경제적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려 하며,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는 ‘좋은 가장’의 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한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 곧 나의 역할을 규정해 버린다는 데 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내가 밖을 책임지니, 당신은 안을 책임져라.” 그 안에는 효율과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그 합리성은 나의 욕망과 성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남편이 말하는 ‘기본적인 집안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정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상징한다. 음식, 밥상, 김치, 반찬. 이것들은 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행위가 아니라 돌봄과 헌신, 지속성의 은유다. 남편에게 그것은 가정의 뿌리이며,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값이다. 나도 스스로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하고 이해하지만 이 "기본값"의 기준이 남편과 달랐다. 나는 그 기본값에 대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남편은 그런 내게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하다"며 쓴소리를 해댔다.
나는 하고 싶은 일에는 과도할 정도로 몰입하지만, 원치 않는 일에는 거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이 극단성은 오랜 시간 나를 설명해 온 방식이었고, 동시에 내가 살아남은 방식이기도 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나는 외재적 동기보다 내재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일에는 동기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반면 남편은 책임과 역할이라는 외적 규범에 강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는 ‘해야 하는 일’을 잘 수행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왔고 상대방도 자기가 생각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줬을 때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두 유형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만났을 때,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서로를 교정하려 든다는 점이다. 남편은 나를 미성숙하다고 느끼고, 나는 그를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철학적으로 이 갈등은 자유와 책임의 오래된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자유를 중시해 왔고, 남편은 책임을 우선해 왔다. 자유는 선택의 기쁨을 주지만, 관계 안에서는 종종 방임으로 오해받는다. 책임은 안정과 신뢰를 주지만, 개인에게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혼은 이 두 가치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균열이 생긴다. 나는 자유를 잃는 것이 두렵고, 남편은 책임이 나눠지지 않는 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단순한 원망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가치를 안다. 인정받지 못한 아까운 재능, 묵묵히 버텨온 시간들, 그리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욕망.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일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 지지가 나에게 어느 정도의 불편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남편과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나는 극적으로 변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도망치던 태도에서 최소한 마주하려는 태도로는 옮겨왔다.
하기 싫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해도,
전혀 하지 않던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이전의 나는 “난 원래 그래”라는 말 뒤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래도 해보겠다”는 말은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변화가 작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남편이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변화가
내 삶의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하기 싫은 일을 반복한다는 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방식의 수정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나답고 싶다.
여전히 배우고 싶고, 쓰고 싶고, 일하고 싶다.
그 욕망을 완전히 접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관계 안에서 감당해야 할 몫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가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고맙다.
나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나를 그대로 두지 않아서.
편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버거운 방향으로라도 함께 가자고 끌어당겨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인정해주고 싶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도망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른다.
오르막길이 끝날지,
아니면 더 가팔라질지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나는 안다.
이 길 위에서
나 혼자만의 삶은 이제 끝났음을 수용하고,
그 대신 함께 견디는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은 나 혼자만의 삶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여전히,
나는 오늘도 이 관계 안에 남아 있다.
나는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살 수 없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아온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동시에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한 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이 두 지점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아마도 나의 다음 과제일 것이다.
오르막길은 힘들지만, 적어도 내가 걷고 있고 앞으로 나아가고 사실만은 분명하다. 최선을 다했다면, 언젠가 이 길 위에서 후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