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철학, 의학, 법학을 그려달라 부탁해온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철학, 의학, 법학을 대표하는 니체, 히포크라테스, 정의의 여신 같은 대표적 단어가 생각이 먼저 나고, 이 어려운 학문들이 왕성하게 사람들 사이에 논의되는 그 시대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지고, 왠지 그리스 전통 복장을 입은 학자들이 주제를 논하는 그런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다. 어렵고 위대하고 숭고한 학문은 그렇게 그리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추상적으로, 한참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매료될 것 같은 혼을 빼는 듯한 느낌으로 이 학문을 그리기도 했다. 클림트가 그랬다.
레오폴드 미술관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클림트의 <의학>, <법학>, <철학>은 진품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퇴각하던 독일군이 작품이 보관되어 있는 성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진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압도되는 느낌은 다른 작품들을 볼 때와 똑 같았다.
클림트는 이 그림 3부작을 오스트리아 문화교육부로부터 1894년에 주문을 받았다. 그림이 그려지는 곳은 빈 국립대학 본부 건물의 천장화. 훌륭한 학생을 양성하는 교육의 산실인 학교의 천장화가 어떻게 그려질 것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했을까? 그가 그린 그림은 예상과 맞지 않았다. 벌거벗은 사람들, 운명에 굴복한 사람들, 학문으로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의 운명, 에로틱한 나체였다.
<의학>
의학은 병과 죽음에서 인간을 구제하는, 절대 인간을 그들 앞에 무릎 꿇리지 않을 신과 같은 학문이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죽음은 나약해졌다. 그렇지만 클림트의 의학은 조금 다르다. 가운데 있는 의학의 여식 히기에이아의 뒤로 벌거벗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데 엉겨 있다. 해골이 함께 있어 아마도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는 모습인 것 같다. 히기에이아는 뒤를 보지 않는다. 의학은 죽음의 굴레와 떨어져 있고, 방관하는 듯하다. “내가 의학 여신이긴 한데, 당신들의 보는 뒷 광경은 어쩔 수 없어요~” 하는 모습이랄까? 이런데도 의학이 숭고한 학문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학문의 권위와 숭고함은 없이 한계를 드러내는 듯한 학문, 미래의 의사들이 보고 다닐만한 그림은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해석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의학은 분명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인간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만일 당시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볼 때 무력감이 들 것인가, 사명감이 들 것인가로 투표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철학>
철학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매혹적이고 빠져들게 하는 마성의 그림으로 생각된다. 아니, 누가 이렇게나 철학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식백과에서 철학은 인생, 세계 등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 한다. 인생과 세계가 모두 담겨있는 딱 맞는 그림인 게 분명하다. 고뇌하고 번뇌하는 사람, 서로를 위로하는 연인(혹은 사랑), 사람의 삶은 개인의 인생과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끝없는 고뇌가 아닐까?
찰떡처럼 달라붙는, 철학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신비롭고 고귀하게 나타낸 그림을 아니라고 하다니, 나도 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추상적이 느낌이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벌거벗고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을까? 외설적인가? 그림 앞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법학>
법학은 3부작 중 가장 직관적인 것 같았다. 손을 뒤로 하고 고개 숙인 남자가 죄인으로 보인다. 그래서 죄인이 정당하게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나, 정의의 여신은 그림 상단 위에 작게 있고 남자를 둘러싼 여인들이 죄인을 다룬다. 이를 보면 법이 그를 심판하는 것이 아닐 것도 같다. 법 위에 군림하는 어떤 부조리함. 그러면 이 남자는 죄인이 아닐 것이다. 법이 보호하지 않는 약자일 것이다.
3부작은 이렇게 학문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 학문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렇기에 교육의 산실인 대학에서 환영받기 어려웠을 것 같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외설적이어서가 아니다.
결국엔 어떻게 되었는지?
결국엔 천장화는 그릴 수 없었다. 클림트는 이 일을 계기로 많은 비판을 당했고,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더는 공공기관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했단다. 지금 이런 그림을 대학 천장화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세상인만큼 무리 없이 완성될 수 있을까? 아마 자신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면, 이런 그림은 앞으로도 그려질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