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 (2019)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화면 가득한 따뜻한 느낌의 영상미, 주연 배우의 노래와 먹먹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배우들의 미세한 눈물 맺힘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 큰 다툼에서 느껴지는 절망과 후회의 호흡소리를 작은 노트북 화면이 아닌 큰 스크린으로 접했다면 그 감동과 느낌이 더 크게 스며들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재개봉을 호시탐탐 기다렸던 영화, 결혼 이야기입니다.
N차 관람으로 추천했던 두 교황과 더불어, 결혼 이야기 역시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본 영화입니다. 개봉한 지 1년이 지났지만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파경을 맞았지만 관계를 이어나가는 가족,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였었지만 그것이 과거일 뿐인 부부의 모습은 관계와 가족에 대한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장점을 읊어나가는 찰리와 니콜, 아쉽게도 이혼 조정관 앞에서 읽어 내려가는 글입니다. 이혼을 앞둔 두 사람에게 상대를 향한 찬사는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성공한 극단 연출가로 일하는 찰리와 그와 함께 극단의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니콜. 균열은 니콜이 새로운 TV 드라마 출연 제의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어린 시절 잘 나가는 헐리웃 배우였던 니콜은 찰리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꿈은 접어둔 채 극단 연출가인 찰리를 서포트하며 배우로 살게 되죠. 자신에게 온 새로운 기회를 위해 LA로 떠나고 싶은 니콜과 그녀가 꿈을 지지하지 않고 뉴욕에서 살길 원하는 찰리. 결국 니콜이 아들 헨리를 데리고 LA로 떠나고, 그렇게 결혼 이야기의 마지막인 이혼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서로 간의 합의 이혼을 원했으나 둘 사이에 이혼 전문 변호사가 개입되면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됩니다. 변호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상대를 향한 생각과 진실은 날이 선 단어들로 중무장하여 서로를 무너트립니다. 소송의 과정에선 날 선 감정을 마주했지만, 일상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애틋함과 사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니콜의 집에 전기가 나갔을 때 바로 달려와서 고쳐주는 찰리, 그런 찰리의 머리를 직접 다듬어주는 니콜, 애증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혼 소송은 쉽게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원만한 이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찰리의 집에서 따로 만난 둘은 서로를 향한 억눌렀던 감정들을 표출하면서 크게 다투게 됩니다. 결국, 처참한 이혼 소송은 그들의 아들 헨리의 양육권이 니콜에게 넘어가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혼 후 아들 헨리와 핼러윈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찰리는 우연히 이혼 전 니콜이 이혼 조정관 앞에서 읽었어야 할 자신을 향한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내려가며 눈물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막이 내린 결혼이지만 그 둘은 아들 헨리로 인하여 특별한 날에는 얼굴을 마주하고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이로 남게 되죠.
결혼 이야기는 <프란시스 하>, <위아 영>을 연출한 노아 바움백 감독의 연출작입니다. 실제 이혼 경험이 있는 그가 쓴 각본이기에 더 현실감 있고 퀄리티 있는 작품으로 연출된 것 같습니다. 개봉 후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를 달성했고, 유수 영화제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잘 아는 영화제로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의 총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죠. 봉준호 감독님의 <기생충>이 아니었다면 수상에서 좀 더 주목받을 수 있었을 것도 같아요. (기생충은 정말 대단했죠! 같이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 어나더레벨이 되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안타까운 느낌이 있습니다 ㅎ) 감각적인 연출과 현실 기반의 각본이 완성도를 높였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 감독님도 극찬한 영화라고 합니다. 후후)
연기 백단들이 모여 작품 퀄리티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블랙 위도우”로 친숙한 스칼렛 요한슨.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력이 어마 무시합니다. 같은 해 개봉했던 영화 조조 래빗에서도 유대인을 돕는 어머니의 역할로 분해 찬사를 받았었는데요. 실제 배우자와 헤어진 경험이 있는 그녀이기에 각 장면의 찰나와 디테일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니콜이 가졌을 고민을 실제로 했었을 그녀이니까요. 이 영화의 또 한 명의 주역이라 한다면 니콜의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 팬쇼 역의 로라 던이 있습니다. 제26회 미국 배우 조합상, 제54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제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2020년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죠. 소송을 이겨야 하는 변호사, 니콜의 조력자,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모습을 너무나 잘 그려냈죠.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혼이 쏙 빠지는 느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사람을 찾아가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죠. 어디선가 낯익은 그녀의 얼굴은 쥐라기 공원의 엘리 박사 역을 맡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실제 이혼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놀랍게도 로라 던과 스칼렛 요한슨의 이혼 변호사가 같은 사람이고, 이 인물이 극 중 노라 팬쇼의 모델이었다고 하죠.
또 마지막으로는 스타워즈 시리즈로 익숙한 아담 드라이버가 있습니다. 아담 드라이버는 우리 실생활에서 마주칠 법한 마스크를 가진 배우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기가 더 친숙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앞서 말씀드린 <프란시스 하>, <위아 영>에 모두 출연하였습니다. 아담 드라이버의 또 다른 출연작으로는 2016년 개봉한 <패터슨>이란 영화도 추천드립니다. 연기력은 말해 뭐해 입니다. :-)
오프닝 장면을 보면서 결혼을 한다면 저 부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근사하고 이상적이었습니다. 결혼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어도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생활패턴, 취향,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배려와 양보, 관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을 대하듯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러니죠. 두 사람은 이런 면에서 완벽한 커플입니다.
그러나 둘에게도 무언가 부족한 점이 관계에 균열을 가게 했습니다. 바로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LA로 돌아가 살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찰리와 그런 적이 없다는 찰리. 니콜의 TV 드라마 제의에 기쁨 대신 시큰둥과 시샘을 드러냈을 찰리와 그 상황에서 마음을 닫았을 니콜. 찰리를 위한 헌신에 자신을 잃어버린 니콜과 그런 니콜의 마음을 몰랐던 찰리. 방법은 간단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었죠. 나의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솔직하게 전달했을 때, 상대방이 매몰찬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입니다. 인지상정이니까요. 찰리의 삶에 조연으로 사는 듯한 니콜이 그녀의 박탈감과 열등감을 그에게 솔직하게 전달했다면 어땠을지, TV 드라마 제의에 시큰둥했던 찰리의 속마음을 니콜이 한번 더 물어봐주면 어땠을지요. 속마음을 말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 자체가 어색하고, 자칫하면 다툼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모든 일의 해결은 “소통”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소통, 마음을 이야기하는 과정으로 완성되어가는 삶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혼 준비는 진솔한 마음을 터놓을 준비가 되었을 때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둘은 결국 이런 소통이 없었기에 힘든 이혼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그 소통은 엉뚱하게도 후반부에 가서 다툼으로 표출됩니다. 쌓였던 소통은 분노의 감정으로 폭발하죠.
니콜과 찰리가 다투는 이 장면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력이란 것이 터져버렸다”입니다.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정점인 만큼 감독이 공을 들인 장면이라고 합니다. 또,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배우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도 되죠. 이 장면은 약 이틀간 롱테이크로 촬영할 만큼 공을 들인 장면입니다. 게다가 두 배우가 서로의 대사와 리액션에 대한 디테일을 잘 모르는 채 촬영한 장면이라고 하죠. 그래서인지 분노의 대사가 오갈 때마다 둘의 표정이 정말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실감 나게 느껴집니다. 정말 놀라는, 정말 상실감을 느낀듯한 표정이죠. 사전에 설계되지 않은 연출이 신의 한수였으며 배우의 연기력이 가미되어 멋진 장면이 탄생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독하게 서로를 향해 퍼붓지만 사실 그건 진심은 아니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었냐는 투정에 가까웠다고 느껴집니다. 누가 더 심한 말로 상처 낼 수 있는지 내기를 하는 듯하면서 나를 알아달라는 절규에 가깝죠. 날 선 비난의 끝은 서로를 향한 사과로 마무리되고, 아직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미국의 이혼은 한국 사람인 저에게는 좀 독특해 보입니다. 성장하면서 TV, 드라마에서 접한 이혼은 말 그대로 파국, 생판 남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두 번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자녀들이 있는 경우라면 한쪽 부모의 보살핌 아래 다른 부모의 존재는 잊어버린 채 살아가곤 했습니다. (넌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따라갈 거야? 란 대사가 시그니쳐처럼 등장했죠.) 찰리와 니콜도 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직 남아있기에 이혼의 과정과 그 후가 따뜻하게 그려지는 것이긴 할 테지만, 제가 독특하게 느낀 부분은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둘이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입니다. 대면 대면한 사이지만 밤에 자기 전에 인사를 꼭 해주거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점심 메뉴를 잘 못 고르는 찰리 대신 니콜이 메뉴를 선택해준다거나, 다정하게 머리를 깎아준다거나 하는 모습이요. 서로가 미워서 헤어지기보다는 애정과 사랑이 있기에, 힘겹지만 그 과정에서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종국에는 서로를 놓아주고 독립된 존재로서의 성공과 행복을 바라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둘은 생판 남이 되어 살아가지 않고, 그들의 결실인 헨리를 매개체로 관계를 지속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처럼 만날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행복을 빌어주고, 마주 보고 웃기도 하겠죠. 찰리의 풀린 신발끈을 묶어주는 니콜의 장면은 부부간의 관계가 매듭지어졌지만, 여전히 세심하게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을 가지고 이 관계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혼과는 별개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지속될 것입니다.
제가 해당 구간만 무한으로 보는 몇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둘의 다툼,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찰리, 머리카락을 다듬어주는 모습, 서로를 향한 찬사를 뿜어내던 오프닝 신, 이혼 후 앞서 이혼 조정관 앞에서 듣지 못했던 니콜의 생각을 읽어 내려가며 울먹이는 찰리, 신발끈을 묶어주던 장면. 덕후처럼 그 장면을 돌려보게 됩니다.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은 어떤 부분이 제일 좋으셨을지 궁금합니다.
결혼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요즘은 결혼율과 출산율이 모두 예전 같지 않습니다. 사회나 경제의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것도 이유일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이전보다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진 사람들의 모습도 이유라는 생각도 듭니다. 팍팍한 삶 속에 상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해야 하는 제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두 사람이 처음에 가졌던 상대방을 향한 존중과 배려, 세심한 관찰과 양보, 말을 들을 준비와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결혼이 너무 겁이 나는 제도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조심스레 해보게 되었습니다.
또 결혼 이야기는 부부의 관계뿐만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부부, 가족, 친구, 동료.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누군가와의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고, 그 관계를 지속하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영화입니다. 따뜻한 색감의 영화이고, 들리는 음악도 너무 좋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넷플릭스에서 바로 보실 수 있네요. 집콕 시대에 따뜻한 감성이 고픈 분들이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주관 가득 별점: ★ ★ ★ ★ ★
- 스칼렛 요한슨 팬이라면 당연히 보셔야 하는 영화!
-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한 물음에 어느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따뜻한 감성으로는 따라올 영화가 없습니다. (애정 애정 무한 애정)
*이미지 출처 : <결혼 이야기>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