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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행 Jul 31. 2023

왜 <장화, 홍련>이어야 했을까

영리한 선택

우연한 기회에 2003년작 <장화, 홍련>을 보게 됐고, 이는 전직 영화 기자였던 나의 마음을 들끓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끄집어지는 순간. 

본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시작했던 브런치였지만, 마침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이곳에 <장화, 홍련>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영화를 좋아하는 1인 나부랭이의 주관적 해석이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말씀드리면서...

(스포일러를 피하고 싶으신 분들은 살포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장화, 홍련> 스틸컷

서울에서 오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수미와 수연 자매. 그들을 반기는 건 새엄마 은주이지만 어쩐지 자매는 그녀를 꺼려한다. 함께 살게 된 첫날부터 집에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수미는 이상한 환영을 보며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신경이 예민한 새엄마 은주는 정서 불안 증세를 보이며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런 새엄마와 그저 방관만 하는 아버지 앞에서 수미는 죽은 엄마를 대신해 수연을 지키고자 하는데.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주인공 이름이 장화 홍련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너무나 익숙한 전래 동화의 제목이자 사람 이름이기도 한 <장화, 홍련>. 자매 이야기라고 하니 언뜻 이 이름이 그대로 영화에 사용됐을 거라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 자매의 이름은 수미와 수연. 그런데 왜 김지운 감독은 <장화, 홍련>을 제목으로 지었던 걸까. 


먼저 영화의 내용과 관련이 되어있을 터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동명의 전래 동화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장화, 홍련 자매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연못에 빠져 죽고 만다. 그 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두 자매의 영혼이 새로 부임한 부사에게 찾아가 원한을 풀어달라 부탁하고, 결국 그 한을 풀게 된다. 


영화 <장화, 홍련>을 볼까. 친모가 죽고 계모를 맞게 된 자매 수미와 수연.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계모, 그 가운데에서 모든 걸 방관한 아버지. 


아마도 전래 동화 <장화, 홍련>에서 모티브를 따 왔을 영화 <장화, 홍련>의 내용이다. 때문에 이 제목을 고스란히 사용했을 터다. 

<장화, 홍련> 스틸컷

또 하나의 이유는 - 김지운 감독이 매우 영리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되는 대목 - 관객들의 편견을 이용하기 위함이다.


관객들은 전래 동화 <장화, 홍련>의 내용을 대충은 알고 있다. 계모에게 괴롭힘 당하다 불쌍하게 생을 마감한 두 자매. 때문에 영화가 시작된 이후 관객의 포커스는 연약해 보이는 두 자매와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계모 은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관객의 시선에서 은주는 전래 동화 <장화, 홍련> 속 계모와 동일하다. 친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슬픔은 이해조차 하지 않은 채 아이들의 불만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급기야 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 정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심해지며, 관객의 심증은 굳어져 간다. 은주, 나쁜 X.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사실 수미가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했던 동생 수연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수미가 수연의 행세는 물론, 계모인 은주 행세까지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마치 전래 동화 속 방관했던 아버지처럼 수미와 수연, 그리고 은주의 갈등을 모른 척하려고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실은 자꾸만 은주 행세를 하는 딸을 피하려 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음을. 자매를 죽일 듯이 괴롭히던 은주의 모습은, 실은 수미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것임을. 수미 자신은 깨닫게 된다. 


전래 동화 <장화, 홍련>의 편견 속에 갇혀있던 관객들은 덕분에 이 상상치도 못한 반전에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은주야, 욕 해서 미안해. 계모라고 다 나쁜 건 아닌데, 내가 미안.


<장화, 홍련> 스틸컷


그리고 그 편견 속에서 빠져나올 즈음, 또 다른 충격이 시작된다. 

수미가 이런 상상들을 만들어 낸 이유가 밝혀지게 되는데, 남편의 불륜으로 크게 상처를 입은 친엄마가 집 안 옷장에서 자살을 하고 이를 발견한 동생 수연이 엄마를 꺼내려다 쓰러진 옷장에 깔려 죽고 만다. 은주가 이 모습을 보지만 마침 마주친 수미의 쌀쌀한 반응을 본 은주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수연을 모른 척한다. 


"너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몰라, 명심해"


이 엔딩은 다시 관객을 전래 동화 <장화, 홍련>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듯하다. 

그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장화, 홍련>이었지. 


이렇듯 김지운 감독은 어쩌면 단순한 그 제목 하나만으로도 관객을 영화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아주 영리하게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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