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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플러스 Mar 22. 2021

순창을 스치다

  평일이라면 새벽 예배가 시작될 시간인 토요일 새벽 5시 30분, 전북 순창을 향해 자동차 2대가 출발했다.

전북 순창군 풍산면에 있는 기도원에 가기 위해서다.

  전날 늦게까지 여행 글쓰기 작업을 하느라 잠이 부족했던 나는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자동차 뒷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익산 여산 휴게소 가까운 곳에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가 있다.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시인의 작품이 바위에 새겨져 여기저기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팔각정에 앉아 삶은 계란과 옥수수, 개떡 한 개씩을 아침으로 먹었다.

든든했다.


  차로 돌아가 보온병의 더치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차 안 가득 커피 향이 퍼진다.

커피를 마시니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차는 계속해서 순창을 향해 달렸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졸기도 하면서 예상했던 시간보다 30분쯤 늦게 기도원에 도착했다.


  기도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깨끗했다.

벌써 준비 찬양이 한창이다.

노란 티를 입은 머릿돌 대안학교 학생들의 파워풀한 율동과 활짝 웃으며 찬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집회에서 율동 리더들이 파워풀한 동작을 하느라 찬양을 하지 못하는 것과 비교되었다.

특히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팀까지도 힘차고 일사불란하게 율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기도원 원장님인 박문철 목사님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 23절의 본문으로 '성전 된 우리의 몸을 거룩히 구별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다.

예배 후에는 줄을 서서 안수기도도 받았다.


  우리는 기도원 주변의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로 마련한 점심을 대접받았다.

반찬은 전라도 음식답게 훌륭했다.

우리 식탁에도 자주 오르는 호박이나 가지볶음, 깻잎장아찌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심지어 풋고추마저도 맛있었다.


  "역시 음식은 전라도야."를 외치며 평소 먹던 것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입으로는 배부르다고 하면서도 후식으로 나온 얇게 잘 구워진 누룽지를 어느새 하나씩 입에 물고 있다.

주일 예배 준비를 위해 오후 집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기도원을 나왔다.


  순천까지 와서 강천산을 안 보고 가면 섭섭하다는 의견에 따라 강천산에 잠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도로 양쪽으로 수령이 꽤 돼 보이는 메타세쿼이아가 터널을 만들고 있는 가로수 길을 지나면 강천산 입구에 도착한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초록의 조명을 단 듯 메타세쿼이아 터널을 비춘다.

메타세쿼이아를 좋아하는 나는 가로수 길을 지나는 내내 가슴이 설렜다.

  몇 년 전 담양 대나무 숲과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었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친정 언니들과 함께여서 좋았고, 오늘은 교회 신도들과 함께여서 좋다.


  관광안내 소책자를 얻기 위해 강천산 군립 공원(나올 때까지 국립공원인 줄 알았다) 안내소에 들어갔다.

'산을 찾아 노니는 것은 독서하는 것과 같다.'라는 문구가 강천산 지형도 위에 적혀 있다.

최근 여러 가지 일로 바빠 독서를 하지 못했는데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관광 안내도에서는 강천산을 순창 9경 중 제1경으로, '하늘이 내려준 환상의 절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은 5경이다.

그곳은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했다.


  1인당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강천산 군립 공원은 65세 이상의 어르신은 주민등록증으로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열 명의 일행 중 65세 미만은 나를 포함해 세 명에 불과해서 표는 세 장만 샀다.

그중에서도 나는 가장 어린 축이다.


  매표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병풍폭포'가 있다.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병풍바위'로 불리는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했다.

  '병풍폭포'부터 '구장군 폭포'까지 왕복 5.5km 구간은 맨발 산책코스로 조성되어 있어 신발을 손에 들고 걷는 사람이 가끔씩 보였다.


  산책 코스의 시작과 끝이 되는 곳에는 앉아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족욕장이 설치되어 있다.

'이왕이면 신발 보관함이 같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러면 신발을 들고 다닐 일은 없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천산 계곡은 올라가는 내내 왼쪽으로 계곡이 흐르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물이 무척이나 깨끗해 보였다.

깊지 않은 계곡 여기저기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펴고 막바지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여름에는 더 많은 피서 인파로 북적였을 것 같다.


  계곡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니 20여 년 전에 가봤던 무주구천동 계곡이 떠올랐다.

늦가을에 갔던 무주구천동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사람은 없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차가운 물이 시원하게 흘렀던 기억이 난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돌을 고추 모양으로 깎아 작은 기둥으로 세운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그 길을 걸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같은 게 있을 것만 같다.

제주도의 '돌 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 턱을 만지면 딸을 낳는다.'라는 속설이 있듯이.

  신혼여행 때 첫 딸을 낳고 싶은 욕심에 부지런히 돌하르방의 턱을 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아들을 낳았다.

속설은 속설로 끝인 게다.


  일행보다 천천히 걷던 내 눈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노란색 꽃이 보였다.

얼핏 보면 야생 란 종류 같기도 한데 내 발길을 사로잡았다.

  꽃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그 꽃 이름을 알지 못한다.

꽃 이름을 모른다 하여 꽃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그저, "아, 꽃 예쁘다!"라는 감탄사만 쏟아냈다.


  조금 더 걷자 폭이 넓고 깊이가 얕은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에 놓인 다리 너머로 보이는 붉게 핀 꽃과 일찍 든 단풍, 초록의 잎사귀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를 선사했다.

  경치를 찍느라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 숲 속 산책로를 먼저 갔던 일행이 되돌아왔다.

시간이 없으니 그만 영종도로 가자고 했다.


  매표소 가까이 오자 들어갈 때 발견하지 못했던 'I강천산'이라는 안내 표시가 눈에 띄었다.

흰 글씨와 빨간색 러브가 너무 예뻐서 자연스럽게 걸음이 안내 표시로 향했다.

누가 아이디어를 낸 건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신도들만 강천산 방문 인증 사진을 남겼다.


  산을 내려오니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도가 높고, 무더웠다.

권사님 한 분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했다.

  일행이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재빨리 건너편으로 갔다.

강천산으로 들어가기 전 내 발걸음을 잡았던 카페에 가기 위해서다.

카페 지붕 위에는 '나는 지금 커피가 몹시 땡긴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 플래카드 문구 그대로 나는 그때 커피가 몹시 땡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의 눈치가 보여서 그냥 강천산으로 올라갔었다.

커피를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

소나기가 내리려고 습도가 높고, 무더웠나 보다.

다행히 소나기는 곧 그쳤다.


  다시 영종도로 올라가는 길, 고속도로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진 논이 보였다.

추수 때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듯 논에 심어진 벼는 노랗기보다 초록에 가까웠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일몰 무렵의 대기와 함께 어우러져 멋진 그림 같은 경치를 연출했다.


  생각보다 늦어진 일정에 그대로 영종도로 가기는 무리가 될 듯해서 충남 당진의 공원묘지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주말 저녁 무렵의 식당은 공원묘지에 다녀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라지 토종닭 백숙을 미리 주문해 놔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았지만, 내 입에 썩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공원묘지는 어둠에 싸였다.

식당 주변에 다른 건물은 없었다.

'주인의 담력이 퍽이나 센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시골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되짚어 나왔다.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마음이 놓였다.


  스치듯 순창 여행이 끝났다.

몸은 피곤한데 눈은 여러모로 호강한 하루가 완연한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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