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한달살이 정산

그런데 이제 어학연수를 곁들인

by 첫둘셋

아니 벌써! 아들 열난다고 울고 불고 기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당장 내일 귀국하겠다며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내가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마지막 날이다. 길고 길었던, 한달살이가 내일 모레면 끝이난다. 하지만 미리 정산하는 이유는 오늘 어학원에서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로써 어학원 생활은 끝이나고 남은 이틀은 막탄의 리조트에서 보낼 것이므로, 사실상 한달살이는 오늘로 끝! 그렇다면 한달살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자세히 알아보자.


1. 최고의 수확, 핫소스에게 천국 그 자체였던 엘사!

오늘 졸업식을 마친 핫소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다. 어린이집 졸업식에서도 안 울던 아이라 그냥 별 생각이 없는 상남자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충격! 핫소스는 진심으로 엘사를 100% 그 이상 즐긴, 누구보다 현지인 같았던 아이다.

핫소스는 엘사에서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 했는데, 1주차에는 매일매일 저녁 수영을 했다. 아픈 동생과 그 뒤를 이어 죽어가는 엄마를 방에 남겨두고 아침 7시 반에 나가서 밤 7시 반에 돌아왔다. 알아서 아침 식사를하고 시간 맞춰 수업에 들어가고, 저녁을 먹은 뒤엔 알아서 씻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알아서 놀다 왔다. 핫소스가 이렇게나 주도적이고 씩씩한 아이인 줄 몰랐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잘 큰걸까 이 아이는!

2주차에는 갑자기 리자드 원정단을 만들더니, 손전등과 채집망을 챙겨 매일매일 도마뱀 사냥에 나섰다. 6학년 형아를 우두머리로 해서 삼삼오오 모인 남자아이들은 해가 지면 카페테리아에 모여서 엘사에 있는 모든 빌딩들을 돌아다니며 도마뱀을 채집했다. 방에 도마뱀을 풀어두면 모기에 안 물린다는 자스민의 조언에 따라 새끼 도마뱀 3마리를 집에 풀어놓기도 했다. 집에 풀어놓은 도마뱀 이외에는 잡았다가 헤어질 때에 다 놓아줬다. 그러면서 우리 핫소스는 엘사에 있는 모든 남자친구들과 친구가 된 듯 하다.

그러다가 4주차에는 갑자기 농구선수 무리에 꼈는데, 농구공을 처음 만져봄에도 그럴듯하게 따라하며 형들과 호흡을 맞추었다. 필리핀, 일본, 한국 친구들이 모여 매일 같이 저녁에 농구를 하는데, 나이 어린 동생들을 배려해주는 다국적 형, 누님들의 마음씨가 참 고맙더라. 핫소스는 한 일주일 농구를 하더니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도 자기는 축구를 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선언을 했다. 이제부터 농구를 하겠다나 어쩐다나.

핫소스는 선생님들과도 매우 잘 지냈다. 길을 가다 선생님을 만나면 먼저 가서 장난을 걸기도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핫소스의 그룹클래스 티처가 내 맨투맨 수업의 서브티처로 들어온 적이 있는데, 나를 보자마자 핫소스의 엄마냐고 묻더니 핫소스가 수업을 엄청 열심히 듣는다고 칭찬을 했다. 몰라도 일단 받아적고, 몰라도 일단 따라한다고. 딱히 영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언어를 두고 소통을 하면서도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보다는 궁금함과 즐거움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매주 시험을 보는 줄도 몰랐는데 오늘 졸업식이라고 한달간 수업한 자료들을 모아서 주었다. 생각보다 영어를 잘 쓰고, 잘 읽더라. 너는 다시 와도 되겠다, 아들아!


2. 그래서 계절설 우울증은 어땠는데?

계절성 우울증은 말 그대로 계절의 영향을 받는 우울증이다. 필리핀의 날씨는 진짜 최고였다. 최고기온 31도, 최저기온 25도로 우리나라 여름보다 덜 덥다! 그래서 낮에 돌아다녀도, 물론 땀은 나지만, 진짜 죽을 정도는 아니고, 저녁에는 선선하다. 같은 25도라도 열섬현상에 갇힌 한국의 25도가 아니라,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그리고 밤마다 스콜이 내리는 동네의 25도는 충분히 시원했다. 그래서 아주, 괜찮았다!

물론 1주차에 독감과 고열 이슈로 죽다가 살아났고, 2주차에는 1주차의 여파로 피곤해서 매일 낮잠을 3시간씩 때린 것 같고, 3주차에는 다시 말랑이가 아파서 좌절했다가, 4주차인 지금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서 그렇긴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길게 뻗은 야자수들의 녹음을 볼 때마다, 점심 먹고 산책할 때 풀 뜯어먹는 염소들을 볼 때마다, 지프니를 타고 조금만 벗어나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의 바다를 볼 때마다, 망고주스가 질려서 코코넛 주스를 사먹는 나를 발견할 때, 25페소짜리 아이스크림에 행복해 하는 아들들을 볼 때, 매주 수요일 줌바댄스 시간에 신나게 전신을 털고 올 때,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낮잠 때릴 때, 하릴없이 스도쿠하며 아들들 수업 끝나길 기다릴 때, 모든 때가 다 좋았다.

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목적 없는 배움이 이렇게 즐겁구나! 느꼈다. 토익 점수가 필요하지도 않다, 면접을 앞두고 있지도 않다, 영어 수업은 이미 충분히 잘 한다! 그래서 나에게 영어 시간은 그냥 외국인이랑 수다떠는 시간과 같았다. 영어로 말할 뿐이지 그냥 이것저것 많이 이야기했는데, 이상한 꿈 얘기부터 서로의 정치와 역사, 자동차 보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자꾸 말하다보니 잊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막 떠오르고, 그냥 대충 이런 발음이었는데? 하면서 내뱉으면 어떻게든 알아들으려고 애써주시는 티처들 덕분에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굉장히 talkative한 학생이었고, 이런 나를 다들 좋아해줘서 배우는 내내 즐거웠다. 물론, 한국식 공부는 1도 하지 않았으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여긴 토익 만점반이 아니니께.


3. 말랑이에게는 너무 길었던, 너무 짧았던 한달!

말랑이는 사실 굉장히 힘들어했다. 일단 타고난 집돌이인 이 친구는 한국에서 어디를 여행가도 10시만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치는 굉장한 친구이다. 그런데 이 낯선 필리핀에서, 그것도 한달을, 그것도 하루에 8시간씩 영어로 말하며 살아야 하다니! 우리 말랑이에게는 재앙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말랑이는 꼬박 6일을 아팠다. 말랑이는 매일 한국에 돌아갈 날짜를 손꼽았고, 왜 엄마는 대체 이곳에 와서 나를 힘들게 하냐며 칭얼댔으며, 다시는 자기를 데리고 이런 곳에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말랑이는 한시도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수업 시간마다 말랑이를 수업에 데려다줘야했고, 저녁시간에도 보통은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엄마들과 친해질 시간이 1도 없었다. 왜냐면 누군가와 5분이상 대화하면 우리 말랑이가 옆에서 정말 소리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주차가 되니 슬슬 이 생활에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유치원 가기 싫다 하던 소리도 쏙 들어가고, 오늘 아침에는 수업 늦으면 안된다며 내 손을 이끌고 방에서 나가더라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부끄러워 농구도 안했는데, 이제 슬슬 형들 사이에 껴서 하고 오더라. 알아서 놀고 온 지 한 이틀 되었나. 그런데 이걸 어째, 이제 다 끝났다.

말랑이도 분명 여기서 즐거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랑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아이이다. 그리고 너무 어렸던 것도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면역력 완성이 안되서 그런지 정말 너무 아팠다. 수업일수 20일 중에 6일을 아팠으니, 이거 뭐 출석률 아주 개판이다. 개인 성향과 평소 신체 상태에 따라 같은 경험이 이렇게나 다른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말랑이를 생각하면 재방문은, 잘 모르겠다. 한국에 놓고 올 가능성이 매우 높음.


4. 재방문을 하고 싶은 이유, 하기 싫은 이유

계절성 우울증에 대한 효과는 이미 검증이 되었으니, 이 곳을 또 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여부가 남아있다. 어학원마다 컨셉이 있겠지만 엘사의 컨셉은 단연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운 캠퍼스이다. 우리 핫소스에게 너무 안성맞춤이었던 자연환경! 서로 배려할 줄 아는 멋진 학생들! 외국인도 자연스레 함께 지내는 공간! 아니, 내가 외국인이구나! 만약 진짜로 빡세게 영어공부만을 할 것이라면 philinter가 훨씬 낫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외국생활의 즐거움과 시골의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단연 이곳이 최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곳은 호텔이 아니기 떄문에 시설 면에서는 진짜 열악하다. 요즘 진짜 시설 좋은 호텔 어학연수가 많은데 여기는, 지역아동병원 입원실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다가 시공 중에 약간의 하자를 곁들인. 나는 왜 필리핀 친구들이 배수구 경사면을 이렇게 만들어서 샤워를 하면 물이 뒤쪽으로 고이는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나는 왜 스콜이 오면 문 사이로 빗물이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방에 물이 샌다고 프론트에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밖에도 빨래 수거일이 2일이라고 해서 수건과 옷을 3~4일분만 챙겼는데, 수거를 그렇게 한다고 했지 돌려주는 건 이틀 뒤라서 이틀간 손빨래를 해야만 하는 사이클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국에서도 안하는 손빨래를 정말로 매일 했다! 방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해주는데, 두번 해주면 좋겠다. 침대보와 이불은 2주에 한번씩 갈아준다. 요즘 호텔 생각하면 주기가 너무 길기는 하다. 그래도 해주는게 어디야 싶으면 또 그렇기도 하고.

사실 나는 밥에 제일 불만이 많았는데, 첫주에는 이거 식비 끼니당 500원인가? 싶을만큼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사 밖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번 하고 나니, 아! 이곳이 집밥이구나!를 느끼고 그 뒤부터 감사히 먹어서 전~혀 불만이 없다. 필리핀치고, 정갈하게, 필리핀치고, 위생적으로, 필리핀치고, 맛있게 나온다. 처음에는 진짜 날아다니는 파리들 보고 기절할 뻔 했는데, 지금은 바퀴벌레만 안나오면 먹을 수 있다. 파리는 뭐 인간이 있는데 파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은 어떻게 식당에 파리가 없나 궁금하네 이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소음이었는데, C동은 대로변에 있어서 밤새도록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묻힐 정도의 노랫소리가 밤새도록 들린다. 바로 옆에 가라오케가 있다는데 매일 새벽 3시까지 누군가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어느날은 노랫소리에 깨서 시계를 보았더니 아침 6시였다. 심지어 화요일이었는데. 필리핀 사람들은 진짜로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운이 좋게 그들의 노래가 일찍 끝나는 날에는 어김없이 닭새끼들이 울기 시작했다. 닭은 새벽이 와야만 우는 줄 알았던 한국사람은 이곳에서 닭들이 날이 밝지 않았는데도 울어제끼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들은 진짜로 밤새운다. 그리고 해 뜨면 조용해진다. 내가 왜 닭들이 밤에 우냐고 물어봤는데, 여기 닭은 원래 그런다더라. 닭이랑 해랑 관련이 없는거였어? 대충격. 무튼 이런 소소한 불편들, 그렇지만 그마저도 이젠 익숙해져버린 불편들, 그렇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선택할 수 있을지 망설여지는 부분들이 존재하긴 한다.


5. 만약 다음에 재방문을 한다면..?

다음번에 또 오게 된다면 반드시 카모테스와 말라파스쿠아를 갈 것이다. 섬 투어를 돌아야지. 엘사를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핫소스와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말랑이 덕에 이 근처의 로컬식당, 로컬카페를 한 군데도 못갔는데 애들이 조금 더 커서 온다면 더 많은 로컬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또, 많이 큰 핫소스와 오슬록 캐녀닝을 도전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수건을 30장 챙겨 올 것이다. 짐을 더 잘 쌀 수 있겠지. 컵라면과 전기포트를 챙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2000원만 내면 라면 끓여준다. 젠장.

핫소스는 호핑가이드가 되는 꿈이 생겼다고 했다. 호핑가이드들 정말 멋지더라. 힘도 세고 바다수영도 잘한다. 핫소스가 반할만 하다. 이번에는 놀자호핑과 원클릭세부의 고발투어를 이용했는데, 다음번에는 더 다양한 곳들을 방문해보고 싶다. 아, 물론 놀자호핑 진짜 좋았고, 원클릭세부도 짱이었다. 가이드들이 워낙에 눈치도 빠르고 힘도 세고 안전도 잘 지켜줘서 불만이 생길 수가 없다. 말랑이는 아직도 가이드 이름을 외친다. 놀자호핑의 마크, 초롱이 고마워요. 원클릭 세부 단단, 따따, 코이코이, 딜라이 고마워요. 애들이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네. 호핑 최고. 호핑만 20번 하다 가도 좋아. 돈 열심히 벌어놓아야지.


6. 그래서 돈은...? (3인 기준)

어학원 비용 한국에서 결제한 것이 대략 650만원, 아시아나 왕복항공 170만원, 어학원 도착해서 현지비용 결제 140만원, 주말 사파리 20만원, 주말 호핑 24만원, 보홀여행(숙소+육상투어+고발투어+오션젯) 70만원, 주말 호텔 15만원, 제이파크데이유즈 15만원, 마사지 10만원, 기타 쇼핑비용 20만원 이정도 쓴 것 같은데 합쳐줄 사람...? 나에게 정확한 계산을 요구하면 안 된다. 나는 돈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픈 사람이기 때문에 다 대충이다.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지만 이정도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길러보자. 대충 1200만원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큰 돈이긴 하지만, 뭐 다 내가 번 돈인데 뭐. 제가 이렇게 잘 썼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즐겁게, 아쉽게, 건강하게 한달살이가 마무리 되어 다행이다. 첫주에는 진짜 돈 낭비, 시간 낭비, 체력 낭비라고 생각하고 좌절했는데, 갈수록 모두가 행복해져서 너무 다행이다. 나도 너무 즐거웠고, 우리 아들들도 충분히(첫째가 두배로 즐기고, 둘째가 반만 즐겼으니 퉁쳐본다.) 즐겼으니 뿌듯하다. 필리핀 사람들 너무 착하고 맑아서 보고 있으면 힐링이 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삶의 모습에서 느낀점도 많았다. 좋았고, 또 올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이제 남편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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