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호핑을 곁들인...
사파리투어를 잘 다녀오고 저녁도 잘 먹고 오랫만에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해 있던 그 때, 왜 마음을 놓으면 또 마음 졸일 일이 생기는 것인지! 말랑이에게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정말 최상의 컨디션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저번에 이틀밖에 먹지 못해 제대로 발동되지 못한 타미플루 때문에 다시 바이러스가 부활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 사파리를 다녀온 것이 너무 무리가 되었을까! 이번에야말로 폐렴인건가! 아니면 혹시 다른 염증이, 예를 들면 뇌수막염 같은 것이 생긴 것인가! 문제는 다음날 호핑투어가 예약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제발 하루만 버텨줘라 아들.
하지만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말랑이는 밤새 열이 올랐다. 38도를 웃도는 열, 제발 내일 아침에는 떨어져 줘라. 말랑이의 열은 떨어졌을까? 전혀. 그렇지만 호핑은 가야했다. 아픈 말랑이에게 저번에 먹고 남은 약들, 항생제와 해열제와 기침, 콧물약을 먹이고 벤에 올랐다. 한시간정도 벤을 타고 막탄에 있는 호핑센터 근처로 가는데 오늘도 역시나 차가 무지무지 흔들린다. 에어컨을 풀로 틀어놓아도 절대로 쾌적하지 않아지는 이유가 뭘까. 필리핀 여행에서 '에어컨 빵빵한 벤'이라는 말에 속지 마시길 바란다. 우리나라 자동차와 같은 쾌적함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바람은 쎄고 찜통인 알루미늄 상자 안에 갇힌 기분이다. 그 속에서 우리 말랑이는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나의 상체에 토를 했고, 토한 뒤로 20분 내내 "도착!!!!"이라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와우.
골드망고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점심은 나쁘지 않았다. 약간 처음으로 드디어 관광지 레스토랑 온 기분. 엄청나게 고급스런 맛은 아니었지만서도, 필리핀에서 이 정도면 선방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내가 이제 현지기준에 맞추어서 드디어 사고할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리뷰를 쓰면 망고에이드를 주는데, 말랑이가 이걸 먹고 힘을 좀 내서 다행이었다.-호핑센터로 향했다. 와중에 말랑이의 쿨타임(전에 먹은 해열제가 약발을 다해서 다시 열이 오르는 시간)이 거의 차서 약 먹일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일단 배에 타면 5시간이라는데 괜찮을까 싶으면서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 어떡해, 가야지, 하며 승선. 배에 오르자마자 신나게 환영해주는 현지가이드들 덕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필리핀 가이드들이 그렇게 애들을 잘 봐준다는데, 기대가 되었다. 배의 중앙에는 각종 술과 음료, 망고와 바나나가 차려져 있었는데, 망고가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던지 호화스러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저정도의 망고를, 이렇게 늘어놓고! 다 먹어도 된다니!!! 작은 것에 감동받는 나란 사람.
분명 12년전에 세부에서 호핑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이 하나도 없다. 워낙 마음이 싱숭생숭 할 때라 그런가 그냥 노을질 때 배에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그게 너무 잘 나와서 그 사진을 찍은 장면만 기억이 난다. 그 배가 그 배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통통거리는 배의 양 사이드에 있는 그물에 앉아서 바람을 맞았던 기억만 어렴풋이 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호핑은 훨씬 더 사이즈도 커지고, 체계도 잡히고, 프로그램도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았다. 전체 가이드들 소개를 하며 한명씩 별명을 알려주는데, 우리 배에는 탑과 주진모, 박보검, 초롱이 등등이 있었다. 근데 필리핀 사람들이 다 눈이 크고 눈썹이 짙어서 뭔가 묘하게 닮았다. 아주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약간의 탄식과 함께 나도 모르게 옅은 수긍의 끄덕임을 하다가 킹 받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았다. 맨날 인스타그램에 뜨는 화려한 환영 댄스(?)도 되게 궁금했는데 진짜로 해준다. 영상으로 볼 떄는 조금 과해보이고, 정신이 없고, 굳이..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파이팅이 넘치고, 약간 신나는 밴드 음악의 전주처럼 심장을 조금 흔들어 놓는다. 아픈 아들이 내 허벅지를 베게 삼아 잠들었지만, 신이 나버렸다.
첫번째 포인트에 막 도착했을때, 내내 자던 말랑이가 깨버렸다. 핫소스는 "엄마 빨리 구명조끼 입고 물에 들어가자!"라고 외치고 말랑이는 "엄마 ㅠㅠ 아무데도 가지마 ㅠㅠ 나랑 자 ㅠㅠ"라고 말하며 안겼다. 평소 물과 바다를 매우 사랑하는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아픈 말랑이를 두고 갈 수 없어서 정말 꼼짝도 못하고 말랑이 곁에 있었다. 다행히 우리 핫소스는 일행으로 같이 온 다른 엄마가 챙겨주셔서 그 팀에 껴서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말랑이는 다시 눈을 스르르 감다가도 "엄마, 나 잠들어도 물에 들어가면 안돼."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 손을 꼭 잡고는 절대 놓지 마라 당부하기도 하였다. 나를 안타깝게 여긴 현지가이드가 와서 대신 아이를 봐주겠다 했지만 우리 말랑이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는사이 첫번째 포인트 스노쿨링이 끝나고 핫소스가 돌아왔다. 핫소스는 돌아와서 양손에 옥수수꼬치와 닭꼬치를 들고 야무지게 먹었다. 어디에다 내놓아도 잘 살아남을 우리 큰아들, 든든하다!
두번째 프로그램은 선상낚시! 다행히 말랑이가 조금 기력을 회복했다. 선상낚시는 갑판에 앉아 낚시줄에 미끼를 끼워 하는 줄낚시였는데, 이게 되나? 싶을정도로 조악했지만 실제로 물고기가 잡혔다! 모두들 공평하게 한마리씩은 잡은 것 같고, 의외로 어린아이들도 스스로 잘 잡았다.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잘 기다렸다가 중요한 순간에 낚아채는 것 같았다. 반대편에 앉은 어린이들이 계속해서 잡았다를 외치는 모습이 기특하고 부러웠다. 한 마리라도 잡아서 우리 말랑이가 짜증나지 않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음 스노쿨링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 말랑이는 거의 회복했다. 그래서 바다에 들어가지는 않고 투명한 보트에 타서 물고기를 보겠다고 했다. 우리가 보트를 원하니 나이가 지긋한 현지가이드가 흔쾌히 우리의 머리를 맡아주셨다. 이번에도 핫소스는 챙길 여력 없지만 이미 알아서 놀고 있고, 말랑이를 보트에 태우고 나는 드디어 입수를 했다. 바다는 깊고 차가웠고 엄청 짰다. 물 속에는 정말 물고기들이 많았다. 막 해양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것 처럼 형형색색까지는 아니지만서도, 이만하면 엄청났다. 보트 위에서 물 속을 바라보고 있을 말랑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고기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골프공만하게 뭉쳐놓은 식빵을 보트 아래에 천천히 풀었다. 다행히 말랑이는 물고기들이 식빵을 먹는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 할 수 있었고 즐거워했다.
이 포인트에서 나는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스노쿨링은 깊이 잠수도 하고, 다이빙도 하며 바다를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트를 잡고 어떻게든 보트 가까이 물고기를 올라오게하려 애쓰며 말랑이가 어느정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 뒤에야 안도되는 내 마음을 느꼈다. 엄마라는 존재는 절대로 나의 즐거움이 자식의 즐거움보다 앞설 수 없구나. 당장이라도 구명조끼를 벗어 제끼고 바닥의 산호초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었지만, 우리 아들이 한 번 웃어주는게 더 좋으니 참게 되는 것이다. 아, 나 벌써 햇수로 10년차 엄마지. 맞네.
이런 아쉬움은 보트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젊은 가이드 마크가 어느정도 해소해주었다. 마크는 나를 보자마자 "마미, 많이 즐겼어요?"라고 서글서글하게 다가왔고,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니 "마미, 내가 잠수 시켜줄게요."라고 하며 나를 이끌었다. 이미 보트와 충분히 가까워져 있었고, 숙련된 가이드가 말랑이를 지키고 있었기에 "잠시만"이라고 하며 보트 근처의 바다에 다시 들어갔다. 마크는 내게 물고기를 더 가까이에서 보게 해주고, 더 깊은 바다도 보여줬다. 물에서 물방울로 도넛 만드는 것도 알려주고, 하여간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세부 바다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갑판으로 올라가니 우리 아들이 구명조끼도 없이, 오리발도 없이, 수경도 없이 다이빙을 하고 있더라. 자기 이제 머리부터 들어갈 수 있다고 자랑하며 말했다. 아래에서는 가이드 몇 명이 뛰어내려는 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은 대체 여기서 몇 번이나 저 바다로 몸을 던진걸까. 귀엽고, 궁금하고, 감사했다. 엄마가 없어도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옆에서 잘 돌봐주는 가이드들 덕분에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호핑을 잘 즐긴 것 같다. 마크가 "마미도 다이빙 해봐요!"라고 소리를 쳐서 시도해봤는데, 머리부터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렵더라. 뭔가 시도해볼까 하다가도 '나 여기서 허리 꺾이면 한국 못 돌아가는데'라는 염려가 들어 폴짝 뛰어 발부터 들어갔다. 그래도 구명조끼와 오리발을 벗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드는 기분은 쏘 나이쓰였다!
마지막으로 진라면 순한맛을 먹으며 우리의 호핑은 끝이 났다. 핫소스는 자기는 아직 덜 놀았다며 분개했고, 실제로 캠퍼스로 돌아가서 야외수영장에서 홀로 한시간 반을 더 놀고 왔다. 우리 아들 체력 무슨일이냐 진짜 운동선수 할거니 너. 말랑이는 좀 더 짜증이 났는데, 내가 짐을 챙기는 동안 마크가 안아서 벤까지 데려다 줬다.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챙겨주는 필리핀 가이드들 진짜 짱이야.. 초롱이는 자기는 "따까리"라며 "누나가 하지 말고 따까리 불러"라고, 어디서 이런 상스러운 말을 배워서 이렇게 잘 쓰는건지, 하여간 귀여웠다. 이 친구들 서비스 마인드가 장난이 아니구나, 너무 능글맞지도 않고 딱 귀엽게 니즈를 파악하고 움직여준다. 호핑투어인데 필리핀 친구들에게 감동받고 가서, 나중에 말랑이 건강할 때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핫소스는 엄마 없을 때 가이드들과 더 많은 친분을 쌓았는지, 보트에서 내리려는 핫소스를 가이드가 꼭 껴안고 놓아주질 않더라. 그래, 우리 첫째는 여기 현지인하렴. 세부랑 너무 잘 어울린다 너.
말랑이는 그 후로도 이틀을 더 아팠다. 그렇지만 첫주와 달라진 것은, 이제 그렇게까지 멘탈이 붕괴되지 않았고, 어차피 병원에 가도 별 수가 없으니 저번에 받은 처방전으로 근처 약국에 가서 부족한 약을 보충해 먹였다는 것이다. 꼬박 6일을 아픈 우리 아들, 그렇지만 이제 남은 기간은 제발 행복하길 바라며, 한달살이 잔혹사의 결말을 미리 내기로 했다. 부디 마지막까지 건강하여서 이곳에서의 기억이 말랑이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