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꼭 들으셔야 합니다, 진짜로.
https://youtu.be/UNdVZdiGlIE?si=_paqWnJR2WOluOuo
오랜만에 만난 야성미 넘치는 목사님.
중증외상센터의 작가 한산이가의 아버지이신데, 그렇게 소개되는 것을 안 좋아하시던 목사님.
서울대 성악과를 나왔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서는 다들 "너는 목사 되는 거 아니냐?"라고 했다며 신학대를 가서 목사가 돼버린 목사님.
이번 다니엘 기도회는(내가 제대로 각 잡고 처음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길고 길었던 신앙의 침체기 속에 만난 단비 같은 시간이 되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져지는 것도 아니라서 내게 있는 것을 확신하다가도 그것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오히려 후퇴하는 것 같은 날엔 속이 쓰리다 못해 타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교회를 다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자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춤은 연습하면 늘던데 왜 신앙은 연습한다고 늘지 않을까?'라며 연습실에서 고뇌하던 나날들도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특히 너무 심했는데, 유아실에서 드리는 예배는 사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시간이었다. 애는 울지, 말씀은 안 들리지, 고생고생해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서 어떻게든 자리는 차지하고 앉아있는데, 그냥 힘들다, 지겹다, 괴롭다의 감상이 반복되는 주일들을 보냈다. 대학부 시절 뜨겁게, 그리고 열심히, 매번은 아니지만 잦은 마음의 감동과 울림, 그런 것들을 느끼다가, '어쩌다 나는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가'를 묻게 되는 차가운 시간이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까, 둘째가 태어났으니까,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니까. 그러면서 견디기를 몇 년이나 되었을까? 일이 년으로 아이는 자라지 않는다, 사람처럼 잘 수 있게 되는 데만도 오 년이 넘게 걸렸다. 그 가운데에 이제 내 마음속에 성령님은 계시는 게 맞을까? 그런데 이렇게 차갑고, 따분하고, 지루할 수가 있나? 겨우 출석만 하는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길고 긴 터널을 지나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쯤 되니 드디어 말씀이 들리더라. 아주 조금.
그 후로 하나님은 나의 영성 회복을 위한 여러 자리들을 만들어주셨다. 수련회로, 기도회로, 기도 모임으로. 그러다 올해, 사실 굳게 마음먹은 것도 아닌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서 나의 여러 부분들을 깨부수는 중이시다. 전신화상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깊게 만나 자신의 아픔을 계기로 간증을 전하는 성도님을 통해 '고통 속에 사느니 죽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던, 그래서 안락사에 찬성하고 나의 죽음의 시기를 '고결하게' 결정하고 싶었던 나의 오만을 깨부수셨다. 삶도 죽음도, 들숨도 날숨도 다 그분의 계획이고, 고통 가운데서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위로하는 하나님을 오만 방자하게도 내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셨다.
고아로 태어나 입양이 된 후, 입양아라는 사실에 방황하였지만 자신을 태중에 있을 때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거듭난 박요한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하나하나 다 그분의 손 앞에 정교하게 계획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든, 부유하게 태어났든,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계획자이신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비로소! 홀로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는 늘 가장 좋은 기도자를 옆에 붙여주시고, 그 순간의 너머를 보게 하시는, 그래서 감동케 하시는, 어떤 잘 짜인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은 선사하시는 그분의 계획을 믿게 되었다.
내가 늘 이렇게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다니엘 기도회에 처음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해에는 말씀을 듣고 너무나도 실망스럽기도 했다. 저 사람은 자기 자랑하러 나온 거 아니야? 저게 하나님 뜻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교회가 너무 세속적으로 변질된 것 아니야? 하는 비판을 늘어놓던 해도 있었고, 올해는 너무 아픈 사람들만 나오는 것 같네, 나 아픈 사람들 얘기 듣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라며 구시렁거리던 해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나와도 나의 마음밭이 준비되지 않으면, 다 남의 얘기다. 남의 자랑이고, 남의 아픔이고, 아무리 명강사가 나와도 다 남의 말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매 설교가 어쩌면 다 나의 이야기다. 이건 하나님이 나를 깨부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자의식 과잉이라면 맞다, 지금 한껏 과잉되어 있다. 그분이 나를 하나하나 깨부수시고, 순전하게 만드시고, 마음껏 사랑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무려 11일 차에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가지 사건을 모두 겪으신 사모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다. 6살 난 아들을 잃고, 56세에 남편을 잃은 여인. 나의 공황발작의 이유이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두 순간을 이미 모두 겪으신 70세의 사모님이 너무나도 평안한 모습으로 자기의 삶을 들려주셨다. 아, 이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고도,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도, 그분의 사랑을 알고도, 자식을 잃을까, 남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잠도 못 자고 숨도 못 쉬는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분의 인생은 '사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나 님께서 이 땅에 남은 나에게 맡기신 일, 부탁하신 일, 아직 남아있는 일, 그래서 이 땅에 머물며 해나가야만 하는 일. 나의 사명. 주신 달란트만큼은 해야 하는데, 허락하신 재능만큼은 해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란트만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의 사명에 대해 곱씹어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만나게 된 12일 차 이유원 목사님. 살아있는 영성! 나의 교만함을 깨부수는 비이성! 목사님의 이야기는 성령 '체험'부터 시작해 버린다. 참고로 나는 굉장한 논리와 이성과 비판의 인간이라 이런 류의 이야기를 꽤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의 처음이 빅뱅 같은 얼기 설기한 가설로 시작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이다. 나는 논리가 필요하고 이성적 확신이 들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다.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한다. 가설을 여러 번 세우고, 수정하고, 확신이 들 때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냅다 성령체험부터 시작한다. 단 한 번도 나는 겪은 적도,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일을. 그러더니 유체이탈에 대해 얘기하신다. 유체이탈, 뭐 있겠지, 귀신도 뭐 있겠지, 마귀도 있고 다 있겠지, 그런데 정신병일 수도 있잖아? 좀 이상한 거 아니야?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경계했을 이야기. 나는 의심이 매우 많고, 다 있을 수도 있지만, 다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아마도 이런 것을 잘 느낄 만큼 매우 영적인 사람이겠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들으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맞았고.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은 기도할 때 생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고, 확률게임하지 말고 될 때까지 매달리라! 는 말씀이었다. 나는 매우 확실한 사람이라, 안 될 것 같은 것은 기도하지 않는다. 웃기는 소리 같지만, 될 것 같은 일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 공정이라 믿는 사람이다. 주님, 안될 일을 내가 기도한다고 되게 하시면 그게 공의의 하나님입니까? 편파적인 하나님이지, 라며 나 스스로 하나님의 역할을 굉장히 축소시켰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급변하는 시류들이 나에게는 너무 중요했다. 나름 개방적인 콘셉트를 버릴 수 없어서 보수적인 사람 중에 가장 개방적으로 세상의 변화들을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분은 생떼를 쓰라고 하신다.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신다. 억지를 부려보라고 하신다. 윤리와, 도덕과, 질서까지도 그분의 절대적인 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진짜 바라는 것이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내가 해보다 안될 것 같으면 그만두지 말고, 생떼를 쓰면서까지 기도하라고.
나는 늘 뒤돌아보는 신앙생활을 했다. 돌아보니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 인도하신 것 같다. 결국에 잘 된 일이고, 결국에 잘 돌아왔는데, 늘 뒤를 돌아봐야 하나님이 계셨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앞에 두는 것을 두려워했다. 바라다 안되면 실망할까 봐, 내 힘이 아닌 것을 바라면 정직하지 못한 것일까 봐, 공의의 하나님에게 불공정을 바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봐. 그래서 예수님을 늘 내 등 뒤에 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앞에 두어야겠다. 나보다 앞서서 행해주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겠다. 어지간히 주도적이라 늘 리더가 되고 싶었는데, 확실히 하나님의 팔로워가 되어야겠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감정에 대한 명령이라고 한다. 너의 감정, 항상 기쁨에 두어라. 어째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내가 다 이루어 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받은 것은 감사해라. 내가 감정을 명령하는데, 나에게는 감정을 명령할 권한이 있단다.
내가 숭배하는 감정들이 떠오른다. 공황장애 뒤에 숨어있다. 계절성 우울증에게 굴복되어 있다. 불안장애 안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감정들로 많은 것들을 회피했다. 감정들에 얽매여 많은 것들을 불가능하다 믿고 산다. 하지만 '항상 기뻐하라'는 덕담이 아니라 명령이다. 내가 다 해줄 거니까, 너는 기뻐해!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너는 충만히 기뻐해! 너는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고!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보다 멋있다.
나는 몰랐지만 이미 나를 축복하시고, 나는 몰랐지만 이미 나를 계획하시고, 나는 모르지만 이미 나를 위한 열매들을 준비하고 계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확실히 그분 뒤를 따르며, "애기야, 가자!" 소리에 화답하여 기쁨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