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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종합병원] 6주째 못 끊는 항생제

내가 항생제인지, 항생제가 나인지

by 첫둘셋

12월이다.


12월은 일단 축하할 만한 것이 거지 같은 11월을 견딘 자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같은 것이다. 올해는 연구년이라 조금 쉬운 11월일 줄 알았지만 웬걸, 여전히 힘들었다.


10월 마지막 주에 시작된 염증은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급성 방광염으로 시작했다. 오줌을 누는데 피가 묻어나더라. 그러고 나서는 당연히 편도염. 병원에서도 독감이나 코로나 같다고 하였지만, 여전히 그냥 편도염으로도 입원할 수 있다는 것을 올해도 증명해 낸 38세 여성 되시겠다. 입원 가방을 주섬주섬 싸고는 잠들어서 입원 못한 자가 바로 나다. 그리고 좀 낫나 했더니 이번에는 질염이 왔다. 아마도 내 혈액의 반은 염증으로 되어있는가 보지? 혈액을 타고 쭈우욱 돌다가 앉을자리 나면 냉큼 앉아버리는 얌체 승객 같다. 이번에는 기어코 떼내고자 마늘주사도 맞고 왔는데, 내일 한 번 더 맞아보고 봐야겠다. 그러는 사이에 12월이다. 아니, 벌써!


자주 아프게 되는 사람은 도대체 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된다. 일단 나는 아파서 쉰다. 왜냐면 나는 너무 자주 아프고, 아프지 않은 시간은 너무너무 아깝다. 너무너무 아까워서 감히 그냥 쉬지 못하고, 무리를 하고야 마는 것이다. 11월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장거리 여행을 3번이나 가고, 배드민턴과 필라테스를 동시에 하고, 새로운 일을 받고, 늘 이런 식이다. 무리를 하지 않고 싶은데, 무리하지 않는 삶은 무료하게 느껴지고, 어차피 아파서 쉬게 될 텐데 아프기 전까지는 해보자는 마음이다. 올 한 해는 쉬는 해였음에도, '몇 월만 지나면 좀 편해지겠지?'라는 생각을 12월까지 하고 있다.


그래, 애초에 내가 하려고 했던 것만 했다면 이렇게 바쁘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외로움보다는 괴로움을 택하는 쪽이라 기어코 집필진에 들어가고 말았다. 집필만 끝나면, zep만 완성하면, 시범수업만 끝나면, 발표회만 끝나면, 편안해지겠지?라고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시교육청 일도 맡아서 하고 있고, 이것 끝나면 어차피 최종 보고서 쓰고 발표 준비 해야 한다. 쉬엄쉬엄, 대충대충, 하면 죽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잘하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잘 해내고야 마는 내가 나의 동력이다.


그러면서 또 놀기는 엄청 놀았다. 올해 사진 정리 할 엄두가 안나는 것이 도대체가 가족여행을 몇 번을 간 건지. 이런 기회가 자주 없긴 하겠지만, 이제 여행을 간다 해도 별 기대나 감흥이 없는 것이 여행 자체에 한계효용을 이미 지나버렸다. 이제 귀찮은 감각이 더 커서 아무 데도 안 가도 될 것만 같아. 볼 만큼 보고, 먹을 만큼 먹었다. 아, 과분했다.


과분한 한 해였다. 별달리 특출 나지도 않은 내가 정책연구에 합격한 것도 그랬고, 좋은 사람들 만나서 한 해 동안 마음 상할 일 적게 보낼 수 있는 것도 축복이었다. 가끔 들리는 현장의 소식은 늘 BAD NEWS 뿐이었고, 그러한 감정 소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아이들과 입씨름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복기하고 실수한 것은 없나 되짚어 보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나의 무고함을 주장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뭐, 이런. 그저 맡은 일에 성과만 내면 되는 프리랜서의 삶이, 별다른 목적 없는 출근길이, 어른들과 우아하게 담소 나누며 차 마실 수 있는 아침 시간이 감사했다.


나는 친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의 루틴에 있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서 약속을 잡고, 무리를 짓고 이런 것 보다 그저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편안하면 좋겠는 사람인 거다. 어차피 같이 있어야 하는 시간, 한 번이라도 더 웃으면 좋고, 만나서 기분 좋으면 더 좋고, 굳이 갈등 안 만들고 싶고, 즐거우면 좋겠는 사람. 그리고 그러면 그냥 만족하는 사람인 것 같다. 누구누구랑 꼭 친해져야지, 누구누구랑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지, 뭐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에너지도 사실 잘 없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해야 할 일 더미에서, 마치 건조기에서 막 나온 산더미 같은 빨래 더미들을 쳐내기 위해 열심히 개키는 자처럼 허우적대면서,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과 잠깐의 진심을 나누는 사람인 거다. 사실 그냥 늙어서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지.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물론 누군가에게는 되게 병아리겠지만, 나 스스로는 인생의 중반이 지나간다 여겨지는 시점에서, 이제 더 이상의 가지를 뻗고 싶지 않은 나무줄기 되시겠다. 있는 열매나 잘 지키자, 뭐 이런.


12월인 올해도 여전히 못한 게 많은데, 드라마 정주행이 그렇다. 동백꽃 필 무렵, www, 술꾼도시여자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쌈마이웨이 기타 등등 보고자 했던 드라마 리스트들이 많은데 여전히 시작도 못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충동적으로 은중과 상연을 정주행 했고, 안나다 이루어질지니를 본 것을 보면 사실 나는 김고은과 수지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몇 년째 위시리스트에 들어있는 드라마는 당최 나갈 줄을 모르고, 충동적으로 시작하면 끝까지 봐버린다. 더글로리를 급작스럽게 두 번이나 봤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 와중에 책도 꾸준히 읽었다. 리뷰 쓰기로 했는데 그럴 시간, 아니 열정?조차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하루가 채 소화되기 전에 다른 하루를 맞이하며 꾸준히 체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11월 즈음이 되면 켜켜이 쌓인 하루하루가 목구멍까지 넘어와 기어이 고달파지고 마는 것이고. 책을 읽고, 문장들을 기록하고, 감상을 남길만한 시간이, 여유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다음 일, 그다음 성과, 그다음 여행, 그다음 책, 그다음, 다음, 다음, 다음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내선순환 열차처럼, 내 인생을 돌고 있다. 그러다 염증의 공격에 쥐어 터지면, 항생제가 겨우 살려 내는 거고.


이게 겨울의 감각이다. 나 좀 쉬고 싶어. 아파서 쉬는 거 말고, 머리도 좀 비우고, 지난 일 년도 좀 돌아보고. 매년 비슷하다. 1월, 2월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차분히, 지난 일 년을 좀 돌아보고 싶어. 아직 소화 안된 것들은 또 잘 씹어 삼켜보고, 오랫동안 간직해야 하는 것들은 어떻게든 기록하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달리지 말고, 여기까지가 너의 2025년이었어,라고 말해주는 시간을 좀 가져보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시교육청 일 끝내고, 최종보고서 쓰고, 발표회 끝나면 1월 15일. 하, 인생.


그래도 배드민턴 3월보다 나아진 나 자신 칭찬해, 필라테스 50회 끊고 아직도 20회나 남아있는 거 반성해, 매주 수요일 나는 솔로 챙겨보는 꾸준함 칭찬해, 중고등부 교사 하면서 중학생들이랑 잘 노는 거 칭찬해, 도파민 중독돼서 게임 5개 깔고 돌리는 거 반성해, 일단 내일 하루도 잘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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