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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무늬 Dec 18. 2019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픽션에세이] 그런사람이있었다

그 애와 헤어지고 이틀 내내, 온동네 술이란 술은 다 퍼마셨더니, 속이 영, 말이 아니다.

오늘 아침, 가족들의 식사 메뉴는 김치찌개였는지, 

가스 렌지 위의 냄비 바닥엔, 김치찌개의 흔적만, 남아있다.

그나마 밥통엔, 쌀 한 톨도 보이질 않는다.


근처에서 자취하는 친구집에 가, 라면이나 하나 얻어먹을 양으로

냉장고에 있던 소주 한 병을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달랑달랑 들고 나왔는데

날은 어찌나 추운지, 바람 때문에 눈물이 저절로 날 지경이다.


지난 이틀 동안, 세상 다 산 놈처럼 술을 마셔대며,

울고 짜는 모습을 다 지켜본 친구라, 살짝 얼굴 보기 민망한데,

그래도 어떠랴 싶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며, 당당하게 외친다.

“라면 하나 끓여봐라!”

예고 없던 그의 방문에, 친구는 그냥 멀뚱-하게 그를 보다가, 

말없이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친구가 보다가 덮어놓은 만화책을 뒤적뒤적...

뭘 또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는 또 친구에게, 그녀와의 이별 얘기를 꺼낸다.

“야! 사실대로 말해봐. 너도 걔 별로였지?

 왜 접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니가 그랬잖아. 걔가 나한텐 과분하다고-

 그거 사실은, 그 반대였던 거지? 그치? 그래.. 역시 내 친구다-

 야! 나 걔한테 차인 거... 아니 헤어진 거, 잘 한 거지?”


괜한 소리라는 걸 아는지, 친구는 대답이 없다.

“야! 나 소개팅 좀 시켜줘! 다음 주에 당장. 어? 어? 

 왜 말이 없어? 너도 나 무시하냐? 그런 거야? 어?”


괜한 응석을 친구에게나 부려보면서, 

말은 이렇게 해도, 이렇게 뻔뻔하게 굴지 않으면, 버틸 힘이 없어서라는 걸,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녀석만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


막 끓기 시작한 물에, 라면 봉지를 뜯어 넣으며, 그는 참던 말을 기어이 꺼낸다.

“내 친구지만, 너 진짜 꼴 보기 싫다.

 너 그 애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냐? 이제 겨우, 3일 됐거든?! 

 날짜로 치면 3일이지만, 시간으로 치면, 이제 겨우 50시간 조금 넘은 거라구-”


잔소리로 들리는지, 친구는 읽지도 않는 만화책만, 뒤적거리고 있다.

“웃기는 자식... 너 걔랑 사귈 때, 진도 빨리 나간다고 좋아하드니...

 헤어지고 나서도 빠르네? 벌써 다 잊었냐?

 차라리 사내자식이지만, 울고 짜고 하는 건, 내가 다 받아준다.

 얼마든지 그래도 괜찮아. 근데 뭐? 소개팅? 미친놈-”


친구는 아예, 만화책을 얼굴에 덮고는 드러누워 버렸다.

다 끓인 라면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며, 그는 하던 말을 이어간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 남자들이 다 싸잡아서 욕먹는 거야.

 헤어진 지 이틀 만에 소개팅? 그런 말이 나오냐?

 그게 3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야?”


그제야 얼굴에 덮힌 만화책이 들썩들썩... 

‘그래. 자꾸 아파라. 자꾸 아파야, 상처도 빨리 덧나는 법이다...’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친구의 허리께를 발로 툭툭 친다.

“일어나. 울 땐 울더라두, 라면이나 먹구 울어.”


후루룩- 라면과 눈물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친구를 보며, 그는 미안해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쉽게 생각해버리지 않으면 못 견딜것 같은 친구의 마음쯤, 그도 안다.


사실 그는, 친구의 이별에서, 오래전에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자꾸 쉬워지려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던 것./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별이란 게, 빨리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신호쯤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지금도 가끔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친구 녀석만큼은, 자신처럼 지난한 이별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으면 해서...

그는 정말로, 이번 주말 쯤, 친구의 소개팅을 주선해 볼 생각이었다.


>>


이별하고도 이별하지 못하니, 시간이 흘러도 어두운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아,

차라리 그 때 다 떨쳐냈더라면 더 좋았을...

그런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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