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1.
어제 폰트러리 모바일 버전 완성을 기념하며 그 과정과 느낀 점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올리다 보니 몇 해 전 뉴욕 여행이 생각났다. 그때 한창 해외취업병이 걸려서 (영어도 못하잖아!) '해외에선 어떻게 일하는지, 어떻게 하면 해외 취업할 수 있을지 당장 가서 확인하자!'라는 무모한 생각이 앞섰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모한 생각 덕분에 단체여행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혼자 해외 자유여행을 해보게 되었고, 그 무모한 생각 덕분에 용기를 가졌고 많은 걸 느끼는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돌아와서 여행경비를 메우느라 고생한 거 빼면 결과적으론 다 좋았다.
2.
좀 더 디테일한 썰을 풀어보자면 정확히는 3년 전인 2014년 가을, 내가 20대의 벼랑 끝을 달리던 때였다. 사내에서 일 좀 한다는 소리를 꽤나 듣고 있었고 칭찬에 취해 앞에서는 '에잇- 저따위가 무슨요...'라고 가증스럽게 겸손을 떨어댔지만 속에선 '내 꿈을 이루기엔 이 업계는 아니야! 헬조선을 탈출해서 글로벌한 인재로 거듭나 더 큰 꿈을 이뤄야겠다'는 믿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 지금 생각해도 무슨 똥배짱이었나 싶다. 영어도 못하면서.
그렇게 근자감에 쩔어 해외취업에 대해 몰래몰래 알아보던 중 이렇게 국내에서 깨작된다고 뭐 되겠나 싶은 생각 반, 그때가 4월이었는데 생일을 기념하여 올해도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 통큰 선물 하나 하자는 생각 반이 섞여 어느새 나는 뉴욕행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혼자는커녕 친구와도 자유여행 한번 해본 적 없었고(전부 단체여행만 다녔다) 약간의 영어 울렁증과 함께 만년 초급 레벨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여행자금으로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오로지 '뉴욕 가자!'라는 생각만 탑재된 상태였달까. 바로 출발했다면 국제미아 되기 딱 좋은 조건이지. 요즈음은 뉴욕보다는 샌프란시스코를 더 많이 갈지도 모르겠지만 행선지를 뉴욕으로 정한 건 단순히 내가 대학시절부터 워너비로 뽑았던 디지털 에이전시인 'fistborn'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 어떤 점에선 대학시절의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겠다.
다행히도 비행기 티켓을 11월로 끊어 6-7개월의 준비기간을 확보하는 일말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일단 비행기 티켓은 카드 할부로 시원하게 긁었고 나머지는 남은 시간이 아직 많으니까 그 사이에 준비하고 경비를 모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 내 생각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당연히 티켓팅한 다음부터 일이 휘몰아쳐서 그야말로 눈감았다 뜨니 출국날이었다.
3.
무식하게 시작한 무계획 여행이지만 그래도 목적 달성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인지 뉴욕 에이전시 탐방을 위한 준비는 출국 3-4개월 전부터 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나의 대학시절 워너비 'firstborn' 사무실 탐방을 위해 박준용 CCO 님의 연락처를 구글링 하기 시작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페이스북을 찾는데 어려움은 크지 않았는데 막상 찾고 보니 거절당하면 어쩌나 불안해졌다. 그렇게 몇 날 며칠 고민을 거듭하다가 거절당하면 그냥 뉴욕 여행 다녀온다 생각하면 된다고 긍정 파워를 쥐어 짜내며 구구절절하게 장문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대학 때부터 꿈에 그리던 곳이라고, 이번에 뉴욕 가는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답이 없어서 살짝 시무룩해지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흔쾌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후 또 똥배짱이 발동해서 이왕 가는 거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자 싶어 CA 콘퍼런스에서 뵈었던 구글 크리에이티브 랩 소속의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분께도 메시지를 보내고, 뉴욕에서 광고기획을 하고 계시는 분께도 연락을 했는데 모두들 너무도 흔쾌히 승낙을 해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렇게 틈틈이 질문할 것들을 리스트업하고 이왕이면 포트폴리오도 보여줘야지 싶어서 야근과 철야에 찌들었어도 자는 시간을 쪼개어 부랴부랴 작업물을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그분들을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경험했지만 여행 후 해외취업의 꿈은 보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분들은 정말 멋있었지만 돌아와서 생각하니 그저 해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환경에서 긍정적인 아주 일부분만을 보고 환상에 취해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글로벌한 인재가 되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일까를 스스로에게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마음에 확신이 없었다.
도전한다고 바로 될 것도 아니었지만 된다고 해도 이 상태로는 그때의 내 상황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만 같아 보류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나의 해외취업병은 치료되었다.
4.
다시 생각해보면 해외 디자인 업계 사람들을 만난 것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내게 가장 큰 의미였지만 뉴욕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는 것 중 한 장면은 여행 마지막 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풍경이다.
그날은 뉴욕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고 뉴욕 여행에서 하고 싶었던 리스트 중 마지막인 야경관람을 즐기고 있었다. 해지기 전에 올라가서 해가진 후의 야경까지 보는 게 정석이라는 말에 꽤 오랜 시간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머물렀는데 점점 노을이 지고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는 맨해튼의 건물을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흘러버린 2주란 시간이 아쉬웠고 왠지 모를 짠함에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어떤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동성 커플의 프러포즈였는데 아마도 프러포즈를 준비한 남자가 아는 여자에게 노래를 부탁했던 모양이었다. 무반주로 울려 퍼지는 노래에 주변은 고요해졌고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반지를 내밀며 청혼을 했다. 청혼을 받은 다른 남자는 가슴이 벅찬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몰라하며 연신 오 마이 갓을 읊조렸다. 그리고 청혼을 받아들이자 둘은 키스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동성을 이성처럼 좋아한다는 게 내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기에 마음으로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말 그건 취향의 문제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마음이니까. 그래도 동성커플이라고 하면 조금 신기한 감정은 있었는데 그날 그들을 보는데 전혀 이상하거나 신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행복해했고 그런 그들을 위해 사람들은 박수를 쳐줬다.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던 건 아마도 조용히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와 붉은 노을로 물든 뉴욕의 전경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나도 왠지 행복에 물드는 것 같아 나도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5.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30대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때 뉴욕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더 이상 하나하나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흐릿한 감정과 분절된 몇 가지 에피소드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때의 여행은 현재의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큰 용기를 낸 여행이었고 그 후로 상황이 별반 나아진 건 없지만 생각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후로 해외 자유여행도 별거 없구나 생각하게 돼서 더 자주 여행을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기도 하고.
하지만 언제 또 그런 막무가내 여행을 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