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 Jun 05. 2017

안녕, 언니네 이발관

2017년 6월 5일

1.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느 사춘기 청소녀들과 마찬가지로 남자 아이돌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대학 때까지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엄청난 덕질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 시절 누구나가 했던 시디+테이프 사기, 잡지 사서 타 팬과 교환하기, 엽서 사진 등 굿즈 모으기, 방송 챙겨보기, 지방 공연 오면 보러 가기 등 건전하게 팬질을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면서 본격적으로 입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좋아했던 아이돌 2팀이 순차적으로 해체를 맞이하면서 나의 오랜 팬질도 시들해졌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특히나 애정 했던 멤버의 면면을 살펴보면 잘생김은 기준이 아님이 확실한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사춘기에 접어들었고 그에 걸맞게(?) 듣는 음악 스타일도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돌 노래의 가사를 줄줄 읊어대던 나였지만 '이제 그런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인디음악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당시 내 친구들 상당수는 국내 아이돌의 팬질을 떠나 일본 아이돌 팬질에 몰입하던 시기였고(마츠모토 준이라던가, 야마삐라던가...) 그래서 제 2 외국어로 일본어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런 것에 관심은 없었다. 그때 한창 듣던 곡들이 델리스파이스, 크라잉넛 등 인디 1세대 밴드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언니네 이발관'이다.


2.

내가 처음 접한 언니네 이발관의 곡은 '헤븐'이었다.(젊은 시절의 룡자가 무려 뮤비 주인공이시다) 아마도 그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밝은 노래가 아닐까 생각된다.


언니네 이발관 6집 - 이능룡


3.

나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노래보다 80-90년대의 노래를 좋아한다. 말 그대로 음악을 들으며 '음미'할 수 있는 노래들 말이다. 언니네 이발관도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의 가사를 '음미'하며 수험생활을 보냈고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서울에서 언니네 이발관 공연을 보는 것이 인생의 to do 리스트 중 하나였을 정도로 좋아했고 고등학생-대학생 시절에 어지러웠던 인간관계로 인해 암울기에 접어든 내게 그들의 노래가 힘이자 위로였다.

내가 서울로 취업하던 해에 5집이 발매되었고 그 해 겨울 연말 콘서트 티켓을 거머쥐게 되면서 to do 리스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석원은 마침 그 해에 불혹의 나이에 다가섰는데 공연장의 앙코르 함성에 다시 나왔을 때는 '40'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그 전에는 '화난 거 아니'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신년 카운트 다운을 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5집 발매 이후 6집 소식은 계속해서 연기되었고 결국 8-9년이 흐른 올 6월 1일에서야 발매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다. 해체는 아니라며 공연 가능성은 열어두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그 마저도 불투명해 보인다.


4.

언니네 이발관은 5집에서 6집으로 넘어가는 공백기에 접어들었지만 이석원은 작가로서 책을 세권이나 발간했고 이능룡은 영화를 찍고 음악감독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나는 사춘기에 못다 이룬 덕질을 뽐내며 이석원의 책이 발매되자마자 초판으로 모두 사들였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사인회를 따라갔으며 절친 나르봉의 응원에 힘입어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독자모임에도 당첨되어 바로 옆에서 이석원을 만나 밥을 함께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이석원이 가장 최근에 발간했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는 사인만 4개가 있다.(이석원은 사인회 때마다 앨범도 가져오면 사인을 해줬는데 정작 나는 앨범 챙기는 걸 까먹어서 앨범에는 사인 하나 없다... -_-...)


언니네 이발관 6집 - 이석원


5.

5집 '가장 보통의 존재'가 발매되고 1년 후 이석원은 첫 산문집을 발간했는데 공식 사이트에 올리던 그의 일기를 엮어 만든 산문집이었고 그게 스테디셀러가 된 '보통의 존재'다. 그 책은 혼자서 낄낄대다가 또 찔찔 짜다가를 반복하며 읽었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의 책이 되어 심적으로 힘든 시기에 반복해서 읽다 보니 때가 끼고 너덜너덜해져서 제본이 뜯길 지경에 이르렀는데 '보통의 존재'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양장본이며 블랙 에디션이 출간되어 양장본으로 한 권 더 소장하고 있다. 그 후로도 이석원은 1권의 소설책과 1권의 산문집을 더 출간했고 재밌게 읽긴 했지만 '보통의 존재'만큼 내게 와 닿지는 않았다.

아직도 정신적으로 힘든 때에는 그들의 앨범 전곡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틀어놓고 '보통의 존재'를 읽는다. 여전히 낄낄대고 찔찔 짜면서.


6.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발간하고 출판사에서 독자모임 이벤트를 한다며 나르봉이 URL을 하나 보내줬다. 마감 바로 직전이었고 '이게 될까' 의구심에 포기하려 했지만 손해 볼 건 없어서 일단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당첨. 그 해의 운은 모조리 다 끌어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자연스레 언니네 이발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석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던 어떤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상처라는 걸 알게 되면서 마지막이라는 이야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마지막이냐고 따져 물을 수 없었다. 그냥 온 힘을 다해 만들어낼 그들의 마지막 앨범을 팬으로서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언니네 이발관 6집 - 전대정


7.

내가 들어본 6집은 전체적으로 지난 23여 년 간의 여정이 고통이었기에 이제 마지막을 고하며 그 외로웠던 길을 함께 걸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 느껴졌다.(이번 앨범도 역시 한곡 한곡마다 장문의 앨범 작업기를 통해 설명을 했기 때문에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 6집 수록곡 중 아이유가 피처링한 '누구나 아는 비밀'이라는 곡이 있다. 그 곡의 가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그게 바로 영원이야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

중요한 건 지금이야 바로 지금 우리 여기 이곳


사랑이란 이 노래 보다도 짧아

그럴 땐 자꾸 부르면 되지

-

나는 또 우울해지고 힘들 때면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를 들으며 '보통의 존재'를 읽어나갈 거다. 그들의 여정이 끝났지만 자꾸 부르면 되니까.


8.

나도 고마웠어요. 위로가 되어주어서.

굿바이, 언니네 이발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