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떠나 눈 속 세상을 탐험하는 환상 여행을떠난다. 길은 아득하고 끝없이 이어진다. 생각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지만 몸은 번잡한 도심을 떠나 티 없이 순수한 자연의 품에 안긴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눈을 어마어마하게 만나는 경험은 난생처음이다. 질리고 물리도록 눈 속을 헤매며 원 없이눈을 구경했다.
운탄고도 트레킹에 나선 길이다. 운탄고도는 석탄을 나르던 길에서 비롯된 명칭이고 영월, 정선, 태백, 삼척을 아우르는 폐광지역을 걷는 트레킹이다. 이번 여정은 운탄고도 1330 5길 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온 나라가 폭설로 몸살은 앓고 있어 강원도로 가는 행사가 취소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전 7시에 출발한다는 연락에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필히 아이젠과 스패치를 지참해야 한다고 해서 종로 오가에 있는 등산용품 시장에 들러서 준비를 마쳤다.
폭설이 내렸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뉴스에서만 보았던 진짜 폭설을 제대로 경험했다. 눈구덩이에 빠져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겪고 맛보았다.
해발 1,330미터의 만항재가 트레킹의 시발점이다.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려와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한겨울의 중심에 들어선다. 눈이 지배하는 새로운 영역에 떨림을 안고 입장했다. 천지가 눈으로 경이롭지만 숲에 빚어진 광경이단박에 눈을 사로잡는다. 죄다 눈이 점령한 가운데 나무도 그에 걸맞게 완전히 변모했다. 겨울 왕국의 일원으로 온몸을 눈과 얼음으로 치장한 것이다. 눈이 쌓이고 녹았다 얼어버린 과정의 결과다. 나무에사슴뿔 장식이 생겼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없이 많은 뿔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마다 달린 듯 놀라운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이젠과 스패치로 무장을 하고 운탄고도를 걷는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향해 들어선다. 눈이 만들어낸 풍경에 매혹되어 정신이 없다.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숲 속에 요정이 툭 하고 바로 튀어나올 것 같다.
순백으로 덮인 관목의 여리고 촘촘한 가지가 세심하게 조각하고 다듬은 공예품처럼 숲을 빛낸다. 가을 숲에서 볼 수 없었던 숨겨진 매력이다. 잣나무와 소나무의 솔잎에도 크리스털 장식으로 한껏 치장을 했다. 순수한 자연에 젖어 마음도 하얗게 물든다.
풍경에 취해 한참을 간다. 내리막 길이라 길에는 눈이 여전하지만 나무들은 평범한 겨울로 갈아입었다. 만항재에서 좀 더 머물러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깊은 산중이지만 멀리 보이는 경치는 기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벌목 작업을 한 흔적도 보이고 산세도 생각보다 평범하다. 계속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눈에 띄는 장면이 없다. 그러다 풍경 하나가 눈길을 끈다. 회화처럼 굵은 선으로 윤곽을 선명히 그린 중첩된 산의 경치가 들어온다. 나무에 시야가 가려 전망이 좋은 곳을 찾아 제대로 된 경관을 사진에 담는다. 그림 한 점을 얻은 기분이다.
행로는 오르내린다. 확실히 오르는 길에는 호흡이 가빠진다.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걷는 것이 평지보다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아무리 밟아도 순결함 그대로인 깨끗한 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습기를 머금지 않은 눈은 마구 밟아도 흩어질 뿐 다져지지 않는다. 내린 모습 그대로 정결하다. 떼는 발걸음마다 정신이 맑게 깨어난다. 지칠 법도 하지만 비슷한 것 같아도 조금씩 달라지는 주변 경관과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계속 길을 간다.
오롯이 자연을 만나고 싶은 욕심에 일행을 제치고 앞장을 선다. 누군가가 먼저 걸은 흔적을 따라 걷지만 그위에도 눈이 쌓여 새로운 자취를 남기며 걷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멋진 풍경을 맨 먼저 만나는 기쁨은 덤이다. 사진에 담느라 마음이 바빠도 좋은 사진을 찍고 싶은 열망에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이 시린 줄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곳도 모두 다 절경일 수 없다. 단조로운 풍광도 많이 지나친다. 하지만 청정의 자연 속을 소요하는 건강한 시간의 소중함을 무엇과 비할 수 있으랴.
감사하게도 트레킹 막바지에 만항재에서 보았던 절정의 설경을 다시 만났다. 전망대에 오르는 길로 고도가 높아서인지 크리스털로 덮인 숲이 우리를 맞는다. 적설량이 많아져서 걷는 것이 힘에 부친다. 하지만 보고 즐거운 눈은 생기가 넘쳐 힘든 몸을 이끈다.
정말로 눈을 실컷 구경했다. 구경만 아니라 눈 속을 헤치고 지치도록 걸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아이젠과 스패치 덕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마음껏 다녔다. 동심으로 돌아가 몸과 마음이 가볍고 자유롭다. 4 시간을 넘게 걸었다. 힘든 여정인데도 80이 가까운 연배에 끄떡없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는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마음은 깨끗해지고 몸은 단련이 되는 숲 속의 한나절을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