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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덕유산 설경

화창한 날에 찾은 덕유산 정상의 풍경

by 정석진

비 온 후 다음 날, 덕유산을 가는 일정이 탐탁지 않았다. 설경을 볼 요량으로 신청했는데, 볼 수 없을 것 같았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야 하는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밤에 합창단원들과 회식을 늦은 시각까지 했다. 당연히 취침 시간이 밀렸고 잠자는 시간이 부족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다.

이런 망설임을 뒤로하고 산행을 간 이유는 독서의 영향이었다. 자연예찬이라는 책을 읽었다. 숲길을 걷는 중요성을 설파한 내용이 담겼다. 현대인들이 스트레스와 질병에 시달리는 이유가 자연 결핍에 있고 이를 해소하려면 숲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덕유산 설경을 보지 못하더라도 자연 속 숲길을 걸을 수 있기에 주저함 없이 이른 새벽을 깨치고 덕유산으로 향했다. 교대역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창 밖으로 깜깜했던 하늘이 발그레하게 물들며 동이 터온다.

등반은 무주리조트 스키장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는 것을 시작으로 향적봉과 설천봉을 거쳐 백련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8킬로미터가 조금 넘은 여정이다. 오전 10시에 리조트에 도착했다.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스키장 입구에서 바라보는 봉우리에는 기쁘게도 눈이 남아있다. 스키장의 설원 위를 달리는 청춘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무주리조트 스키장

케이블카에 올랐다. 편도 비용이 1만 7천 원으로 꽤 비쌌다. 스키장을 옆에 두고 오르는 길이 꽤나 길다. 이 길을 걸어서 오르려면 힘들 것을 생각하니 비싸다는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너무도 편안하게 산 정상에 다가갔다. 괜히 미안해진다. 원래는 걸어서 올라가고 내려올 때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 좋은데 40여 명이 식사할 식당이 변변치 않아 불가피하게 선택한 코스였다.

케이블카

케이블카 내리는 곳이 스키장의 슬로프가 시작되는 곳이다. 곧바로 아이젠을 등산화에 착용하는 데, 단단하게 조이려다 그만 줄이 끊어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한쪽만 부착하고 눈길을 걷기로 했다. 산 지 오래되어 고무가 삭아버린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상은 스키장의 눈 외에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산아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한겨울 모습이다. 화창한 푸른 하늘 아래로 흰 설원이 더욱 빛난다. 까마득한 높이의 슬로프가 아찔하다. 나 같은 스키 초보는 겁이 나서 못 내려갈 것 같다. 길게 이어진 슬로프 너머 눈을 얹은 연봉이 구름 사이로 아스라하다.

흰 눈 위로 고사목과 푸른 전나무가 섰고 발치에는 수정 같은 얼음이 달린 관목들이 자리했다. 향적봉 오르는 길에는 고도로 인해 설화가 만발한 숲길이 시작된다. 오른쪽에는 설산을 필두로 굽이굽이 산봉우리가 이어지는 탁 트인 시야가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안긴다. 산마루에서 누릴 수 있는 쾌감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환상이다. 나뭇가지마다 햇빚에 반사되는 얼음 결정이 황홀하게 빛난다. 눈꽃과 또 다른 수정같이 맑은 영롱함이다. 눈이 녹으며 곧바로 얼어버린 형국인데 처음 보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기암에도 눈과 얼음이 덮여 검고 흰 대조가 색다른 느낌이다. 갑자기 쏟아진 선물더미에 정신이 없다. 한쪽 발에만 채운 아이젠이라도 눈길을 오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다행이다.

정상은 오히려 평범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고 암석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섰다. 멀리 보이는 경치가 차라리 낫다. 사방을 한 번 휘 둘러보고 하산을 했다. 두텁게 눈이 쌓인 길에 표면이 녹아서 아주 미끄러웠다. 아이젠 없이는 매우 위험한 길이다. 스틱과 한쪽 아이젠만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양지바른 곳이라 바닥에만 눈이 있고 나무에는 눈의 자취가 사라졌다.

정상

숲 사이로 보이는 산등성이가 대조를 이룬다. 능선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눈으로 덮여 있지만 남쪽은 눈이 없어 아수라 백작의 얼굴의 형상이다.

눈 구경은 이제 끝났구나 하는 시점에 감사하게도 절정의 눈꽃의 향연이 또다시 펼쳐진다. 온 사위가 눈으로 옷을 입었다. 새파란 하늘 사이로 눈부신 흰꽃이 마법같이 피었다.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환상이다. 기하학적인 선들로 화폭을 가득 채운 그림 같다. 순백과 청정이 빚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나무에 따라 눈꽃도 달리 핀다. 철쭉 같은 관목에는 그물처럼 촘촘한 그림이고 참나무 같은 교목에는 춤추듯 자유스러움과 여유가 묻어난다. 각양의 눈꽃에 눈이 즐겁다.

한동안 계속되던 눈의 나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계단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내려가는 길이 확실히 힘들다. 점차 계곡 쪽으로 들어서니 물소리가 들린다. 숲 사이로 기와지붕에 눈을 얹은 가람이 비친다. 백련사다. 암자가 숲을 배경으로 단아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매혹적이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을 옆으로 푸른 하늘에 노니는 구름과 설봉을 눈에 담는다. 고요함이 물씬 풍긴다. 가장 마음을 끄는 풍경은 눈 덮인 기와지붕과 배경이 되는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다. 묘한 조화가 멋스럽다.

백련사

계곡의 물소리가 백련사를 휘감는다. 구천동 계곡은 눈 녹은 물로 요란하다. 소음일 법한데도 시끄럽지 않으니 신기하다. 자연의 소리가 주는 힘이다. 얼음장을 뚫고 힘차게 흐르는 기운찬 물줄기가 겨울이 다했다는 외침 같다. 산이 깊으니 골도 깊은가 보다. 수량이 아주 풍부하다. 폭포와 작은 담들이 다채로운 구천동 계곡이다.

구천동 계곡

하산하는 길에 바람이 부드럽다. 계곡의 상쾌한 물소리도 이어진다. 하늘은 티 하나 없이 푸르고 해는 따스하게 빛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전나무 숲길을 거니는 행복감이 밀려온다. 오기를 참 잘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자연의 품이 참으로 넉넉하고 푸근하다. 봄기운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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