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속리산 등산을 앞두고 비가 온다는 예보에 마음이 흔들렸다.
"겨울비를 맞으며 굳이 산에 올라갈 이유가 있을까? 환절기에 감기라도 걸리면 고생할 텐데.
요즘 감기는 좀 독해야 말이지." 가지 말아야 할 핑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찾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계획한 대로 꿋꿋하게 산행을 가기로 했다.내심 비는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당일 산행을 위해서는 오전 7시에교대역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하기에 미리 알람을 맞춰 두었다. "아뿔싸! 일어나 보니 5시 50분이 아닌가!" 너무 곤히 잠들었던지, 알람이 제대로 설정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약속을 지키려고 정신없이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가는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일단 최단거리 전철 탑승을 위해 택시를 타고 역에 내리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서 전철을 탔다. 가는 내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극적으로 6시 59분 59초에 버스에 올랐다. 산행 시작부터 힘들게 세상을 떠나 산으로 향한다.
오늘 산행은 법주사에서 문장대를 다녀오는 코스로 약 14킬로미터 거리를 4시간 동안 등반한다. 주봉인 천황봉은 폭설 여파로 입산 통제 중이다. 정상 부근에는 눈이 남아서 아이젠도 가져와야 했다.
현지에 도착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날은 흐렸지만 산을 오르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들어선 산은 여전히 겨울 모습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봄의 자취를 찾아보지만 잎 진 나무들로 여전히 스산하다. 찬 바람이 불지 않아 껴입은 옷이 거추장스럽다. 곧바로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뜻한 몸과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언제나처럼 마음이 설레고 들뜬다.
산길이 마냥 단조롭지 않은 것은 늘 푸른 나무들이 있어서다. 앙상한 갈색 겨울나무 사이로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가 생기 있는 푸른 잎들로 우리를 반긴다. 이곳은 특히 미인송들이 심심치 않게 자란다. 단정하고 규칙적인 수피가 붉은 고운 빛을 머금고 굵은 몸통이 늘씬하게 빠진 소나무가 아름답다. 푸른 솔잎들도 그에 한몫을 하고 있다.
새소리도 심심찮게 들려 반갑다. 적막이 주는 정서적인 평안도 있지만 자연의 살아있는 소리는 마음을 정화해 주는 기능이 있다. 어떤 새가 지저귀는지 궁금하지만 찾기도 쉽지 않고 얼른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몸집이 아주 작은 새들이 일반적으로 맑고 고운 음성을 지닌다. 산새 소리는 생태계의 건강을 알리는 척도다. 많은 새들이 깃들여 사는 숲이 건강하다. 귀 기울여 보면 각기 다른 새들이 노래하고 있다. 화려한 곡조도 들리고 단조로운 가락도 있다. 이왕이면 오감을 열어 자연을 즐기며 걷는다. 폭설로 뽑힌 소나무들이 잘려 솔잎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밟을 때마다 소나무의 향기가 진하게 감돈다.
산자락에 큰 암석이 많이 포진해 있다. 마치 트롤이 웅크리고 있는 듯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첩첩이 포개놓은 것 같은 큰 기암들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산 전체가 돌로 구성된 산의 모습이다. 여기에 소나무가 자라나 잘 어울린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시원한 물소리가 따라온다. 산이 깊으니 골도 깊다. 물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질리지 않는 자연의 음향이다.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물길 따라 흰 포말을 일으키며 기운차게 흐른다. 물빛은 누런 암석들로 인해 푸르러 보이지 않는다. 잔잔한 수면이 머무는 작은 소에는 물이 맑다. 고인 물은 탁하지만 쉴 사이 없이 밀려드는 맑은 물이 끓이지 않기에 머물러 있는 듯해도 투명하고 깨끗하다. 중간에 흐르는 땀을 계류로 씻으니 섬뜩한 차가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 목욕소와 세심정이 있다. 속세를 떠나왔으니 맑은 물로 몸과 마음을 씻으라는 것이다.
목욕소
세심정
한참을 산을 오른다. 올라가는 길목마다 넘어진 나무들이 보인다. 큰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처참하게 가지가 부러졌다. 자연이 지닌 거친 힘을 느낀다. 산마루에 다다르니 북쪽을 향한 산기슭에는 눈이 여전히 남아있다. 남사면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걸어가는 길목에도 눈이 있다. 정상에 가까이 오른 것이다. 꽤 쌓인 눈이라 내려올 때는 아이젠이 필요할 듯하다. 앞만 보고 마냥 걷다가 뒤돌아 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멋진 풍광이 자리하고 있다. 밑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가 힘들여 산을 오르는 이유다.
마침내 목적지인 문장대에 다다른다. 문장대는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운장대로 불리다 세조가 신하들과 시를 읊었다고 문장대로 바뀐 것이다. 전체가 암석으로 된 둥그런 봉우리다. 입구에 우람한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하늘로 수직하고 있는 나무들이 장대하다. 갑자기 전나무 가지가 우지직 꺾이며 얼음과 부러진 가지가 함께 쏟아진다. 나무 밑에 있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겨울철에는 큰 나무 밑을 조심해야 한다. 아름드리나무를 쓰러뜨리는 폭설의 거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대에 올라 탁 트인 사방을 돌아보는 쾌감을 누린다. 굽이치는 산자락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눈이 아주 시원하고 가슴도 상쾌해진다. 북쪽에는 눈 쌓인 산봉우리가 아직도 겨울이다. 흰 눈과 암석과 소나무가 빚는 설경이 빛난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즐기는 겨울의 풍광이 아닐까 싶다.
내려갈 때는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데, 입산 통제로 온길로 다시 가야 한다. 산 정상에 눈발이 날린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내려갈 때는 오를 때보다 수월하다. 인생길을 가며 고난이 닥칠 때는 힘겹고 무사태평할 때는 편안하듯 내려가는 길은 여유롭고 느긋하다. 한참을 내려가니 눈은 점차 비로 바뀐다. 가는 비라 걷는데 큰 지장이 없다. 낙엽 위로 떨구는 빗방울의 톡톡톡 이어지는 소리가 정겹다.
등산길 끝자락에는 천년 고찰 법주사가 있다. 우리나라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 석련지, 쌍사자 석등 같은 국보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금동미륵대불도 눈길을 끈다. 푸근하고 넉넉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멀리 산자취가 아련한 아래 고즈넉한 가람 풍광이 마음에 깃든다. 가랑비가 뿌리는 음울한 날이지만 오히려 고요한 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선명한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멜랑코리 한 분위기는 괜찮아 보인다.
법주사
팔상전
금동미륵대불
쌍사자석등 /석련지
시작은 힘들었지만 자연에 안겨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 몸은 곤해도 마음에는 활력이 솟는다. 하산해서 먹었던 약초 밥상에 몸의 건강도 덤으로 챙겼다. 땀을 개운하게 씻어낸 싸우나로 몸이 노곤하다. 상경하는 길에는 단잠이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