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무게로 봄비가 내리는 날이다. 거의 여름날같이 치솟은 전날의 고온을 식히려는 듯 비가 온다. 우산을 쓰고 걷는 하늘은 잔뜩 흐려 우중충하다. 하지만 주변은 전혀 딴 세상이다. 봄비가 반갑고 즐거운 나무와 꽃들은 생기가 넘친다. 그 들뜬 분위기가 주위를 물들여 환하다. 초록빛으로 성장한 나무들과 한창 피고 있는 철쭉의 빛깔이 선명하게 빛나는 까닭이다. 비 오는 날은 흐린 날이라는 사고는 꼭 들어맞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시내에서 약속이 있어 전철을 타러 간다. 늘 간당간당하게 나서는 버릇이 있는 데, 오늘은 서둘러 나와 모처럼 발걸음이 여유롭다. 시내를 오가며 한동안 교통카드가 인식이 잘 안 되어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애를 꽤 먹었다. 카드를 교체한 후라단번에 통과를 하니 기분이 좋다. 별 것 아닌 작은 일에도 불편을 겪다가 편한 이유다.
전철 노선에서 사고가 있었는지 열차 지연 안내를 하고 있다.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전철이 연착이 될 줄 알았는 데, 다행히 곧바로 탈 수 있었다. 가야 할 구간이 길어서 책을 읽고 싶어 빈자리가 있었으면 했지만 전철 안은 승객들로 붐벼 서서 가야 했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에 젊은 외국인이 앉아 있다.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아닐 수 없다. 괘씸한 마음이 들다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좌석에는 군인들도 앉아 있었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차 안이 붐빌 때, 한창인 젊은 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운 좋게 자리가 나서앉아서 책을 읽고 가는 중에 전철이역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군인들이급하게뛰쳐나갔다.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시에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던 외국인이 인상을 쓰며 일어난다. 그리고는 옷을 닦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더니 바닥에 노란 토사물이 흐른다. 군인이 차멀미로 토하며 내린것이었다. 꽤 떨어져 있는 내게까지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대로 앉아있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다음 역에서 지긋한 나이의 승객이 들어와토사물을 밟은 채 아무렇지 않게 선다. 의외의 광경에 경악스러웠다.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더럽다는 생각에 자리를 피했는데 아무것도모르니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게 된 것이다.
그때 원효대사의 일화가 문득 떠올랐다. 잠을 자다 깜깜한 밤중에 목이 말라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는 다음 날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역겨움에 토하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난 것이다. 무슨 일이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
비위가 약해 그 자리를 떴다. 그 승객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아연실색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모르긴 해도 그다음 승객도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에 설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