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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석진 Jul 24. 2024

수녀님 생신을 축하드려요!

새로운 인연으로 알게 된 수녀님과 화백님과의 특별한 시간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굳이 맺고 싶어도 닿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생각지 못한 이들이 되려 긴밀히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아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고 만남이 줄면 우리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성공회 성당

직장 은퇴를 한 후, 사람들과 교제의 폭이 줄었다. 직장이 기반을 이루던 알고 지내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관계에서 멀어진다. 그렇다고 소원했던 이들과 가까워지기도 어렵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관계의 폭은 줄어든다. 누구나 겪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 들어 사람들을 새롭게 사귀는 일은 어렵다. 개인에 따라 사림들의 편차도 심하다. 사람들을 사귀는 데는 성격이 한몫을 한다. 활달하고 외향이며 적극적인 사람은 쉽게 사람들을 만난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도 일조를 한다. 다행히 내 성격이 언급한 내용과 비슷하여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꽃범의 꼬리 (성당 뜨락)

그렇게 살다 보니 새로운 인연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 오늘은 특별한 분의 생이다. 요즘은 정보홍수시대라 가만히 있어도 필요한 정보를 알게 된다. 최근에 알고 지내던 수녀님의 생신날인 것을 알고 비슷한 시기에 만난 화백님께 이 소식을 전했다. 두 분 다 일면식도 없던 분들이었지만 그간 교류를 하면서 함께 친해졌다.

그분들은 그간 살아오면서 접점이 전혀 없었던 분들이다.


화백님의 제안으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접대하기를 즐기시는 화백님 덕에 그간 나는 여러 번 식사를 했었다. 녀님은 대학에서 영어 전공을 하셔서 톡으로 대화할 때는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분에 간간이 본의 아니게 영작을 하곤 한다. 수녀님과 소통하는 작은 즐거움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성당에서 수녀님과 화백님을 만나 근처에 있는 파이낸스 센터 지하로 갔다. 수녀님이 일식을 좋아하신다고 고른 메뉴가 우나기동이다. 소녀취향을 가지신 분이 장어덮밥을 좋아하신다고 하시니 의외였다. 백님과 나는 히레와 생선가스가 반반인 메뉴를 시켰다. 음식들을 서로 나눠 먹으면서 즐거운 식사를 했다. 모두가 순수한 사람들인지라 편하게 소통할 수 있어서 좋다. 식사 후, 파이낸스 지하 3층에 가본 일이 없어서 함께 둘러봤다. 오래된 건물답지 않게 관리가 뛰어나 지하층도 갤러리 분위기다. 그곳에 일식집이 있었는 데 화백님이 즐겨가는 맛집이었다.

수녀님의 해맑은 미소

둘러본 식당은 다음에 오기로 하고 프레스 센터에 있는 호화스페이스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갔지만 다음 전시 준비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수녀님이 20층 전망이 아주 좋다고 하셔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20층은 국제회의장과 식당이 있는데, 수녀님이 가끔 행사차 들르시는 곳이라 곧바로 비어 있는 룸으로 들어가 전망을 즐길 수 있었다. 성당전경과 수녀원 그리고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도심 전망을 즐겼다.

프레스션터 20층 전망

다음으로는 프레스센터 지하에 있는 전통 찻집에 들렀다. 내가 아는 곳으로 그분들께  보약 한 사발 같은 십전대보탕을 대접하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차에 곁들여 나오는 간식이 아주 다채롭다. 생밤과 은행 그리고 호박씨와 건포도가 있다. 쓴 십전대보탕과 함께 먹으면 그만이다. 두 분 다 아주 만족해하며 나온 차와 간식을 즐겼다.

십전대보탕

차를 다 마시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수녀원에서 홍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수녀님의 뜻이 있어 다 같이 수녀원으로 향했다. 푸른 잔디 위에 배롱나무가 붉게 피어난 수녀원은 언제나 봐도 아름답다. 화백님과 수녀원 뒤뜰에 조성된 비아돌로로사를 걸으며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에 홍차를 나누었다.

성공회 수녀원

다년간 영국 경험이 있는 수녀님의 홍차는 특별하다. 손수 내려주시는 정성에 홍차를 적당히 우려내서 우유를 더하는 티는 부드럽고 적당히 쌉싸름한 맛이 그만이다. 달달한 간식을 곁들여야 한다며 늘 다과도 함께 낸다. 홍차를 나누며 그간 듣지 못했던 수녀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수녀님이 열 살 때 6.25가 발발하여 당시 교사였던 부친과 모친이 북한군에게 총살을 당해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여동생과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중에 서울 수복 소식을 접하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피란민들은 그대로 남하하는 중이어서 길도 모르고 배도 고파  수원  파출소를 찾아간다. 그곳의 군인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전했더니 소녀들을 딱하게 여긴 군인들은 그들을 영국 수녀들이 세운 고아원으로 보낸다.


고맙게도 고아원에서 그녀들은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았고 그곳에서 자매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수녀님은 공부도 아주 잘했다. 방과 후에는 고아원을 도와야 했기에 학교 밖에서는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학교 다니는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일정 나이가 되면 고아원에서 나와 시집을 가는 것이 관례였는데 수녀님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선생님이 나서서 영어 공부를 할 학생이라고 나서 주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아 여러 나라에 유학을 갈 수 있었으나 자신을 돌봐준 이들의 헌신적인 삶을 자신도 살겠다는 각오로 서강대에 진학을 하여 영문과를 졸업하고 수녀 서품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수녀님의 삶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이야기를 하며 화백님도 그에 못지않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부가 남모르게 봉사와 구제활동을 지속해 왔고 조카를 자신의 자식같이 돌보며 길렀다는 미담을 들려주셨다.


도심투어를 하고 일상을 나누며 식사와 다과시간도 아주 좋았지만 몰랐던 파란만장했던 삶을 듣는 시간은 감동이었다. 심판과 정죄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동정과 사랑이 바로 원천이라는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온 문장이 떠오른다. 멀고 타국으로 건너와 고아들을 부모들보다 더한 사랑으로 돌보고 길러준 영국 수녀님들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이름 없이 섬긴 봉사가 바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었음을 목도한다. 순수한 이들과 함께 교류하며 사는 삶이 좋다. 귀한 인연을 만나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생신 #수녀님 #대한성공회성당 #만남 #인연 #일생 #오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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