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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호영 개인전을 보고

by 정석진

그림을 본다고 하는 일은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 일과 비슷하다. 가보지 못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고 처음 보는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다. 신선한 경험을 만나는 일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서 느끼는 첫 번째 소회는 새로움과 신선함이다. 좀 더 크게 보면 경이를 감각하게 된다. 호기심이 솟아나고 관심이 생긴다. 새것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하지만 늘 완전히 새로울 수만은 없다. 틀림없이 우리가 경험하고 느껴온 것들이 섞여있다. 그런 유사점들을 찾아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다. 오늘도 그림을 만나러 화랑에 간다.


오랜만에 인사동을 찾았다. 근무지 이동으로 거리가 멀어져 찾기가 여의치 않았다. 일과를 마치고 서둘러 화랑을 찾아가는데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너무 시리고 섬뜩하기까지 한 냉기에 머리가 쨍하고 얼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추위 때문인지 평소 붐비던 거리에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상가도 파장한 분위기로 썰렁하다.


화랑에 들어섰다. 훈풍도 반가웠지만 밝고 화려한 분위기가 행복하게 다가왔다. 다채로운 꽃들이 갖가지 색으로 피어나 절정에 이른 꽃밭처럼 화려한 화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밖은 엄동설한이지만 화랑의 분위기는 꽃 피는 봄날이고 푸른 물결 넘실대는 한 여름의 시원한 바닷가였다. 비행기를 한동안 타고 날아 도착한 따뜻한 남쪽나라에 들어선 기분 좋음이다.

이호영 작가님을 만났다. 뵙고서 눈이 커졌다. 여성작가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웃음이 매력적인 남성분이었다.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지레짐작을 했었는데, '이놈의 선입견이란!' 너무 어이가 없어 어설픈 웃음이 나왔다.

이호영 작가님

작가님은 친절하게도 그림에 대해 자상하고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화랑을 찾아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작가님을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귀중한 경험이다.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호기심이 많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설명과 질문이 만나 이야기의 꽃이 곱게 피어난다.

하루 연작

'하루'를 콘셉트로 그린 연작이 전시장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양 쪽 끝에는 온통 까맣게 어두운 그림이 각각 걸려 있고 그 사이에는 정열적인 붉은색이 바탕인 생동감이 넘치는 각기 다른 그림 다섯 점이 자리를 잡았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하루의 여정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님의 설명에 바로 수긍이 갔다. 우리 삶이 90년을 산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따져보면 우리 시간은 하루라는 의미다. 과거나 미래를 살았고 살게 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지금 여기'만이 오롯이 나의 시간일 따름이다.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고 그림을 보니 하루가 더욱 소중해진 느낌이다. 하루를 충실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다섯 작품이 각기 표현하고 있는 시간의 의미가 진지하게 다가온다.

하루 연작 부분
하루 연작 부분
하루 연작 부분
하루 연작 부분
그림 확대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모든 그림 중앙에 검은 숯이 박혀 있다.

작가님의 말은 찬란히 빛나고 있어도 어둠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즐거워도 그 속에는 슬픔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인데, 온전히 다 좋은 것이 좋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빛나는 것이고 불안이 존재하기에 평안이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일지 몰라도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전시 중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절실하게 느낀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그런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늘 평탄하고 잘 되기를 바라지만 삶은 바람대로 살기 어렵다. 고통과 고난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담담히 이들을 수용하고 함께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삶은 더 고요해질 수 있다.


여담으로 검은색 그림의 재료는 커피 찌꺼기였다. 작가님이 요리도 잘하시고 커피도 직접 내려서 재활용하셨단다. 밤의 그림 하부의 고동색으로 보이는 부분은 쇠의 녹이다. 쇳가루를 발라 부식시킨 것이다.

녹은 '하염없음'을 표현하는 작가의 모티브라고 하신다. 소재 하나하나에 작가의 삶과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전시장 다른 한 면을 차지한 큰 화폭의 그림들은 가득히 넘실대는 블루가 시원하고 강렬하다. 흩뿌린 물감들이 마치 일렁이는 파도 혹은 흰 포말 같아 보인다. 어떤 관객이 이 그림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슬픔보다는 가슴이 탁 트이는 광대함으로 대양이 눈앞에 그려지며 자유로움과 시원함이 그려졌다. 작가님은 우주의 빅뱅을 모티브로 그리셨다고 했다. 말씀대로 오묘한 성단의 천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에는 아주 독특하게 빨간 작은 의자가 중간에,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다.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화면에 포인트처럼 주의를 끈다.

의자는 많은 의미를 담는다. 휴식의 자리이기도 하고 초대의 자리이고 기다림일 수 있다.

내게 그림의 의자는 사랑하는 이를 초대하여 편히 쉴 안식의 자리로 보인다. 작가님의 의자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기다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우리 존재의 미미함이 있지만 하나의 주체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을 의자로 인해 깨닫게 된다.


꼬마가 엄마와 그림을 보며 제법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주의를 집중해서 그림을 보고 질문까지 한다는 점이 마냥 사랑스럽다.


감사하게도 화랑주인 정순겸화백이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작가님과 셋이서 식사를 하며 미술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메세나 활동과 관련하여 해외작가에만 집중되어 있는 점을 알게 되었고 토종 작가들을 키우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우리 문화의 힘이 미술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마침 작가님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계시기에 그 첨병이 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꽤 오랜만의 화랑 방문이 주는 울림이 크다.

작가의 분신인 그림을 만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사고와 사유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이호영이라는 예술가를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시간을 통해 알게 된 행복을 가슴속에 소중히 담아 본다.

소품들( 대작에 앞서 미리 작업해 보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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