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화랑을 제 집 드나들듯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나는 장소에 화랑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문화생활의 수준이 확 높아졌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데 눈만 높아지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된다.
사실 나는 그림을 보는 것이 즐겁다. 그림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풍경이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그들을 통해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나와는 다른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여행도 된다. 그런 면에서 화랑을 찾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은 이강용 화백의 개인전을 봤다.
정물 같은 정적인 풍경이 눈길을 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점묘 같은 색의 질감은 역설적으로 여백으로 느껴진다.
잿빛 하늘에 눈송이가 빼곡히 흩날리는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나절 같기도 하다. 혹은 밤이 지나고 어렴풋이 동이 트는 풍경으로도 보인다. 그림들은 고요함을 머금고 사색의 세계로 사람들을 이끈다. 보는 이의 감성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작품이다.
오두막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는 데 작가님의 유년 시절의 마음속 풍경이라고 하셨다. 외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아스라한 추억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노란 오두막
나의 오두막
법정의 오두막 그림은 비움의 미학이 담겨있다. 불필요함을 버리고 최소한의 소유로 삶을 살았던 그분의 발자취가 느껴진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니 그분의 가르침인 무소유가 저절로 떠오른다.
법정의 오두막
소로우의 오두막도 있다. 문명을 등지고 자급자족의 삶을 몸소 살았던 단출한 풍경에서 그분의 정신적인 힘이 전해온다. 다른 시대와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물질을 떠나 마음의 풍요를 누렸던 두 분의 놀라운 삶을 그림을 통해 반추해 본다.
소로우의 오두막
그림들은 구도의 길을 보여준다. 그림은 물감이 아닌 오일 파스텔의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재료 그대로 화폭을 문지르면 짓눌려 퍼지기에 뾰족하고 가늘게 다듬어 공간의 틈을 일일이 채우는 작업이 무한히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 수고의 축적이 결과물이 되어 우리 눈앞에 낯선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도 하루 8시간씩 작업을 하신다고 하니 그 열정이 놀랍다.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인수봉을 그린 작품이다. 대작으로 바위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내면서도 비구상의 느낌이 살아있다. 이 작품에도 작가의 고요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푸른 하늘 아래 아름드리 우뚝 솟은 거대한 봉우리, 산자락은 파도처럼 발아래 물결치고 빛의 반영을 도드라지게 살려 영험한 기운까지 풍긴다. 어쩌면 수양하는 구도자의 우직하고 단단한 모습이다.
인수봉
복수초가 화폭 가득히 담긴 작품은 물감으로 그려져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 세상을 건넌 피안의 세계일까? 북한산 추경을 그린 붉은 톤의 그림도 아주 강렬하다.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완전히 딴 세상을 보여 주지만 굽이치는 낯익은 산자락은 아주 분명하게 이 땅의 산이라고 깨우친다. 태백산을 그린 작품도 압권이다. 눈 쌓인 산자락이 능선을 따라 굽이치고 명암으로 갈린 산의 단면은 추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연이 지닌 숭고함이 넘쳐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북한산
태백산
그림을 둘러보며 시간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감에 비해 까다로운 오일 파스텔의 단순 반복적인 작업은 분명 쉬운 길이 아니다. 작품 제작에 소요되는 한없는 시간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십수 년에 걸친 한결같은 기법의 반복은 남다른 깊이를 낳는다. 그래서 화폭에 많은 형상을 담지 않아도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하지가 않다. 그림이 종교적인 색채마저 띄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