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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겨울산 트레킹 - 계방산

눈이 어린 계방산을 걸었다.

by 정석진

계방산 트레킹에 나섰다. 강원도 평창군에 위치한 산이다. 해발 1,087미터 운두령에서 시작하여 정상 1,577미터를 올라 내려오는 코스다. 구간 거리는 8.5킬로미터로 약 4시간 반을 걷는다. 내린 지 꽤 지나서 눈을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트레킹을 나서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했다. 2호선 종합운동장역에 7시까지 가려면 최소한 다섯 시 5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여유 있게 일어났음에도 오늘도 전철역까지 뛰었다. 몸에 밴 습관의 힘은 참 무섭다.

어두운 새벽에 서울을 출발했다. 희뿌연 하늘이 점차 밝아온다. 중간에 들른 횡성 휴게소에서 선명히 붉은 해를 만난다. 기가 지 않은 날, 자욱한 미세먼지가 선사하는 뜻밖의 선물인 셈이다.

산행을 시작하는 길, 산에는 눈의 자취가 그대로다. 나무에만 눈이 없을 뿐, 길에는 눈이 여전히 남았다. 눈길을 걷는 걸음이 가볍다.

바람이 잠든 산길, 한여름에 냉수를 마시는 듯한 차가운 상쾌함이 밀려든다. 겨울 아침 산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이다. 얼굴은 차갑지만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 기분이 좋다.


아침 햇살이 산자락을 비춘다. 햇빛은 눈물과 웃음을 함께 주는 존재다. 햇살이 비칠 때 눈은 사라지지만 햇빛으로 인해 눈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햇살을 받은 눈 표면에 보석보다 더 반짝이는 신비로운 빛이 빛난다. 그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다.

하늘에서 눈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눈송이가 아니다. 나무에 핀 얼음 꽃송이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다. 얼음꽃의 낙화도 눈송이처럼 아름답다. 바닥에는 얼음꽃의 분신들이 낙엽처럼 눈 위에 수북이 쌓였다. 마치 흰 비늘 같다.

겨울 산은 호젓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주인 없는 빈 산 드는 느낌이다. 얼은 눈으로 인해 눈 밟는 소리가 소꿉친구가 되어 를 따라온다. 겨울 산행에는 필요한 친구가 있다. 어려울 때라야 진정한 친구가 빛나는 법이다. 미끄러운 눈길도, 경사가 심한 얼음길도 이 친구와 함께라면 아무 걱정이 없다. 그와 동행하면 어떤 거칠고 험한 길도 걷기 쉬운 평지가 된다. 아이젠이 주는 라운 효능이다. 귀한 친구 덕에 편안하게 산을 오른다.


오르막길이 이어져 가쁜 호흡로 몸이 덥다. 데워진 몸을 찬 공기가 밀려와 몸을 식힌다. 고요한 산길에 얼음 밟는 소리만 따라오더니 가빠진 호흡 소리도 함께 산을 오른다.

꽁꽁 언 눈 속에서도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는 씩씩한 조릿대가 보인다. 무채색이 다스리는 풍경에 생기를 주는 깜찍한 녀석이다. 뾰족한 작은 잎들에 어떤 난관이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와 해학이 묻어난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하늘이지만. 산마루에서 보는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높은 곳이 지닌 위엄이라고나 할까? 땀 어린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참으로 상쾌하다. 찬 겨울바람이지만 땀을 식혀주니 얼마나 고마운 바람인가?


중간 쉼터에서 곤줄박이 한 마리를 만났다. 꽁꽁 언 숲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더니 작고 여린 이 녀석의 존재가 너무나 반갑다. 배가 고픈 것인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까이 날아온다. 재빨리 떡을 떼어 집게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다. 날갯짓하며 주변만 맴돈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오지만 선뜻 물지 못한다. 두려운 탓이리라. 한동안 망설이더니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아쉬운 마음에 나뭇가지에 떡 조각을 달아 놓았다. 잠시 후 다시 내게로 다. 붙여놓은 떡조각을 재빨리 떼어다 손에 올렸더니 두 번의 망설임 끝에 마침내 물어 간다. 막힌 야생의 자연과 교감에 감동이 인다.

곤줄박이

그런데 아뿔싸!


떡덩어리가 무거운지 눈 위에 떨어뜨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린다. 는 마음이 쓰리다. 다시 와서 꼭 주워 먹를 바라는 마음이 더없이 간절다.


힘든 산길에 간간이 데크가 놓여 있다. 테크는 마치 황태 같다. 얼고 녹고를 반복하는 사이 목재가 부풀어 보풀이 태처럼 푸석해져 계단 끝에 수북하게 쌓였다.

산을 남보다 앞서가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쉼 없이 걷는 것이다. 잠시 쉬어가면 곧바로 뒤따르는 이들에게 뒤처진다. 남보다 앞서서 가는 길에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쉬엄쉬엄 가더라도 종국에는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산 정상에서는 착한 바람이 나쁜 바람이 되었다.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사나운 건달만 남았다. 옷깃을 여미고 발아래를 굽어본다. 멀리 산봉우리가 겹쳐져 물결처럼 굽이친다. 희끄무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연한 수묵화가 펼쳐졌다. 상의 얼음꽃도 선명하다.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이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길이 힘이 덜 든다. 그렇다고 마냥 편하지는 않다. 발끝에 힘이 모아져 불편하다. 넘어지기가 쉬워 신경을 더 써야 한다. 완전히 좋을 수는 없다.


베일처럼, 이불처럼 두툼하게 쌓인 눈이 하산길 내내 이어진다. 눈이 내려 쌓이고 얼었다 녹으면서 빚어내는 눈의 질감이 손에 잡힐 듯 음영이 선명하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겨울산의 예술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산길을 걷는 데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누군가 낸 길을 따라 걷는 길은 편안하다. 이정표가 없는 갈림길을 만났다. 다른 길로 빠져서는 곤란하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바른 길을 찾았다. 이정표가 주는 가치가 새삼스럽다. 우리 삶에도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루한 하산길이 이어진다. 정상에 올라 풍경을 발아래 둔 값이다. 바닥에만 눈이 있고 위로는 스산한 나목의 풍경이 단조로움을 더한다. 내려갈수록 질퍽대는 길이 나온다. 어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심심한 마음에 길을 벗어나 눈을 밟았더니 무릎까지 빠진다. 흠칫 놀라

발을 뺀다. 스패치를 안 했더니 신발 속으로 눈이 잔뜩 들어왔다. 해프닝을 끝으로 종착지다.

산언저리 밭두둑에, 빈 무논에 자연의 선이 작가가 그린 작품 같다. 완전하지 않은 미완의 겨울산을 만났다. 극적인 만남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오늘은 보통의 겨울산을 눈에 담고 간다.


#트레킹 #겨울산 #계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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