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이름난 명소라도 사는 곳 가까이 있거나 쉽게 갈 수 있으면 그 가치를 잊기 쉽다. 서울의 고궁들이 그렇다. 계절에 따라 변주되는 고궁의 풍경은 서울에 사는 이들이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궁을 찾아 고궁의 고적함을 즐기는 편이다.
얼마 전에 덕수궁에 들렀는데 모란은 꽃봉오리만 빼꼼하고 진달래도 이제 한 두 송이만 보였다. 꽃이 만발한 덕수궁 뜨락은 굉장한 볼거리다. 그래서 올해도 놓치지 않고 싶어서 꽃들이 만발하는 시점에 맞춰 다시 오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금요일, 아내도 출근하고 나도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만 오전부터 날씨가 너무 좋았기에 조금 늦고 피곤하더라도 퇴근 후에 따로 시간을 내기로 했다. 봄날은 너무 짧아서 귀하고 아까운 시간이다. 아까운 것은 금방 가버리기에 붙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 않고 아내를 만나 함께 덕수궁으로 향했다.
오후 5시가 되었는데도 궁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궁에 들어서자 활짝 핀 모란꽃이 우리를 반긴다. 자세히 보니 아쉽게도 절정의 순간이 지나 시드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고운 자태는 남아 하루를 마무리하는 햇살을 받은 풍성한 붉은 꽃잎과 빛나는 황금꽃술이 여전히 고혹적이다. 순백의 모란과 진홍의 모란이 어우러지니 색감이 더 선명하다.
모란꽃 발치에 매발톱도 꽃을 피웠다. 모란의 위세에 눌려 얼른 보이지 않지만 몸을 숙여 들여다보니 독특한 꽃모양과 노란 색감이 눈길을 끈다.
오늘 정원의 주인공은 단연 흰 모란이다. 감사하게도 꽃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을 만났다. 순백의 꽃잎이 강렬하지는 않아도 우아하게 펼친 흰 꽃잎에 황금꽃술과 붉은 꽃술이 장식처럼 얹어져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흰 모란 꽂을 보노라면 고요하고 은은한 즐거움이 인다. 마음의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하는 꽃이 흰 모란이다. 빛과 꽃은 환상의 궁합이다. 햇빛을 받은 흰 꽃송이가 신비스럽고 사랑스럽다.
봄철 덕수궁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연못의 진달래다. 덕수궁에 들어서면 우편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곳은 진달래로 뒤덮였다. 진달래가 만발한 연못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 울창한 푸른 수목들이 주변을 둘러싼 연못 중앙에 한송이 떨기처럼 분홍빛 진달래가 수를 놓았고 수면에는 파란 하늘빛과 나뭇잎들의 푸른빛 그리고 꽃들의 붉은빛이 물들었다. 연못을 둘러보면 만나는 풍경마다 다른 매력을 풍긴다. 못에는 청둥오리 한 쌍도 머물러 아름다움을 더한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이로운 풍경에 매료되었다.
진달래도 덕수궁의 볼거리다. 뜨락마다 진달래가 가득하다. 철쭉도 보이지만 진달래의 위세에 눌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후원 산책로에는 만발한 진달래가 특히 아름답다. 꽃빛도 다채롭다. 진한 꽃분홍 진달래가 많고 겹꽃까지 있어 마치 진달래 경연장에 온 느낌이다. 가는 곳마다 자리를 잡은 연륜이 느껴지는 진달래는 꽃가지를 늘어뜨려 운치도 뛰어나다.
덕수궁 꽃구경을 마치고 덕수궁 돌담길을 통해 정동을 걸었다. 언제 걸어도 기분 좋은 길이다. 정동극장의 고운 카페도 들르고 오징어 볶음 맛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십전대보탕을 후식으로 들고 청계천으로 향했다. 봄밤을 즐기는 인파가 청계천변을 가득 메웠다. 그 사이를 우리도 거닐었다. 아름다운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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