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난 직장생활과 대학원 과정을 병행했다. 허송세월 비워 둔 10대 때 채우지 못한 걸 만회하려는 듯, 난 20대를 성실하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일주일이란 시간은 몹시 짧았다. 평일은 직장인의 역할과 대학원생의 역할을 나눠했고, 주말이면 쌓인 과제와 논문에 늘 시간이 쫓겼다. 여유 없는 일상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마지막 1년은 나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여유를 두고 해도 될 일들을 난 늘 서둘렀고, 충분한 노력 앞에서도 나 스스로 뭔가를 더 요구했다. 그저 빨리, 그것도 많은 성과를 내면 보기 좋은 어른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를 꾸역꾸역 삼키듯 보낸 끝에, 스물아홉 살에 난 겨우 대학원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난 날카로워진 마음을 다듬어 보고자 제주로 떠났다.
제주 여행을 함께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20대의 마지막, 열심히 살았다는 보람을 홀로 느끼며 자축하고 싶기도 했다. 부족함은 있었지만 게으르지 않았던 20대의 마지막. 해야 할 일은 피아지 않았고, 주어진 책임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난 스스로에게 꽤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다. 잘 살았다고, 나름 그럴싸한 어른이 되었다고. 제주에 도착한 나는 빌린 렌터카가 민망할 만큼 걷고 또 걸었다. 몸의 피곤함은 생각을 단순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하는 오랜 산책에 허벅지가 저려와도 좋았다. 긴 산책에도 지치지 않고 20대를 회상하며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혼자만의 제주 여행을 만끽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금오름에 올랐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인지 그렇게 유명한 금오름에 사람이 없었다. 잘됐다. 지친 육체와는 달리 쌩쌩한 마음만 가지고 아무도 없는 금오름을 홀로 올랐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금오름은 제주를 다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았다. 속이 뚫릴 것 같은 바람을 감상하며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천천히 사람 없는 금오름을 둘러보다 슬슬 내려가는 길. 저 멀리 사람 한 명이 보였다. 청바지에 코트를 입고 있던 나와는 달리 가벼운 등산복 차림의 그 남자는 먼저 오름을 찾아 내려가는 나와는 달리 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다 서로가 가까워졌을 때, 그 남자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인적 없는 오름에 만난 사람이 반가우셨던 걸까. 아니면 이른 아침에 오름을 찾은 마음이 같아서였을까. 그 남자는 살면서 처음 보는 내게 꽤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른 아침 금오름에 퍼진 그의 인사는 잠들었던 오름마저 깨울듯한 힘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의 힘.
"아. 안녀..."
남자의 반가운 인사에 내가 뱉은 말이었다. 이게 내가 내뱉은 말의 전부였다.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지도 못했고, 인사는 끝맺지도 못했다. 남자는 반갑게 미소 짓던 반면, 난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렇게 지나쳤다. 남자는 선의로 건넨 인사가 날 놀라게 했다 생각했던지 내 어설픈 인사에도 다시 한번 눈인사를 건네곤 그대로 오름을 올랐다. 평소 외향적이란 소리를 듣던 내가, 평생 MBTI 대문자 E로만 살아왔던 내가 인사 한 마디 앞에서 이렇게 서툴러질 줄은 몰랐다. 같은 여행자라는 이유로 건넨 반가운 인사에 뭐가 그렇게 망설여졌던 걸까. 내가 인사 한 마디 내뱉기 어려운 사람이었던가. 이렇게 어리숙한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름을 내려가는 길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으이구, 병신아!'
열심히 산 시간만큼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꽤 그럴듯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난 여전히 부족한 어른이었다. 겉으로만 어른이 된 스물아홉의 마지막 겨울, 난 바쁘게 쌓아 올린 시간들 사이로, 아직 배우지 못한 어른스러운 태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 비어져 있는지 알게 된 나는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다가울 서른에 채워나가야 할 것들을 고민했다. 스스로 나름 괜찮은 어른이라 믿고 있던 지난 생각들이 민망해졌지만, 이렇게나 저렇게나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다.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