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부활인가, 포스트-마라톤 시대의 도래인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스포츠, 마라톤에 대하여

by 김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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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거의 종식되었다는 믿음과 함께 마라톤이 부활했다. 어쩌면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기피해야 할 특징(땀, 수만 명의 주자와 시민들의 운집 등)을 모두 갖고 있는 마라톤은 지난 2년 반 동안 ‘언택트’라는 용어를 써가며 비대면 운동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마라톤의 속성이라고 믿어져 왔던 열렬한 함성, 도로 점거, 지상파의 실시간 생중계 등의 요소 없이 ‘달린다’는 근본적인 성격만으로도 스포츠로서의 위상을 지속할 수 있음을 재확인시켰다.


국내 대면 마라톤 대회도 부활의 흐름에 탑승해 경주국제마라톤, 춘천마라톤, JTBC 마라톤이 올해 개최를 결정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훈련을 최근에 시작했는데, 뭔가가 이전과는 달랐다. 이기기 위한 경쟁 대신 스스로와의 싸움에 가깝다는 것이 마라톤의 묘미 중 하나기에,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뛰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화이팅’이라고 소리쳐 응원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 응원은 잠시나마 고통을 덜고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마라톤 대회에서도 마지막 약 3km 정도 응원 구간을 “거저 먹는 구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최근 몇 번의 달리기에서 지나친 사람들과는 유독 응원을 나눌 수 없었다. '화이팅' 소리는 냉소에 가까운 공허로 돌아왔다. 물론 동네를 뛰는 모든 사람들이 응원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응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는 작업이 선행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분명 응원에 답해줄거야"라는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이 계속될 때에는 그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코로나19의 영향이라고 본다면, 공공장소에서 말을 하는 행위조차 ‘죄’로 여겨지던 지난 2년 반에 걸쳐 형성된 새로운 (불신에 가까운)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혹시 팬데믹이라는 통로를 거치는 동안 마라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스포츠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원래 마라톤은 명상과 멀지만 가까운 것으로 꽤 자주 함께 묶여 거론되어 왔다. 생각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몸을 극한에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일종의 명상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경험해왔다는 점(‘러너스하이’라는 심리학적 진단까지 포함해서)에서 타인과의 절대적 관계로 묶여있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붙어있는 신체의 한계를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단련시키는 스포츠에 가까운데, 훈련과 대회가 다른 부분은 대회에서는 자아로의 침잠을 계속해서 깨어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응원이 그렇다.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신체의 고통 속에서 표정이 굳어지다가도, 일면식도 없으나 멀리서 등번호를 읽고 응원을 건네주는 시민을 마주치면 금세 얼굴이 바뀐다. 그것이 마라톤을 스포츠라는 하나의 단위로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팬데믹 이후의 마라톤은 어떤 모습이 되는 걸까. 당근마켓으로 대표되는 하이퍼로컬 트렌드의 산물 중 하나인, 크루 문화를 통해 복권된 마라톤의 위상에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뒤늦은 인기에 힘입어 형성된 일종의 ‘고독한 달리기(임의적으로 ‘문학적 달리기’로 불러왔던)’의 자장 아래에서 안정감을 얻어왔기 때문에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남는지 실감하긴 쉽지 않다. 대회에서는 이전과 같이, 황영조와 이봉주가 메달을 따낸 순간을 연상시키는 열띤 응원이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과연 팬데믹 이전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팬데믹 이전으로의 회귀를 (표면적이든 내면적이든) 지향하는 현재의 상황을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모든 변화를 거치고 나서, 스포츠는 과연 '건강'과 '올바른 경쟁'을 위한 아름다운 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제, 스포츠에 대해서는 무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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