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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Apr 04. 2022

마음 상함,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2014.9. 계간 <니> 36호, '나만 아프다?'

원래는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게 아니었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책을 읽으려 했는데 우연히 그 책의 저자가 10여 년 전 <따귀 맞은 영혼>이란 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책, 나도 10년 전쯤 읽었었다. 다시 보니 책표지는 분명 눈에 익은데 책 내용은 어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는 사람이지 하면서 책을 읽는데 책에 나온 사례들이 다 내가 겪은 일 같다. 10년 전에도 그랬을까? 그때는 직장생활, 연애,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 어떤 부분은 나 같고 어떤 부분은 아직 모르겠고 그랬으려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니… 제목만 들어도 뭔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던 거 같다. 제목에 혹했던 것도 같다. 따귀를 맞아본 적이 있다. 아직까지 내 생에 유일했던 따귀였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같은 담임선생님이었고 난 부반장이다가 반장이 됐다. 반에서 봄 환경미화를 의논 중이었다. 내가 깐죽거렸던 거 같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쉬는 시간에 과학교사실에 내려가서 혼났던 거 같다. 그러면서 따귀를 맞았다. 건방지다는 취지였던 거 같다. 쉬는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은 수업을 들어갔고 난 한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왜 맞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고 그렇게 있다가 멍해졌다. 내 뺨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그때 따귀를 맞은 거겠지? 뭔가를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정신이 없었다. 그 이후 그 얘기는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따귀 맞은 영혼>, 배르벨 바르데츠키, 궁리


책에서는 내면에 상처, 혹은 상처받기 쉬운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어 살면서 쉽게 마음 상하는 일들을 계속 겪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소리보다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처럼 항상 눈치를 보는 나는 뭔가를 하면서도 즐거운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뭐를 원하는지,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도 말하기 힘들다. 


나중에 생각하면 건전한 비판인데도 그 당시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나를 설명해주는 부분도 있다. 가장 바닥에는 나는 평범하지 않고 뭔가 특별한 면이 있다는 우월감이 있다. 아주 이상적이고 완벽한 모습을 추구한다. 절대 화는 내지 않고 언제나 현명하고 지혜롭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나온다. 반항하듯이 내 기대에 반하는 행동들은 숨기고 싶다. 그런 행동이 나올 때마다 나는 내가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둘 사이에서 진짜 나, 감정을 느끼고 욕구를 갖고 사는 나다운 것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진짜 나가 아닌 가짜 나가 앞장서서 살고 있는데 삶과 관계를 제대로 느끼고 맺고 살 수 없다. 가면이고 연기이며 어떤 계기가 와 부딪칠 때마다 완벽한 나와 못난 나 사이를 오가며 정신을 못 차리고 어느 게 나인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망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데에 실망이 존재’하는 것처럼 완벽한 나를 추구할수록 그 기대는 깨지기 쉽다. 




나는 요즘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패턴을 보이고 있다.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어 활기차게 효율적으로 지내는 생활과 방전되어 아무것도 안 하는 생활. 활기차고 일을 빨리 잘 해내는 것을 이상적이라 생각하기에 며칠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가 체력도 떨어지고 바깥일이든 집안일이든 내 생각대로 안 되면 나는 잘못 살고 못났다는 생각에 빠진다. 누가 뭐라 안 해도 자연스럽게 빠지는 생각의 늪, 내 상처다.


저자가 인용하는 게슈랄트심리학에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환경과 접촉을 하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알아차려 에너지를 모으고 행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주기가 있다고 본다. 책을 읽다가 배고픔을 느끼면 힘을 모아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서 먹고 배부르면 다시 돌아와 책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애초에 상처가 있어 상처를 잘 받는 상태에서는 상처에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적당한 행동과 접촉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설명이다.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도 못 하는 상태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돼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방 역시 마음 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대학 졸업 후 친하던 과 친구와 관계를 끊었다. 난 졸업 전이나 후나 똑같다고 느꼈는데 그 친구는 내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뭔가 기회를 줬는데 난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내팽개쳐진 느낌을 받은 채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고 받지도 않았다. 내가 그 친구를 더 많이 의존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성적이나 세상을 헤쳐나갈 능력에 있어 그 친구가 나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말이 옳은 거였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는 내가 버림받은 거라 여겼다. 난 희생자였던 것일까? 날 희생자 위치에 놓고 그 몫을 선택한 것일까? 


이런 경우와 관련해 저자는 ‘희생자-가해자’ 심리게임이라 부른다. 역할을 정해 그 뒤에 숨어 상대에게 원하는 본마음은 숨긴다는 것. 난 나를 희생자로, 약자로 여겼지만 친구가 몇 번을 연락해도 차갑게 끊은 나는 가해자였던 것도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때의 나는 약해서 그랬다고 그 손을 잡으면 영원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고 그래서 마지막 자존심을 세운 거였다고 변호하고 싶다. 그 당시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취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닥이었으며 나 자신에 대한 불신도 커서 그냥 불안했었다. 지금이라면 관계를 피하기만 하지 않고 내가 마음 상했음을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도망가기만 한다면 피하고 싶어도 비슷한 일들이 일생에서 반복된다. 반복의 고리를 끊으려면 처음에 생기게 된 상처를 찾아 들여다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몸짓, 그림, 소리 등등으로 자신의 속상한 마음도 표현하고 점점 진짜 자신과 만나 뭘 원하는지를 알면 도망가지만 않을 수 있다.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보면 여러 가능성들이 떠오르고 그걸 시도해볼 수 있고 그러한 관계가 서로 책임 있는 관계다. 마음 상해하면서 나를 희생자 위치에만 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 감정과 욕구에 책임지지 않고 관계에 있어서도 무책임한 거다.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나에게 부족한 용기, 책임감, 유연성 등등을 채워 넣을 생각을 하면 또 아득해지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어 불안해졌다. 또 이상적 기준에 나를 맞추려는 나는 실망을, 마음 상함을 예약해놓은 것 아닌가? 나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하다. 


 하느님, 제게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일 

 느긋함을 주소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킬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두 가지를 서로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저자가 쓴 주석을 그대로 옮긴다. 1702년에서 1782년까지 생존했던 신교 목사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거 Friedrich Christoph Ötinger의 금언으로, 중독 환자 익명 자활 단체의 모임은 항상 이 말로 모임을 끝맺는다. 이런 단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AA(익명 음주환자) 단체인데, 그 밖에도 다른 중독증이나 심리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익명 단체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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