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향해 자라는 나무 9화

9화 : 이상한 나무와 앨리스

by 이원호

9 화: 이상한 나무와 앨리스




우리가 앨리스를 마주쳤던 것은 밀림의 습지대를 떠나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거닐던 중이었다. 평화는 나무 위를 화려하게 날아다니는 오색찬란한 나비 떼들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순진한 나비는 손바닥만 한 날개를 펄럭이며 평화의 쭉 펴진 검지 손가락 위에 내려앉았다. 평화는 눈이 땡그래져서 그 보석 같은 날갯짓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앉았어!”

그 모습이 귀여워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더니, 옆에서 나무에 물을 주고 있던 한 여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골리앗 거대나비(Sigmentus Goliatus)는 보석이 박힌 듯한 화려한 날개와 그 온순한 성격 때문에 유명한 종이죠.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위협으로 느낄 줄 몰라서 곧잘 날아들어 안기곤 해요.”

연구원처럼 긴 흰색 가운을 입고 나무에 수액주사를 놓고 있는 그 여성의 모습에는 옅은 장난기와 기품이 동시에 서려있었다. 키가 꽤 큰 그 여성은 남부 대륙의 특징적인 갈색 피부와 서부 대륙인의 초록빛 에메랄드 눈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긴 가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다리는 길고 탄탄해 보였고, 보석 같은 눈을 가리는 속눈썹은 여름의 숲처럼 짙었다. 그렇게 예쁘거나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었지만 묘한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화는 앞도 보지 않고 나비에 눈을 맞춘 채 걸어 다녔고, 나는 평화가 행여나 난간 너머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어야만 했다. 나비를 쫓아 자꾸만 더 위로 향하는 평화를 보며 연구복 차림의 여성은 한 마디를 더했다.

“나무 꼭대기들 사이로 올라가면 천문관이 있어요. 천문관의 입체 영상은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 중 하나랍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며 천문대로 올라가려는 순간,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입체영상은 2시간 뒤에나 상영을 할 예정이니, 지금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볼 수 없겠죠. 그동안 저랑 대화를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저는 두 분을 이 자리에서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제야 우리는 그 여성이 오늘 만나기로 한 앨리스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앨리스군요!”

앨리스는 담담히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네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렇게 나비 사이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하니 기뻐요.”

“이렇게 환상적인 곳에서 일하고 계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인 줄 알았죠? 우리를 알아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묘하게 티가 나거든요. 잠시 식물원으로 같이 가서 차나 한잔 할까요? 그곳에 제 연구실이 있어요.”

우리는 투칸과 오색조가 울고 각종 앵무새가 햇살을 따라 날아다니는 밀림을 헤치고 <직원용 - STAFF ONLY>라고 써진 동굴을 지나 식물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식물원은 따스한 온기와 부드러운 흙냄새, 짙은 녹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종류의 식물이 꽃 틔우고, 뿌리내리며 천공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갔고, 서로 얽히고 덮이며 정밀한 세계를 구조했다. 뿌리들은 봄날 고양의 실타래처럼 복잡한 궤적으로 꼬이고 엉켰고 그 사이로 무한한 교감이 태동하고 있었다. 동물은 동물만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룰 수는 없었지만, 식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였다. 햇살과 비옥한 땅 사이에 팔 뻗으며 자라는 모든 식물의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인간의 마음을 다정히 도닥거리고 있었다.


앨리스의 연구실은 벽이나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식물원 내에서 자라는 거대한 너도밤나무의 그늘 아래에 작은 책상과 캐비닛이 하나 놓여있는 것이 앨리스의 연구실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책상 위 역시 모니터 하나와 커피포트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단촐했고, 그래서 그런지 묘하게 주변의 자연풍경과 잘 어울렸다. 앨리스는 캐비닛에서 머그컵을 꺼내어 너도밤나무의 뿌리에 걸터앉았고, 우리는 엉거주춤 앨리스를 따라 앉았다. 그렇게 조금 특이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조금 특이하죠? 식물학 연구뿐만이 아니라 생태학 연구도 함께 이루어지는 연구동이라 그래요. 불편해도 이해해줘요.”

평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신기하네요. 이런 곳에서 일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여기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거죠? 나무에 관련된 일을 하고 계시다고 어렴풋이 듣기는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박물관 내의 몇 가지 식물과 동물들을 돌보고 있어요, 대부분 나무 꼭대기에 서식하는 종들이라 아까 봤듯이 날다람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죠. 병행하고 있는 연구는 서쪽 대륙 북부 지역에 자라는 거대한 삼나무(Redwood Tree)들에 대한 연구예요. 몇 백 년을 넘게 자라고 엔간한 고층빌딩보다도 높게 자라는 그 나무들이 뿌리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 연구하고 있죠.”
“와! 연구가 무척 흥미로워 보이네요. 나무들이 뿌리로 대화를 나누나요?”

앨리스는 싱긋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연구 중이에요. 할 수도 있죠!”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나무들의 신비한 의사소통, 시간을 초월한 듯한 생존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뒤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앨리스는 커피를 깊게 들이마시고 질문을 넣었다.

“두 분께서 절 만나고 싶어 한 이유가 있다고 들었어요. 저 역시 ‘나무에 관련된 일’이라고 어렴풋이 듣기만 했죠.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평화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대도서관에서 뽑은 자료들을 꺼냈다.

“저희는 어떤 나무를 찾고 있어요. 이름도 모르고, 어떤 나무인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서부 대륙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죠. 혹시 이렇게 생긴 나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앨리스는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았고,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우리는 숨이 멎는 것만 같은 긴장을 느꼈다. 여행의 다음 방향이 결정되는 그 순간에 심장은 쾅쾅 뛰며 혈류를 쏟아내었고, 간지러운 손끝은 끊임없이 꿈지럭대었다. 세상이 멈춰버릴 것만 같은 그 기다림의 순간 뒤에 앨리스는 선포했다.

“이건 보드히 나무의 종류 같네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잎사귀의 모양이나 줄기의 생김새를 보면 그 종 특유의 형질이 살아있어요. 고대 참피나무의 일종인데, 동부 대륙에서 서부 대륙으로 넘어온 종인 것 같아요. 이 그림들만 보고서 제가 유추할 수 있는 바는 그래요.”

너무 신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평화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 나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혹시 아시나요?”

앨리스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나무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아요. 지금으로선 서식지도, 실존 여부도 뭐라 대답할 수는 없네요.”

금방 풀이 죽어버린 표정을 짓는 평화를 보며 앨리스는 빙긋 웃었다.

“그러니 내일 점심이나 같이 할래요? 그때 까진 알아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도시의 이곳저곳도 구경시켜주고 싶기도 하구요.”

평화는 또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좋다고 소리를 쳤을 뿐이다.





앨리스 덕분에 우리는 천문대 관람을 가장 좋은 중앙의 자리에서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돔 모양의 천장 스크린에 108개의 영사기가 다각적인 영상을 뿌리는 것은 그 어떤 3D 영상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할 선명함과 생동감이 깃든 멋진 경험이었다.

수십 미터 위 천장에서 상이 맺혀서 깜빡거리는 것인데도 별빛은 손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태양의 이글거리는 불꽃은 옷깃을 그슬릴 듯 가까이서 타올랐고, 혜성의 긴 꼬리는 시릴 듯 외로워서 마음에 긴 궤적을 남겼다. 온 우주가 가슴 벅차게 다가온 그 공간에서 우리는 한없이 사소하고, 한없이 소홀한 사람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알갱이가 되어 세상의 가장 큰 공간을 채우는 그 기분은 황홀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사람은 별처럼 아름다웠다. 어쩌면 별이 그리도 시리도록 외로운 것은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빛나며 밤하늘을 수놓음에도, 서로 결코 닿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도 그렇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고, 함께 삶을 살지만 결코 서로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함께 빛나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움에도 우리는 그렇게 외로움 속에서 자라나는 존재였다.

천문대 관람이 끝난 뒤에 우리는 기념품샵에 들려 오래된 돌들과 고운 모래가 든 유리병을 선물로 살 수 있었다. 기념품 샵은 각종 기진이보로 가득 차있는 곳이었지만, 그때쯤 되어선 평화도 나도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놀라고 신기해할 기력도 없었다. 기념품 샵 앞의 공원에 앉아서 우리는 잠시 지친 다리와 경이로 가득한 마음을 풀어주었다.

공원은 그 자체로도 기묘한 곳이었다. 풀숲 사이의 유리관 속에서는 누런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산책을 다녔고 공원 한쪽 편의 돌담 너머로는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바다에서는 해달들이 신나게 장난치고 자맥질하고 있었다. 그 해달들이 본래부터 야생의 녀석들인지 아니면 수족관에서 탈출한 녀석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해달들에게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카페테리어는 특이하게도 천장과 벽이 매끄러운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파도가 넘실대게끔 설계된 것 같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새하얀 거품과 시원한 물결이 유리를 타고 쏟아져 내려왔고, 아이들이 그 격렬한 흐름 아래서 소리 지르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거품 이는 파도가 유리 위를 물들이는 걸 그저 바라만 보았다. 생명의 역사를 온몸과 마음으로 겪은 우리는 약간 멍해져 있었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끝없이 이어져온 생명의 역사와 그 장구한 찬란함 앞에선 인간도, 인간의 고민도 왠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은 묘하게도 외롭고, 묘하게도 행복했는지라 잠시 아찔한 기분 속에서 말 못 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어느덧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날갯짓을 따라 우리는 집으로 귀소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우리는 공원을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앨리스가 만나자고 한 것은 점심때였지만, 그전에 잠의 도시의 도심을 한 번 구경하고 싶었다.

사실 도심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그 공원 속의 여정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것이었다. 공원의 튤립 정원과 광활한 잔디밭, 두꺼운 밀림을 걸으며 우리는 사진을 찍고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연못에는 잉어와 붕어와 오리, 거위, 백조가 한가로이 어울려 살았고, 호숫가에는 갈매기가 떼 지어 몰려다녔다. 간혹 물수리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리 꽂히며 잉어를 낚아채는 일도 있었는데, 거위를 잡아먹었다면야 꽤나 폭력적으로 느껴졌겠지만, 잉어라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바다까마귀들은 곳곳에서 도토리나 솔 씨를 집어먹으며 청설모들의 좋은 경쟁상대가 되고 있었다. 같은 견과류 섭취자인 청설모들은 도토리를 집어먹으며 뚱뚱해지기만 하는 반면에 바다까마귀들은 더 똑똑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잘생긴 바다까마귀가 멀리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룩끼룩거리자, 평화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나한테 말 걸었어! 작업 멘트였을까?”

자신의 미모가 이종에게도 먹힐 정도라고 주장하는 듯한 그 순진무구한 행동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공원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났다. 짙은 녹음이 끝난 지점에 놓여있는 것은 한가로운 버스정류장과 넓고 한적한 차도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신기한 운송수단인 BART에 올라탈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지상이동수단’의 약자인 BART는 잠의 도시만의 특징적인 운송수단으로, 지상 위를 달리는 자그마한 전차였다. 크게 봐줘도 지하철 한 칸보다는 좀 작은 그것은 수백 년 전 도시가 세워질 때 차도에 설치된 철로를 따라 거리를 느릿느릿 움직이는 명물이었다. 기껏 해봐야 20명 남짓이 탈까 말까 한 그 고대의 유물은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고대의 유물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도시민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에게 조차 각광받고 사랑받는 운송수단이었다. 수많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도시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BART는 느릿하고 정신없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언덕을 하나 오르고 내릴 때마다 탑승객들은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난리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 진귀한 경험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평화는 작고 가냘파서 이리 날아다니고 저리 날아다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깨를 꼭 감싸 안아 주자 그녀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확실히 편하지는 않네! 이 도시 사람들은 옛날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과거가 그리도 사랑스럽나!”

나는 평화의 감상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평화는 내가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박물관도 그렇고, 추모비도 그렇고 공원도 그렇고 과거에 대한 추앙 일색인걸. 자꾸만 부엉이처럼 돌아보는 이유가 뭘까? 내려놓고 비운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비우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집착하는 건 아닐까?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린다고! 여기 너무 시끄러워!”

“그렇게라도 세상의 일부로 편입되고 싶은 걸까! 과거의 무게에 짓눌리면 죽을 텐데! 아 맞다. 죽는 게 좋다 그랬지! 이상해! 이상하고 또 이상해!”

“하나도 안 들린다고 이 말썽쟁이야!”

우리는 그렇게 상호 일방적인 대화를 거듭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인 잠의 도시의 부둣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의 도시가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였다면, 부둣가는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마냥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온갖 종류의 문화가 그곳에서 얽혀 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거대한 대게가 삐져나온 보따리를 짊어지고 가는 선원은 남쪽 대륙의 이름 드높은 어선 출신인 것 같았고, 그런 그를 몽환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국적인 갈색 피부의 여성은 북부 대륙의 여행객인 듯했다. 멀리에서는 최첨단 설비로 무장한 거대 빙산 같은 크루즈가 갓 부두로 들어서고 있었고, 나무로 된 나룻배들과 음유시인들은 그 선로에서 황급히 노를 저어 피하고 있었다. 한쪽 편에는 크루즈를 호위하는 무시무시한 군함과 군인들이 보였고, 다른 쪽에는 한 손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어디 도망갈까 풍선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소년소녀들로 가득했다.

부두가를 따라서 나있는 산책로에는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풍선공예를 하는 광대와 얼굴에 온통 은색 가루를 칠한 판토마임 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열띤 경쟁을 펼치고 있었고, 피리를 불어 뱀을 춤추게 하는 동대륙인과 페인트 스프레이로 몽환적인 그림을 15분 만에 그려내는 그래피티어 (graffiti-er)가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신들린 듯 유혹하고 있었다. 수제 목걸이나 풍경화를 파는 사람도 있었고, 신들린 듯한 솜씨로 북을 치며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북을 치는 것을 멈추지 않겠소!’라고 선언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그 수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고물 덩이 같은 엄청난 짐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주위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있었고, 우리도 호기심에 그 근처로 다가가 보았다.

청년의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목걸이에는 철제 구조물로 보강해놓은 하모니카가 달려있었고, 왼발에는 캐스터네츠가, 오른발에는 스내어 드럼과 연결된 고무줄이 묶여 있었다. 왼손은 기타를 쳤는데 손목 부근에 끈이 묶여있어 크게 당길 때마다 심벌즈가 울렸고, 오른손은 피리와 백파이프를 오가며 정신없는 탭댄스를 추어 댔다. 그의 모습은 혼란스럽고, 정신없었으며, 우스꽝스러웠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었다. 자신감 있고 즐겁게 자신만의 엉망진창을 연주해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뜨거운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그의 자유로움 앞에서 나는 'Menschliches, Alluzumenschliches!'라는 찬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독창적인 예술가들 말고도 수많은 생의 아름다움이 도시의 부둣가를 수놓고 있었다. 삶은 대게와 바닷가재는 팔뚝만 한 쟁반에 얹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로 굶주린 식객들에게 배달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맛있다는 조갯살 수프(Clam Chowder)는 그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부둣가 전체에 너르게 퍼트리고 있었다. 꼬리 채 구워진 청어는 가슴팍 뼈를 다 드러낸 채 향기로운 속살을 자랑했고, 싱싱한 대구 튀김은 컵에 담겨 불티나게 팔렸다. 동양식 음식점 창가에는 검은콩 소스에 조리된 게와 삶은 샥스핀, 해삼탕과 전복죽이 전시되어 지나가는 이들의 입맛을 돋우었고, 어디선가 손가락 2마디보다도 두꺼운 소고기 스테이크가 숯불에 구워지며 자글자글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부 대륙 제일의 별미라는 수제 햄버거집 OUTIN버거 앞에는 사람들이 짐승 같은 스타일로 줄을 서있어서 감히 사 먹을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죽음을 그리도 추앙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치곤 무척이나 삶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었기에 꽤나 신기한 풍경이었을 뿐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예술가들의 희한한 공연에 잠시만 눈길을 팔아도 시간이 쏘아지듯 흘렀고, 기념품 가게에서 각종 죽음에 관한 기념품들을 보고만 있어서 세상이 어떻게 흐르는지 잠시 잊힐 지경이었다. 평화는 한 기념품 가게 앞에서 손가락에 고무로 된 각종 익사자 모형들을 끼워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들을 기념품이라고 만들어놓은걸 보면 이 도시 사람들의 유머감각은 참 이해할 수가 없어.”

“유머감각도 죽었나 보지.”

평화는 키득대면서도 미니어처 사형집행대와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모양 연필깎이를 구경하다가 휑하니 기념품 가게를 나가버렸다.


앨리스는 점심때 즈음이 되어 미안하지만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식사를 하라고 연락을 했고, 평화와 나는 두꺼운 햄버거 두 개를 사들고 부둣가 공원에 앉았다. 평화는 햄버거 가게 주인이 자신의 햄버거에만 서비스로 치즈와 토마토를 얹어주어 매우 행복해져 있는 상태였다. 반짝이는 황금만의 물결 위로 몇 대의 요트가 부드러이 움직였고, 우리는 평화롭고 따스한 햇살과 뱃속의 태아가 들었을 것만 같은 잔잔한 물결의 고동 속에서 나른한 만족감을 느꼈다.

멀리 부둣가 선착장에는 특이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반쯤 물에 잠긴 채로 파도를 맞고 있는 그 실물 크기의 동상에는 온갖 종류의 해초와 따개비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더 처절한 느낌을 주었다. 익사하는 사람이 절실하게 뭍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 조각은 보는 이에게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동상의 입과 목을 넘나들 때마다 우리는 동상과 함께 익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고, 그건 굉장히 괴상한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그 동상을 도와주거나, 살려주려고 손을 내밀지 않았고, 그건 왠지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평화는 그 동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평했다.

“저런 조형물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나. 난 괴로워지는데.”

“그러게 말야. 평생을 ‘인간적인 것은 다른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배워서 그런지 저런 모습에서 비인간성이 느껴져. 숭고함이 없잖아. 타인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도 없고.”

“하지만 사실 난 박물관에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인간 말고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전체의 번영을 바라는 종이 있을까? 어쩌면 남을 돕는 건 인간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인 건 아닐까. 함께 살기 위해서 ‘적’이 필요한 것처럼, 희생 역시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가치인 거지. 하지만 그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 아닐까? 살아남기 위한 거니까 말야. 어쩌면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은 다른 걸지도 몰라.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사회를 이루고, 전체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건 아닐 테니까.”

평화의 말을 곱씹으며 물에 잠겨 드는 동상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의 본질, 사람의 본질 사이에는 어떤 위화감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럼 생명의 본질은 죽음에 대항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숭고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내려놓는 건 오히려 생의 본질에 위배되는데.”

“그럴지도. 잠의 도시의 사람들은 실수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럼 역설이 생기는 거 아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보는 우리도 실수를 하고 있는 거잖아.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사회적인 것이 아니고,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은 사회에 의해 생겨난 관념이니까.”

“그러게! 그런데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이상해.”

“으아 머리 아파. 인간다움은 참 먼 것 같아.”

평화는 햄버거를 꼭꼭 씹어 먹으면서 말했다.

“아직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무언가 중요한 걸 빼놓고 있어서 모순이 생기는 거야. 삶을 삶답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언가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거겠지. 그래서 그 나무를 찾아야 해. 그 나무를 보면 엉켜있는 실타래가 풀릴 것 같은걸. 그리고 엄마 보고 싶다.”

평화의 마지막 의뭉스러운 문장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리 뒤의 도로변에서 경적이 빵빵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앨리스가 그녀의 보라색 밴(Van) 안에서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우리를 한적한 공원으로 데려갔다. 미션 길과 돌로레 길이 만나는 지점이라 미션돌로레 라는 성의 없는 이름이 붙은 그 공원은 수백 년 전 게이, 레즈비언 운동이 시작된 유서 깊은 자리였다. 현재도 공원 인근의 카스트로 길이나 돌로레 길에는 무지개 깃발을 걸고 모여 사는 동생애주의자들이 많았고, 해마다 동성애 지지 퍼레이드도 거창하게 열리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는 자유로움이 가득해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느긋한 발걸음과 한가로운 오후를 지내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그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물론 앨리스는 동성애랑 관련이 있는 이유로 우리를 돌로레 공원에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앨리스는 점심을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대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그랬었고, 그 아이스크림 집은 우연히도 돌로레 공원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15평 남짓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서며 평화와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좁은 가게 안에는 100종류에 가까운 수제 아이스크림들이 차가운 향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민트 초코나 녹차 같은 일반적인 맛도 물론 있었지만 ‘치즈 수플레’ 나 ‘쿼트러플 슈팅스타’ 같은 조금 특이한 맛에서부터 ‘피의 향연’이나 ‘썩은 바닷바람’ 같은 괴이 망측한 맛에 이르기까지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맛의 아이스크림이 가게 안에는 존재했다. 덕분에 평화와 나는 온갖 괴상한 이름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맛을 찾아 신나게 헤맬 수 있었다.

달콤하고 무난한 버터 피칸 맛을 고른 나는 제일 먼저 가게를 나왔고 해가 잘 드는 공원 잔디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캐러멜 빛 아이스크림이 묘한 조화를 이루자 행복은 자연스레 찾아들었다. 그다음으로 나온 건 앨리스였는데 겉으로 보기엔 민트 초코지만 속에는 폭발하는 듯한 강렬한 보드카 시럽이 들어있는 ‘포피 글러브’라는 맛을 고른 채였다. 앨리스가 한 입 맛보라고 준 포피 글러브는 차분한 겉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과격한 속 맛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속이 뒤집히는 어지러움을 맛보아야만 했다.

평화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앨리스와 나는 편안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평화 씨는 참 특이한 분인 것 같네요.”

“상상 이상으로 그런 편이죠.”

“물론 그렇게 말하는 수호 씨도 별로 노멀 하지 않아요. 나무를 찾아서 나선 여행이라니, 참 이상한 여행이에요. 두 분이서 그 나무를 찾아서 여행하는 이유가 뭔가요?”

나는 앨리스에게 평화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어렸을 적의 그 마법 같은 동화책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나간 세월의 모든 장면들이 다 시간 속에 씻겨 내려가는데도 언제까지고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란 특별한 힘을 담고 있는 법이라고 말하자, 앨리스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살고 공부하고 일하며 우리가 느껴온 인간성의 유린과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욕망과, 옳고 곧게 살고 싶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고, 사람다움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나무를 찾고 싶은 것이고, 참 이상한 직감이지만 나무를 찾으면 이 모든 의문과 혼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얘기하자, 앨리스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은 종으로서의 보드히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의 보리수 그 자체였군요. 모세와 예수의 황야의 불타는 나무이자, 석가모니의 고난의 나무였어요. 갑자기 나는 답을 줄 자신이 없어지네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던 찰나에 아이스크림 가게 문이 활짝 열리며 평화가 이상한 것을 들고 튀어나왔다. 평범한 콘 위에 얹힌 그것은 녹은 듯 흐물거리며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칠흑 같은 검은빛의 그것은 요동치고 흔들거리면서도 용케 콘 위에 머물러 있었다. 평화는 신이 난 깔깔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이스크림을 정했어 드디어!”

“....... 그게 뭔데 대체.”

“블랙맘바! 죽음의 맛 이래! 죽이지?”

“먹는 게 맞긴 한 거야?”

“가끔 독성이 생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먹을 수 있대!”

“으음.. 죽음에 흥미를 느꼈어?”

“응! 이 도시에 깃든 죽음은 희한한 경향이 있어! 도시 지하에 던젼(Dungeon)도 있다던데, 가볼까?”

던젼이라는 말에 나는 흠칫 서늘함을 느꼈다. 어렸을 적에 나도 던젼에 갔던 적이 있었다. 거대한 중세 성의 지하 감옥이었던 그곳은, 근대에 이르러 인간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기의 참상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비인간적이고 미신적이었던 암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곳은 흑사병과 고문, 마녀사냥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들로 가득 차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동시에, 12살 아이가 경험하기엔 너무나도 끔찍한 장소이기도 했다. 살이 썩고 전염병이 퍼지는 것 같은 동굴 안의 끔찍한 냄새와 장면들은 그 뒤로 오랜 기간 내 악몽의 일부분이 되었었다. 잠의 도시의 던전도 그런 곳 일까 봐 머뭇거리고 있자, 앨리스가 먼저 제안을 던졌다.

“도시 지하의 던전 말인가요? 한 번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장소를 던전이라고 부르지는 않죠. 안 그래도 데려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같이 갈래요?”

평화는 당연히 오케이 했고, 앨리스는 도시 지하는 해가 진 뒤에 들어가야 재미있는 곳이라고, 몇 시간만 기다리자고 그랬다. 던전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내게 그곳은 피하고 싶은 장소였지만, 그래도 도시의 가장 비밀스럽고 유쾌한 공간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앨리스를 위해 그동안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궤도 열차와 운해어들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하늘도시 입국심사소에서 있었던 일들과 거지 취급을 당한 이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도시 사이를 흐르는 하늘강과 그 밑에 잠들어 있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앨리스가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럼 하늘도시의 주민들은 하늘강으로 뛰어들어서 자살을 하지는 않나요? 그 도시의 주민들은 너무 고고해서 자살도 안 하려나요.”

“아뇨. 사실 하늘도시는 자살 시도율은 높은데 비해 성공률은 높지 않은 도시예요. 하늘 강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많대요. 하지만 하늘 강 밑에는 보이지 않는 기류가 있어서 뛰어내려도 죽을 수가 없죠.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청소로봇에게 붙들릴 뿐이에요. 그래서 심심하면 뛰어드는 사람들도 많은가 봐요. 고고한 척하면서 죽음으로 장난을 치는 셈이죠.”

우리는 계속해서 순환하는 기표의 탑과 끊임없이 위를 향하고 초월을 꿈꾸는 하늘 도시의 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도덕적이고 옳은 삶과 경직된 사회, 그리고 ‘Menschliches'들의 자유에 대해서 말할 때, 앨리스는 그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사실 잠의 도시 역시 비슷해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이고, 때문에 모든 세속적인 가치들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직된 부분들이 꽤 많죠.”

“어떤 부분들이 그렇죠?”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죽음 뒤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 관념이 그래요. 사실 다 큰 어른이라면 모를까,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세속적인 욕망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이제 막 생으로 박동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상실을 알고 죽음을 알며, 더 나아가 비움과 내려놓음을 알겠어요. 아직 제 숟가락을 움켜쥐는 방법도 잘 모르는 아이들인데 말예요. 결국 죽음에 대한 교육이라는 것은 강압적이고 주입적인 방법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글로만 강압적으로 배워선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그 말을 하는 앨리스의 눈동자에는 옅은 회한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의아하여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무척 슬퍼 보이시네요. 이 도시에서 자라시면서 그런 것들을 겪으셨던 건가 봐요?”

앨리스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대답해주었다.

“네. 맞아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허무주의자였고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어요. 어려서부터 ‘다 내려놓아야 한다, 욕망은 다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배운 아이들에게 쉽게 나타나는 증상이죠. 닿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만 옳다고 배우니 현실에 뿌리를 내리질 못하는 거예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도 부모님도 제게 욕망을 비우라고, 원하는 게 없을수록 삶은 행복해진다고 가르쳤어요.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이었죠. 사실 어릴 때야 말로 가장 예쁘고 싶은 시기잖아요. 사랑받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구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어른들은 항상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것들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죠. 혼란스러웠어요. 내게 중요한 가치들과 세상이 내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가치들이 다르니 엇나가기 시작했죠.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즈음해서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지만, 유일하게 사랑만이 진실한 가치고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삶의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사랑을 찾아서 행복해지셨나요?”

“그랬으면 참 좋았겠죠? 오히려 정반대였어요. 사랑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었기에 관계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해졌고, 그건 제 주변의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죠. 전 사랑이 순수하고 순결하며 영원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 지고지순하고 완벽해 보이는 사랑은 실제론 숨 쉴 구멍마저 틀어막는 집착이라는 괴물이에요. 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는 이에게 매달렸어요. 결과는 참혹했죠.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지쳐서 떠났어요. 잠시라도 덜어져 있으면 제가 울며 불안해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죠.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저를 착취했어요. 제가 뭐든지 해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리한 요구들도 거듭해서 해대기 시작했죠. 저는 그를 위해 도둑질과 마약, 온갖 위태로운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는 결국 다른 여자와 바람을 폈어요.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만난 세 번째 남자 친구는 저를 성폭행하기에 이르렀고, 그때 제 나이는 겨우 18살이었어요. 자살을 결심한 것도 그때 즈음이었죠.”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담히 이야기하는 앨리스도, 미동도 않고 듣고 있는 평화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둘은 별일 아닌 담소를 나누듯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자살을 시도했나요?”

“아뇨. 결국 자살을 시도하지는 못했어요. 잠의 도시에 살다 보면 죽음이 끊임없이 멋지고 대단한 것처럼 추앙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게 되어요. ‘그 수많은 찬양이 사실일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거죠. 제 경우엔 그게 특히 더 심했어요. 죽음마저도 나를 배신할까 봐, 약속된 안식과 행복이 아닌, 여태까지 이어져온 고난의 연속 일까 봐 두려웠죠. 죽음이 너무나도 행복한 것처럼 여겨졌기에, 오히려 더 두려웠던 거예요.”

“죽음이 어떻게 아름다워 보였나요?”

“삶은 관계로 구조되어 있죠. 그래서 아픈 거예요. 우리를 구성하고 정의하는 것도 관계지만, 우리를 옭아매고 괴로움을 낳도록 잉태시키는 것도 관계인걸요. 그래서 이 모든 관계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죽음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어요. 처음으로 나 스스로 오롯하니 완성되는 순간이니까요.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기에 죽음을 향한 갈망 역시 ‘욕망’으로 느껴졌어요. 늘 비우고 배제하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배웠던 바로 그 욕망이었던 거죠. 저는 결국 죽음에 대한 갈망마저도 부인하며 허무주의와 우울증에 시달렸네요.”

앨리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의미 없어 보이는 나날들이 찾아왔어요. 이승에서의 욕망도, 저승에 대한 갈망도 다 부질없었죠. 삶에는 목적이 없고 죽음에는 의미가 없었어요. 관계는 아픔이었고 사랑은 저주였죠. 내겐 살 이유도, 죽을 가치도 없었어요. 죽음도 삶도 내 길이 아닌 것만 같았던 회색빛 나날들이었죠.”

평화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반전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알죠?”

“앨리스의 눈빛은 권태에 물든 것도, 허무에 지친 것도 아닌, 삶의 생기를 품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허무를 알고 절망을 알았지만, 그걸 이겨낼 계기가 있었어요. 그렇죠?”

앨리스는 차분하게 웃어주었다.

“맞아요. 확실히 그런 계기가 있었죠.”

“그 계기를 들려줄 건가요?”

“재미있네요. 마치 스무고개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뇨, 들려주지 않으려구요. 대신 보여줄게요. 이제 거의 해가 져가니, 보여주기 적당한 시간인 것 같아요.”

그 말을 마치고 앨리스는 바지에 묻은 잔디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감 같은 석양이 하늘 위로 번져가고 있었다.


앨리스가 차를 몰고 우리를 데려간 곳은 도시 정중앙에 솟은 두 개의 쌍둥이 산 사이였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서 산을 올라가는 내내 딸깍이던 햇빛은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순간 전구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산꼭대기에는 놀랍게도 거대한 터널 입구가 나있었고, 차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고 있었다. 도시의 다른 장소들은 해가 사라지면 곧 깊은 잠에 들곤 했지만, 신비하게도 이 터널만큼은 밤 속에서도 살아있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우리의 놀람을 눈치챘는지 앨리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하도시의 입구에 온 걸 환영해요. 잠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항상 깨어있는 신전 같은 곳이죠!”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입을 벌린 동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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