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향해 자라는 나무 10화

10화 : 지하도시

by 이원호

Chapter 10: 지하도시




터널은 달팽이관 같은 나선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밑으로 향했다. 삶의 깊이만큼이나 끝없는 짙은 어둠이었다. 꽤나 오랜 강하 뒤에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끝과 넓이를 알 수 없는 무저의 갱 같은 지하공동이었다.

천장 위의 잠의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거대한 석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었다. 지하 공동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석주랄지 건물이랄지 화려한 그 구조물들에서 새어 나오는 온갖 종류의 화려한 색채는 마음에서 어둠을 쫓아내고 있었다. 광선들은 드넓은 지하공동 사이로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넓은 어둠 사이로 빛은 빨려 들어가듯 소리 없이 메아리치고,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도시 밑의 또 다른 도시이자, 세계 아래의 또 다른 세계였다. 천장 위로 잠의 도시는 깊은 잠을 잤지만, 지하도시는 밤이 깊을수록 더 생생히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도시 바닥에 짙게 깔린 모래 언덕들 사이로는 고대의 갱도와 석조로 만들어진 무덤들이 셀 수 없이 얽혀들며 미로를 만들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솟아나 아틀라스처럼 세상을 받드는 길고 높은 석주들은 먼 미래도시의 일부분처럼 빛났다. 끝없이 돌며 내려가는 나선 승강장에서 넓은 지하세계를 한눈에 담으며 우리는 도시의 숨겨진 뿌리를 찾은 것만 같은 생경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이야 말로 가장 깊은 곳에서 양분을 캐어 잠들어버린 도시에 전달하는 숨은 심장이요, 깊은 뿌리였다. 인간의 짙은 욕망이 그렇게 땅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카타콤 브(Catacomb), 욕망의 지하도시에 온 걸 환영해요. 너무 깊이까지 내려와서 조금 무서웠죠? 도시의 지하엔 무덤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앨리스의 농담에 우리는 이 공간이 한 때는 도시 밑의 금을 채굴하기 위한 갱도였고, 그 뒤에는 거대한 무덤이 되었으며, 몇 세기가 지난 현재에 이르러선 인간의 모든 욕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 바로 그 지하공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도시가 앨리스의 탈출구였던 건가요?”

“네. 맞아요. 지하로 탈출한다니 뭔가 좀 이상한가요?”

평화와 나는 이미 천상에서 지상으로 탈출해본 전과가 있었고 덕분에 앨리스의 지하를 향한 탈출에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말해주자 앨리스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토끼굴 여행기를 들려주었다.

“스무 살이 갓 되었을 때 나는 참 끔찍한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남성 혐오증과 대인기피증 때문에 학교에도 세상에도 나가지 않은 채 그저 집에 누워서 하루 종일 끔찍한 상상들만 했죠. 몸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해요. 자연스레 건강도 나빠지고 살도 많이 쪘어요. 그때의 제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흉물스럽다는 표현 밖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지하도시의 존재를 발견했던 것은 그때 즈음이었어요.
지하도시는 사실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장소는 아니에요. 다만 지상에서 억눌렸던 욕망들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곳이죠. 지상의 잠의 도시는 일견 보기엔 굉장히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론 많은 욕망들이 억눌려 있잖아요. 죽는 것이 자유롭다는 것이 실제로 삶을 억압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죠. 그리고 인간은 욕망을 억누르고 비워내기만 해서는 살 수가 없어요.

지하도시에 처음 도착한 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위에 세상에선 가치가 없거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 비난받던 욕망들이 이곳에선 숭고하고 추구되어야 할 목적으로 받아들여졌거든요. 이곳의 사람들은 욕망을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그게 삶의 본질이라고 보았죠.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살아가는 원인이라는 걸 그들은 바로 보았던 거예요.

이곳의 사람들은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고 멋진 사람을 유혹하려고 애썼어요. 그리고 그것이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라고 내게 말해줬죠. 돈을 버는 것도, 돈을 쓰는 것도 누구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도시에는 그 모든 소비와 향락을 위한 시설들이 다 준비되어 있었어요. 부자들은 화려한 카지노에서 마음껏 돈을 쓰고 권위와 권력을 과시했고, 돈이 없는 자들은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흥분 속에서 큰돈을 땄어요. 거대담론에 대한 고민, 부자와 가난, 돈, 물질, 아름다움,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이 얽히고 자라는 정글 같은 이 지하에서 나는 처음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을 느꼈죠. 특히, 그동안 강하게 억압되어 있고 상처뿐이던 성적인 욕망이 가장 강성하게 떡잎을 틔우기 시작했어요.

사실 20살의 나는 이 지하도시 앞에서 무척 위축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어렸고, 새로운 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는 데다가, 여태까지 성적인 것, 갈망하는 것은 내겐 늘 고통이자 두려움이었는걸요. 자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지 또 이용당하고, 고통을 받을까 봐 두려웠죠. 거기에다가 살도 엄청나게 쪄서 자괴감도 심했거든요. 그런 내게 지하도시에서의 첫날밤은 큰 위로가 되어주었어요.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원나잇 스탠드를 가졌어요. 그렇게 잘 생긴 남자는 아니었고 무척 충동적인 결정이었죠. 자포하기 하는 심정으로 파트너를 선택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만난 그 남자는 친절하고 내 얘기와 불안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고, 그리고 관계를 갖고 싶다고, 하지만 제가 두려워하는 걸 아니 오늘 밤만큼은 어떻게든 참아보겠다고 그랬죠. 그날 밤, 우리는 성관계를 갖지 않고 밤새 안고만 있었어요. 아침이 되어서 그는 사라졌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지만 그날 저는 마음을 속박하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죠. ‘욕망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날 이후로 나는 강렬하게 욕망하고 강렬하게 발산하기 시작했어요. 예뻐지기 위해 살을 뺐고, 유혹하기 위해 옷을 샀죠.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배웠는데 실제론 너무나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답니다. 두 번째로 지하도시에 내려왔을 때, 나는 크게 달라져 있었어요. 자신감 있게 클럽에 가서 매력적인 남자를 만났고, 그를 유혹했죠. 그와 관계를 가진 그날 밤은 내가 처음으로 한 명의 당당한, 오롯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 날이었어요. 물론 조금 두려운 기분, 타락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마저도 묘한 쾌감이었죠. 그 뒤로 나는 참 많은 진솔한 가치들을 새로 배울 수 있었어요.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잠을 자는, 삶의 진리와도 같은 방법들이었죠. 나는 더 이상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꼭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어요. 몸을 부끄러워하고 몸이 원하는 것을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위배되는 행동이에요. 경건한 삶은 절제하고 금욕하는 것이 아니죠. 자신의 몸과 정신이 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고 진솔히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진솔한 삶이고, 성스러운 삶인 거예요. 나는 살고 싶어 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임을 배웠어요. 남들 가운데 오롯해지고 싶고, 신처럼 군림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라는 걸 배웠죠. 꼭 결혼과 평온과 화목한 가정을 꿈꾸지 않아도 인간이 꽃처럼 사방에 씨를 퍼트리고 나무처럼 가지 가득 이름 없는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운 그날부터 내 삶은 더 이상 허무한 것이 아닐 수 있었답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삶을 살 수 있었던 방법이고, 부서지지 않고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예요.”


앨리스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나선 통로를 거의 다 하강하여 지하도시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각종 장식들과 색조로 꾸며져 있는 동양풍의 거대한 나무문이 오고 가는 이들의 마음에 흥분은 심어주었다. 마치 사찰의 문처럼 오색의 용과 거대한 사천왕들을 담고 있는 그 문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이 지하도시에는 온갖 대륙의 문화가 다 섞여있어요. 아마도 욕망은 전 인류 공통의 핵심적인 가치라 그런 거겠죠? 특이한 건, 욕망하면 욕망할수록 더 많은 소망들이 이뤄지고, 강한 욕망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어요. 아마도 문화도, 나라도, 사회와 문명도 다 그렇게 욕망에서 비롯된 거겠죠.”

길거리에서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이 파격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거리 위에선 남녀가 딥키스를 하는 정도는 특이한 행동 축에도 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반나체로 걸어 다니거나, 남자와 남자끼리의 키스, 여자와 여자 간의 애무 정도는 되어야 잠시라도 눈길이라도 붙들어들 수 있을 정도였고, 차마 설명할 조차 없는 기괴한 모습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광장에서 흩뿌리는 사내의 모습도 보였고, 빵가루를 향하는 비둘기 떼처럼 그 돈에 돌진하는 광란의 떼도 보였다. 마약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이들은 부지기수였고 거대한 말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 밑으론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녀들은 대체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치안이 불안해 보이거나 범죄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길 위에선 욕망이 흐르다 넘쳐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정신적 물결은 왠지 인간적이면서도, 또 왠지 도덕성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 같은 느낌도 함께 주었다.

평화는 창문 밑에 빼꼼히 숨어서 눈만 내놓고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구멍이 뚫려있는 바지를 입어서 성기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자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백금색 머리카락 여성이 농탕한 짓거리를 주고받는 모습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보더니 창문 아래로 숨어버렸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도무지 못 보고 있겠어!”

그 기분엔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앨리스는 웃으며 설명했다.

“곧 익숙해질 거예요. 평생을 터부(taboo) 시 해왔던 사회적 금기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당황한 것뿐이니까요. 착한 인간, 사회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평생 세뇌해왔던 것에 금이 가기 시작한 셈이에요. 물론 혼란스럽기야 할 테지만, 착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욕망하고 행동해도 그래도 인간이랍니다.”


앨리스는 답을 찾는 우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는 없다며 우리를 도시에서 가장 번잡한 길 한복판에 내려다 주고 사라졌다. 쇼핑을 하러 간 것인지 도박을 하러 간 것인지 헌팅을 하러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지하도시 모험을 시작해야만 했다.










도시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높고 호화로운 층에는 고급 호텔과 카지노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간층의 건물들에는 백화점과 레스토랑, 오락시설들이 많았다. 지상의 북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미로들 사이로 클럽과 마약 상가, 술집, 성매매 업소들이 즐비했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세의 모든 욕망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매우 혼란스러웠다. 인파에 밀침 당하고 휩쓸리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남쪽 시장의 한복판 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기괴한 먹거리들이 사방에 즐비한 시장통 한 복판을 걷고 있었다. 찐 돼지머리나 생닭이 가게 외부에 버젓이 걸려있는 모습도 신기하고 징그러웠지만, 사람보다 더 큰 말린 가오리나 새장에 가득 든 채 빽빽거리는 메추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양의 고환으로 추측되는 물건이나, 뱀을 담은 술, 팔뚝 만 한 메뚜기 구이 같은 것 까지 있었으니 우리는 경악을 넘어 질겁하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을 뿐이다. 평화는 통에 가득 담겨 꿈틀거리는 칠흑색 아기 전갈들을 보며 파랗게 질려 있다가 말했다.

“인간은 정말 뭐든지 먹을 수 있나 봐!”

그 충격적인 선언이야말로 그 활기찬 거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머리 위로 호박과 당근을 주고받으며 흥정하는 상인들을 지났고, 목이 비틀린 닭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과 인사했다. 정육점 안에서는 소라도 도축한 건지 엄청난 피비린내가 나서 우리는 기겁을 하고 옆 골목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기껏 도망치기는 했지만 옆 골목의 상황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온갖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는 그 골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무시무시한 강철 병기들이었다. 영화에 나올법한 화려한 대검들과 면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리한 사무라이 환도가 시퍼런 날을 빛냈고, 참수 도끼와 청룡언월도는 떨어질까 무서운 기세로 천장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과독(果毒)이라도 발랐는지 새카맣게 빛나는 수리검과 표창들은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암살용 단검들은 누구를 죽이려는지 눈이 멀어버릴 듯 표독스레 빛났다. 겁에 질린 채 병기점을 지나니 그제야 조금 정상적인 장난감 가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가의 기념품과 조각상들을 파는 가게들도 많았지만, 레고나 플레이모빌 같은 키덜트(kidult)족을 위한 가게도 많았다. 만화책이나 피겨들을 잔뜩 진열해놓고 파는 곳도 있었고, 온갖 종류의 퍼즐이 걸려있는 상점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평화가 관심을 보인 장난감들은 그런 평범한 것들보다는 좀 더 ‘지하도시 다운’ 욕망의 장난감들이었다.

평화는 통에 가득 담긴 나무로 된 음경을 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정말 노골적이다. 이건 뭐하는 장난감일까? 장식품? 손잡이? 실제 기구?”

그 음경이라는 것은 거의 500ml 생수통만큼이나 길고 두꺼운 흉측한 것이었고, 나는 차마 핏줄까지 굵게 돋아있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내 모습은 평화를 더 신나게 만들고 말았다.

“아마 실제 기구겠지. 여긴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니까.”

“에에. 이건 그래도 실제라기엔 너무 큰데. 봐봐. 아무리 매끄러워도 이런 걸로 장난치면 다치겠다.”

평화는 대담하게도 그 나무 성기를 손으로 들고 와서 내 앞에 내밀었고,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평화의 두 손에 그 흉물스러운 물건이 들려있는 모습은 정말 기묘한 광경이었다.

“으악! 이런 걸 왜 들고 다녀! 빨리 갖다 놔!”

평화는 얄밉게 빙글빙글 웃으며 놀려댔다.

“왜 질색을 하고 그래, 너도 똑같은 게 하나 있으면서. 육체를 부끄러워하는 가련한 인간일세.”

“똑같다니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어떤 남자라도 남의 물건이 얼굴 앞에 갑자기 들이밀어지면 질색을 한다구.”

“하긴, 넌 남성 혐오증이 좀 심하긴 하지. 여기 들어가 보자! 재미있어 보여!”

대답을 하거나 말릴 새도 없이 평화는 ‘SEX TOY SHOP'이라는 낯 뜨거운 문구가 자극적인 선홍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그 가게 안으로 불쑥 들어가 버렸다.

당황하며 황급히 따라 들어간 가게 안은 의외로 크고 깔끔한 곳이었다. 밝은 형광등 사이의 옅은 붉은 전등빛이 조금 묘한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퇴폐적이거나 향락에 물든 분위기는 아니었다. 물론 진열 및 전시가 되어있는 물건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들어오는 입구 위에는 자칫 잘못하면 코끼리의 그것과 착각될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사실적인 남성의 상징이 걸려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거의 실제 사람과 똑같은 모습의 단백질 인형이 춤을 추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 인형은 비현실적인 분홍빛 유두와 실제 가슴보다도 더 과장되게 출렁이는 거대한 모유 기관을 강조하며 천천히 자극적인 자세들을 취해댔다. 도무지 눈길을 둘 곳이 없어 선반으로 시선을 돌려봐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선반 위에는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는 각종 자위기구들과 여자의 음부를 변태적인 정교함으로 묘사해놓은 실리콘 작품들, 그리고 각종 채찍과 재갈이 기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저쪽 멀리 진열장 안에는 각종 성취향을 반영한 모든 종류의 단백질 인형들이 전시되어있었고, 평화가 들고 나를 놀리던 것과 흡사한 남성 성기 모양의 장난감들이 재질과 크기별로 백화점의 신발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평화는 당차게 들어오자고 해놓곤 물건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버벅거리다가 다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또다시 당황하며 황급히 따라 나가자 평화는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로 길거리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아! 부끄러워서 죽을 뻔했어!”

“그러길래 왜 들어갔어. 그렇게 당황할 거면서.”

“성욕도 인간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기에 도전해 봤지! 도시에 여행을 가면 그 도시만의 특산품을 경험해봐야 하잖아.”

그러자 퍼뜩 어떤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너 그래서 아까도 블랙 맘바 같은 이상한 걸 골랐었구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응! 죽음의 도시니까 죽음을 맛봐야 해!”

“그래서 맛은 어땠어?”

“쪼꼬렛보다도 더 달콤했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배시시 웃는 평화의 모습은 가을날의 석양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황홀한 것이었다. 부끄러워하면서 가게 앞을 떠나면서도 평화는 미련을 채 버리지 못했고, ‘한 번 사용해볼까.’라고 중얼거림으로써 나를 기겁하게 만들고 말았다.








평화와 나는 가까스로 거리를 벗어나 건물 위의 백화점과 카지노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하도시의 백화점들은 세상 모든 옷들을 다 갖춘 듯 화려했고, 거기에다가 값까지 쌌다. 옷 한 벌을 사기 위해 영혼을 다해 고민하고, 옷장을 통째로 사려고 드는 평화를 말리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카지노에서 말썽은 끊이질 않았다. 평화는 자신의 블랙잭의 숨은 고수라며 얼마 되지도 않는 현금을 몽땅 걸었다. 그 돈은 말도 안 되게도, 10배나 되는 금액으로 돌아오고 말았고, 평화는 크게 희희낙락했다. 그 뒤부터 평화는 집요한 열정으로 룰렛 게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딱 처음 들고 온 만큼의 돈이 남았을 때에야 나는 평화를 룰렛 게임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고, 평화는 나오면서도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고 찡찡대고 있었다. 아이의 욕망을 달래줘야 하는 난처한 어른의 입장이 된 뒤에야 가까스로 평화를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원한 지하의 공기가 욕망의 열기를 식혀주자,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본능적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하도시의 음식은 대단히 싸고 맛있는 편에 속했다. 아마도 더 많은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부추기기 위한 것일 테지만, 우리 같은 여행객들에게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 되어주었다. 단정해 보이는 동부 세계식 음식점에 들어간 우리는 간단한 전채 요리와 식사 2개를 시켰다. 나름 소신껏 시켰다고 생각했건만, 15분 뒤 우리를 반긴 것은 상다리가 휘도록 엄청난 양의 요리였을 뿐이다. 단순하고 무난하다고 생각하여 시켰던 지중해식 전채 요리만 해도 두 명이서 저녁 식사로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었고, 내가 시킨 새우 볶음밥은 거의 작은 동산이 되어서 나왔다. 평화가 시킨 만둣국에는 만두가 거의 온 세상의 대륙만큼이나 셀 수 없이 들어가 있어서 마치 작은 우주를 들여다보는 느낌마저도 들고 말았다. 덕분에 소신껏 먹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음식을 담는 손에 평상시보다 조금 더 무게가 실리고 말았다.

새우볶음밥의 새우살은 쫄깃쫄깃하고 연한 최상급의 것이었고, 새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평화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꼬리까지 아드득 아드득 맛있게 씹어 먹는 평화를 보며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래서, 욕망에 한없이 빠져본 기분은 어때?”

평화는 새우를 꿀떡 삼키곤 눈을 땡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직 풍덩 빠져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 말에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평화는 배시시 여우처럼 웃었다.

“밖에 나가서 멋진 남자도 꼬셔보고, 불타는 원나잇도 해봐야 욕망에 풍덩 빠진 기분이 들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내 생각에는 네가 그러지 않는 편이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왜? 나를 소유하려고 하는 거야? 소유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책임이 뒤따른 다구. 서로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욕망하는 게 낫지 않아? 나를 소유하려고 들면 너의 삶은 아주 무거워질걸!”

“소유가 그렇게 무거운 거라서 잠의 도시 사람들이 소유하지 않으려고,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했던 걸까?”

“말 돌린다! 욕망을 찾으러 간다?”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평화는 희야처럼 밥을 크게 떠먹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어!”

“어떤 게?”

“너의 첫 질문에 답한 거야. 욕망이라는 건 즐겁고 유쾌한 일인 것 같아.”

“왜? 욕망이야말로 소유인데. 네가 말한 대로 무겁지 않아?”

“맞아. 무거워. 그리고 그저 무작정 욕망하는 사람들은 잠시 그 무게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가는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갈 텐데 말야.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나는 가만히 평화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관계를 소유하려 들지는 않아도, 삶이나 죽음을 소유하려 들지 않아도, 욕망은 그 자체로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득 차는 것이고 스스로 소유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욕망은 그 자체로 소유의 무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왕자가 사막여우를 갖게 되면 4시에 만나야 할 책임이 생기고,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의 주인이 되는 것처럼, 욕망은 인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무게가 없는 척 무책임하게 욕망을 누려도, 그것은 언제가 철퇴가 되어 인간을 내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떤 게 즐거운 거야? 무거워서 즐겁다는 얘기로 들리잖아.”

“바로 그 얘기인데 무슨 소리야. 무게가 있기 때문에, 그런 동시에 삶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이기에 누리면서 즐거워. 하지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해도,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 아니야.”

나는 하마터면 그럼 인간의 본질이 뭐냐고 물어볼 뻔했고, 다행히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기 전에 가까스로 입을 닫았다. 평화는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얘기했다.

“허무와 절망을 건전한 욕망으로 이겨낸 앨리스의 지혜는 확실히 본받을 만 해. 가라앉는 모든 것들은 죽음의 의미니, 떠오르고 치솟는 삶의 의미로 이겨내는 게 맞지. 욕망에는 확실히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 있어. 모든 구조와 사회와 관념,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저돌적인 생명 본연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욕망하거나,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는 안 돼. 그건 오히려 자유가 아니라 구속이고, 삶의 본질에도 인간의 본질에도 위배되는 행동인걸. 마음껏 욕망하라고, 그렇게 자유로워지라고 말할 때, 우리는 끝없이 방탕해지고 무례해지라며 말하는 게 아니야. 퇴폐적이고 환락적인 것들에 몰두하라는 의미도 아니고, 텅 빈 기표에 현혹된, 무엇도 잉태시키지 못하는 무정충(無精蟲)이 되라는 의미도 아닌걸. 다만, 스스로의 감정, 몸과 마음의 소리에 솔직해지고 충실해져야 한다는 의미야. 솔직하고 대담하게, 스스로의 있는 그대로를 있는 힘껏 긍정할 것을 말하고 있는 거야.”


평화는 고대 경전의 오래된 지혜를 인용하고 있었다.

‘욕망하라. 질투하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사랑해라. 슬퍼하고 절망하고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러라. 끊임없는 위기와 갈등 속에서 흔들리며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삶을 사는 길이고 인간이기 위한 길이다.’

고대의 선인들은 욕망이 있기에 괴로움도 있고, 괴로움이 있기에 인간이 흔들리게 되며, 흔들림이 있기에 지혜와 극복과 변화와 인간다움이 찾아온다고 보았다.

평화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여행 중에서 내게 가장 중요했던 시점은 아마 오늘 밤이 되지 싶어. 욕망을 마주하고, 만끽하고, 흠뻑 잠기고, 실현해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니잖아? 덕분에 삶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많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앨리스의 말이 맞았어. 인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욕망을 이해해야 했었나 봐.”
“그럼 이제 욕망을 이해했고, 답을 향해갈 준비가 된 거야?”

“조금은 그래. 나는 아름다움이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걸 배웠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빼앗겨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데, 그건 그 가치들이 본래부터 삶의 중심에 위치한 핵심적인 가치들이기 때문이야. 때문에 삶이 박동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고 황홀해 보이는 거지. 욕망은 그런 가치 중 하나야. 욕망은 저 아래서부터 올라와 가슴을 채우고, 머리 위에서 꽃을 틔우고 그 향기를 서서히 퍼트려. 그래서 어깨가 긴장하고, 입술을 축이게 되고 뺨이 붉어지며 심장이 콩닥대는 거야.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얘기해. 욕망 없이는 세상 그 무엇도 아름다워질 수는 없어.”

나는 앨리스를 떠올렸다. 그토록 매력적인 그녀를 현재로 이끈 건 지하도시의 당당한 쾌락과 욕망이었다. 그 박동이 그녀에게 매력을, 삶의 의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욕망이 삶과 인간을 정의하는 것임을 이 땅속 깊은 곳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는 그런 앨리스를 보며 욕망이 다만 끓어오르는 것이 아닌 향기처럼 발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았다. 아직 채 모호한 깨달음이기에 어렴풋한 언어로 밖에 표현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지혜를 더듬을 수 있었다. 지혜는 죽음이 그 큰 입을 벌리고 이 모든 걸 삼키려고 눈앞에서 이빨을 희번덕거릴 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가장 화려하고 짙은 생의 박동 속에서도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행의 마지막 순간들을 향해 달려갈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앨리스는 우리가 배 터지게 저녁을 다 먹은 뒤에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좋은 저녁 시간 보냈느냐고 유쾌하게 물어보는 앨리스의 상기된 얼굴을 보니 그녀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깊은 지하의 욕망을 즐기다가 온 것 같았다. 우리는 특별한 경험에 대해 앨리스에게 감사하며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평화는 그토록 숨 가쁜 하루를 보내 놓고도 우리가 앨리스를 만난 이유를 잊지는 않았다.

“앨리스, 나는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남아있어요.”

앨리스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미안해요 평화. 내가 당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답을 찾기 위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여러분께 실망을 주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몰라요.”

평화는 특별히 속상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다만 차분히 앨리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을 뿐이다. 앨리스는 운전대를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얘기했다.

“당신들이 찾는 답을 이 지하도시에서 찾길 바랐는데, 아쉽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모양인가 봐요.”

“나름대로의 중요한 답을 찾기는 했지만, 아직 뭔가 부족한 걸 느껴요. 나무는 어디에 있죠 앨리스? 그냥 아는 대로 대답해줘요.”

“나무는 아마 없을 거예요 평화. 보드히 나무는 100년 전에 마지막 개체가 사라져서 멸종했다고 나와요. 본래부터 희귀했던 식물이지만,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거죠.”

평화는 그 말을 듣고 골똘한 생각에 잠겼고, 앨리스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요. 조사를 해보니 당신들이 왜 그 나무를 찾는 것인지 더 이해가 가서 더욱 미안할 뿐이에요. 본래 모든 나무가 인간의 본질을 닮아있지만, 보드히 나무는 특히 더 특별한 나무였더군요. 나로서도 한 번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졌던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눈의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 것인지 이미 한 세기 전의 연구부터 보드히 나무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요.”

인간의 본질을 닮은 나무라니, 우리가 찾고 있는 나무는 무척 특이하기도 한 나무였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을 닮았다는 것일까?

“나무가 인간의 본질을 닮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그리고 왜 보드히 나무가 특별하다는 건가요?”

“사실 제가 나무에 대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던 건 나무가 자유로운 인간을 닮아있기 때문이었어요. 조금 모순적이죠? 땅에 붙박여 있는 나무가 자유로운 인간을 닮았다니 말예요. 하지만 나무는 인간과 똑같이 욕망을 향해 뿌리 뻗고, 이상을 향해 가지를 뻗어요. 정해진 짝 없이 온 세상에 씨앗을 뿌리고, 강한 염원과 사랑으로 가장 달콤한 연매를 맺죠. 고정 위에 붙박여 있느냐, 흐름 속에 머물러 있느냐만 다를 뿐, 실제론 바라는 바도 같고 생존하는 바도 가장 이상적인 인간과 닮아있는 존재인 셈이에요. 보드히 나무는 그런 나무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집단’을 이루고 살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어요. 과거의 식물학자들은 이 나무들이 뿌리 사이로 서로 의사소통까지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비록 연구를 채 진행하기도 전에 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요.”

집단을 이루는 나무라니, 확실히 특이한 나무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었던 걸까? 그리고 이미 시간 속에 사라져 버린 나무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앨리스는 ‘확실히 멸종되었다’고 단정 지은 것은 아니었고, 그 문장 안의 불확실성은 평화와 나의 집념에 희망의 불꽃을 지폈다. 눈을 빛내며 앨리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평화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앨리스, 그 나무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는 장소라도 알려줄 수 있나요? 나는 우리가 그 나무를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어요. 지하도시를 통해 앨리스는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건네어줬고, 우리는 확실히 답에 가까워졌어요.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나는 아마 평생 후회할 거예요.”

앨리스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그 나무를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에 남아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알고 있어요.”

앨리스는 핸들에 달려있는 버튼을 눌렀고 곧 자동차 창문 위에 서부 대륙의 선명한 지도가 디스플레이되었다. 대륙 가장 서단에서 빛나는 잠의 도시에서부터 시작된 경로는 구불구불한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손가락 3마디쯤 떨어져 있는 한 해안가를 향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4시간 정도 올라가면 있는 이 해안 국립공원은 보드히 나무가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에요. 오래전부터 그 일대에 서식해온 종이기도 하고, 그 해안 부근은 보드히 나무가 자라기 위해 가장 최적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거든요. 해안 단구의 절벽 아래 분지들을 찾아보면 좋을 거예요. 보드히 나무는 맑은 샘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는 낮은 분지들에 주로 서식했다고 알려져 있거든요. 다만, 그 해상 국립공원은 바다코끼리들의 짝짓기 장소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해두고 싶네요.”

“바다코끼리의 짝짓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수호 씨와 평화 씨의 생명을 간수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해요. 수컷 바다코끼리는 몸무게가 2톤이 넘고, 화가 나면 1m짜리 칼날이 달려있는 덤프트럭만큼 위험할 테니까요.”

그 말에 평화도 나도 긴장하며 침을 꿀떡 삼키고 말았다.









그날 밤, 다시 집에 돌아온 우리는 밤새도록 해양 국립공원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다행히 국립공원은 출입이 금지된 지역은 아니었고, 약간의 안전만 기울인다면 꽤나 멋진 탐험을 할 수 있을법한 장소였다. 공원까지 가는 것이 조금 막막할 뻔했지만, 다행히 앨리스는 끝까지 힘이 되어주겠다며 주말에 그곳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고,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나무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불안만큼이나 크게 일렁이는 희망도 함께 있었다.

평화는 난롯가에 앉아서 가만히 밤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 나무는 거의 다 와서 뭔가 말썽을 부리네.”

“원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렇잖아.”

“한 그루쯤은 살아있겠지? 그림 속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어딘가에선 자라고 있을 거야.”

“응. 난 그렇게 믿어. 생으로 박동하며 어딘가에서 잘 자라고 있을게 분명해.”

평화는 잠시 침묵을 곱씹다가 말했다.

“앨리스의 생의 기운은 다 욕망에서 비롯된 거였어. 박동하고 매력 넘치는 그 모습 다.”

“응. 맞아. 그런데 그게 왜?”

“그래서인지 나는 앨리스가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욕망에서 비롯된 에너지라서 불건전하다는 거야?”

“그건 아냐. 욕망이 잘못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욕망으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무언가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한 것 같은걸. 약간의 모순도 보이고, 언젠가 다시 허무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정함도 조금 보여.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네가 말한 대로, 인간의 본질은 단순히 욕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거겠지.”

평화는 화롯가에서 고개를 돌려 달빛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 나는 왠지 앨리스의 답은 잠의 도시의 지혜 속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앨리스는 잠의 도시로부터 도망쳐 지하도시에서 잠시 평온해졌지만, 끊임없이 들끓고 뒤집히는 지하의 욕망은 언젠가 괴리감과 불편함을 그녀에게 선사하겠지. 언제까지고 위를 향해 손 뻗는 생의 에너지일 수도 없고, 항상 태동하는 씨앗일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언젠가 침묵 속에서, 죽음과 상실과 땅으로 스러지는 편안함 속에서 다시금 지혜를 얻지 않을까.”

“땅으로 돌아왔던 인간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셈이네.”

“응. 항상 삶의 흥분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 다시 해저의 적막과 이완으로 돌아가며, 그 평온 속으로 귀순하며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지는 게 아닐까. 언젠가는 앨리스도 그 사실을 깨닫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어 밤이 깃든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죽은 것 같은 침묵 속에, 박동하며 치솟았던 모든 드높은 생의 기운이 스러지는 그 하루의 죽음 속에, 마침내 진정한 지혜가 깃들고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평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가야 할 길을 알잖아.”

평화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어깨에 기대어온 부드러운 머릿결이 온화하고 사랑스러웠다.

“응. 꼭 찾자.”

그렇게, 부드럽고 평온한 밤이 찾아왔다. 우리의 여행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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