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
Chapter 6: 비밀의 정원
도시 한복판에는 지나간 세월의 아름다운 유산이 남아있었다. 옛 왕과 황제들이 통치를 하고 신하를 거느리던 그 궁궐은 수백 년의 신비와 전설, 그리고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장소다. 세월이 흘러 그 고궁은 일반인도 출입 가능한 장소가 되었지만, 유일하게 한 부분만은 영원한 신비로 남았다. 왕과 왕비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왕자와 공주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는 그 후원은 천년의 가까운 세월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채 비밀로 남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에 경외감과 신비를 담아 비원(祕苑)이라 불렀다. 마법이 사라진 현세에 존재하는 마지막 비밀의 정원이라고 말이다.
찰리와 명아는 궁궐 깊숙한 곳에 비밀의 정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둘은 심지어 입장료까지 내고 고궁 안에 들어갔지만, 엄중한 감시로 굳게 닫혀있는 입구 말고는 후원으로 통하는 그 어떠한 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료조사 차원에서 후원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한 명아에게 궁궐 관리 직원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후원에는 몇 백 년 동안 그 누구도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설령 대통령이라고 해도 거긴 못 들어가실 겁니다. 왕실의 직계 자손이거나 왕가에서 허락한 고대 열쇠의 소지자가 아니고선 그 누구도 문을 통과할 수 없어요.”
왕실의 일원도 아니었고 열쇠도 없었던 찰리와 명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궁궐을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둘은 끝없이 펼쳐진 궁궐 옆 돌담길을 걸었다. 정원은 영원의 숲까지 이어져있는지 한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 있었다. 궁궐 돌담길은 정갈한 침묵으로 궁궐의 측면을 굳건히 지켰다. 명아는 담을 넘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돌멩이 몇 개를 던져보곤 포기했다. 높이도 높이지만 돌담 전체가 특수 구조체로 지어져 있어서 날개가 없는 이상 넘을 수 없었다.
“안에 뭐 공주님이라도 숨겨놨나. 뭐 이리 경계가 투철해.”
“그러게 말야.”
둘은 궁궐의 자락을 따라서 오랜 시간 걸었지만 뾰족한 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담은 너무 높았고 둘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고풍스러운 담장 위에는 맑은 하늘이 고즈넉이 걸렸다. 둘은 무한의 창공을 거닐며 보이지 않는 돌담 너머를 원망으로 쏘아보아야 했다.
찰리는 궁궐 돌담길 곁에 다닥다닥 지어진 집들이 신비하다고 생각했다. 궁궐 바로 곁인지라 건축 고도제한이 걸려있는 지역이었고, 덕분에 이제 시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낮은 주택들이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오래된 동네에서는 부드럽고 달큼한 향기가 났다. 찰리는 그것이 사람들이 오래 잊고 살아온 할머니의 약과 같은 맛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어깨너머로 훔치며 달큼하고 따스하게 살아온 삶의 향 말이다. 그것은 찰리의 미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행복의 순간을 언뜻 엿보게는 해주었다.
찰리는 얼떨결에 명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명아의 긴 속눈썹에는 이슬 같은 운무가 맺혀있었다. 느린 눈 깜빡임에 안개는 곧 옅어졌지만, 그 찰나의 영롱함은 잠시 동안 그 누구도 가진 적 없던 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찰리는 동그랗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명아의 눈을 훔쳐보았다. 그는 여전히 명아의 감정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명아의 표정은 생생했지만, 찰리는 그 속에 열기도 냉기도 찾아낼 수 없었다. 텅 비거나 공허한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거대한 하얀 백지 위 찍힌 작고 짙은 검은 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찰리는 자꾸만 그 점을 다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명아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명아는 그 순간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명아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했다.
“빨래터.”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몰래 훔쳐보던 것을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찰리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명아는 찰리의 얼굴색은 신경도 못쓸 정도로 몰두하고 있었다.
“뭐라고 명아야?”
“여기가 빨래터야.”
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의 마을버스 표지판에는 오래된 글씨로 ‘빨래터’라고 쓰여 있었다. 찰리는 집 근처인지라 이 부근을 몇 번 돌아다녔지만 그 명칭이 신기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여기 전 정류장 이름은 ‘세탁소’인걸. 예전엔 세탁도 하고 빨래도 하고 했던 동네 아닐까?”
“아니야 바보야. 여기 이전 정류장이야 오래된 작은 세탁소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지만 여기는 아니야. 근처에 빨래방 비슷한 것도 안 보이잖아.”
“그렇네. 그럼 예전에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예전에 이 지역에 대한 기획기사를 준비했던 적이 있어. 먼 과거엔 이 자리에 궁궐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개울이 있었대. 그 깨끗한 물에 궁녀들은 물론이고 온 마을 주민들이 빨래를 했었고 말야.”
“그래서?”
“그 빨래터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 개울 시작점은 이 도시 지하에 산재한 미로 같은 하수도와 상수도의 입구이기도 해. 처음 공사할 때 거기서부터 지어서 역사적인 장소라던데. 그곳엔 아직도 맑은 물길이 존재한다고 들었었어.”
“그럼 아직 궁궐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있을 수도 있겠네?”
“바로 그거야! 심지어 그 안쪽은 궁궐이 아니야.”
“그럼?”
“우리가 가려고 하는 비밀의 정원 안쪽이지!”
명아는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오래된 집들 사이로 길을 찾았다.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한 동네 사이로 걷다 보면 궁궐 담벼락이 어느새 나타나 있었다. 찰리는 어느 순간 그들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음을 깨달았고 그들 앞에 이곳이 고대의 빨래터였음을 알려주는 관광용 푯말마저도 붙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과거에 큰 물길이었을 그곳에는 이제 돌담에 나있는 작은 도랑과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굳은 철창만이 남아있었다. 찰리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긴 꽉 막혀있네. 철창 사이를 통과할 수는 없잖아.”
“이리 가까이 와봐.”
명아는 계단을 뚜벅뚜벅 밟아 도랑 아래쪽까지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휙 사라져 버렸다. 기겁을 한 찰리는 빠르게 명아를 따라갔고, 지하로 사라지는 물길을 따라 어둡고 음습한 지하수로의 입구가 열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대의 갱도 같기도 하고 동굴 같기도 한 그곳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 부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찰리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내보았고, 소리와 감정이 뒤섞여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도시 하수도의 입구구나.”
“응. 최초의 입구야. 더 이상은 이 근방은 하수도로 사용하지 않지만 유적 느낌으로 남겨져 있어. 봐봐, 물도 맑지?”
아닌 게 아니라 동굴 같은 입구 안쪽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깊은 안쪽이야 어두컴컴하고 위험한 괴물들이 살고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입구에는 수초가 자라나고 작은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도랑 같았던 것이다.
“또 이런 걸 어찌 알았대.”
“말했잖아. 기획기사 할 때 이쪽에 왔었거든. 그리고 실제론 궁궐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좀 더 안쪽에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 가보자!”
명아는 어둠 속으로 찰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찰리는 손끝의 온기에 자기 자신을 맡겼지만, 맞잡은 손에서조차 아주 희미한 감정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손은 모든 감정이 흐르고 집약되는 곳이다. 미세하고 섬세한 감정마저도 손을 잡으면 으레 파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아의 손에선 아주 희미하고 따뜻한 설렘의 향기 말고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의 마음에 짙은 평온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입구를 찾은 것은 동굴 같은 하수도에 들어온 지 몇십 미터도 안 된 때였다. 궁궐 벽은 지하에서도 분별이 가능한 깊이로 지어져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위치를 분별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과거의 물길이었을 것이 분명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지하 연못처럼 보이는 그 푸른 물결은 이상하리만큼 반짝거리며 건너편의 햇살을 암시했다. 궁궐은 아치형으로 둥글게 그 연못을 둘러싸고 있었고, 투명하고 맑은 물은 그 안에서 천천히 흘러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명아는 뿌듯함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야말로 옛 빨래터의 시작점인가 봐. 저 햇살은 궁궐 안쪽에서 비롯된 것일걸.”
“그렇네. 그럼 들어가려면 담장 밑으로 잠수해서 들어가는 거야?”
“그렇지! 왜? 수영 못해?”
“그건 아니지만 조금 으스스하잖아. 어두운 동굴 안에 들어와서 갑자기 물밑으로 잠수라니. 저 안에 뭐가 살지 어떻게 알아.”
명아는 지하 연못의 물을 떠 손에 담았다. 산에서 흘러나온 지하수라도 되는 모양인지 물은 맑고 투명했다. 명아는 그 물빛만큼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맑은 물이면 끽해봐야 물고기 정도나 살겠지. 난 가볼래. 넌 어때?”
찰리는 망설였지만, 명아가 신발을 벗어놓는 모습을 보곤 이제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명아는 천천히 발끝을 연못에 담그더니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찰리는 겁을 먹으며 황급히 물어보았다.
“왜 그래? 안에 뭐라도 있어?”
“아니! 그냥 엄청 시려!”
찰리는 약간 안도하며 대답할 수 있었다.
“계곡물 비슷한 거니까. 뭐 젖으면 안 되는 물건은 없어?”
“속옷 정도? 어차피 다른 것들은 다 방수가 되는걸.”
찰리는 속옷이라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명아는 찰리 쪽을 다시 보지 않고 물에 쑥 잠겨 들어갔다. 찰리는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명아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굴곡과 흐름 사이에서 명아는 미끄러지듯이 햇살을 향해 유영해나갔다. 채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명아는 지하 연못을 넘어, 돌담을 지나, 햇살이 드는 정원에 도착해있었다.
명아는 눈앞의 놀라운 풍경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돌담의 반대편에는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림이 펼쳐져 있었다. 물가에는 수선화가 부끄러운 고개를 수면에 닿을 듯 내밀고 있었고, 시냇물 자갈 틈새에서는 물방개와 가재들이 앞 다투어 수영을 시합을 벌였다. 물을 마시려고 왔던 산토끼들은 때 아닌 불청객의 모습에 눈이 댕그래 졌지만 사람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지 섣불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명아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놀라우리만큼 깨끗한 잔디밭에 자그마한 두 발을 올려놓았다. 선명한 초여름의 햇살이 두발을 가만히 간질이고 있었다.
명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허우적거리는 소리에 웃음을 참으며 돌아보았다. 찰리는 온몸을 다 휘저으며 물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조용했던 숲 속이 온통 소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명아는 도와줄까 망설이다가 찰리가 스스로 잔디밭에 올라오는 것을 보곤 그냥 두기로 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잔디밭에 드러누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감상했다. 단지 담벼락 하나의 차이일 뿐인데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고요와 평온은 도심에서는 찾기 힘든 것이라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찰리는 숨을 추스르고 앉아서 우여곡절 끝에 들어온 비밀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짙게 우거진 수풀 사이로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옛 목조건물들이 보였다. 그 양식으로 추측컨대 왕조시대의 건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사람이 사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두려움이 찾아들기도 했다. 언뜻 보기에도 이곳은 남달리 예쁘기는 했어도 사람이 존재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숲 속이었다. 어쩌면 그저 고문화재에 무단 침입한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그에 비해 명아는 천하태평인지라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찰리는 자신이 명아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한숨의 끝에 무언가 묻어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이 곳에는 특이한 점도 이상한 점도 없었다. 오로지 한 가지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찰리는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말했다.
“명아야. 여기 약간 이상해.”
“응? 왜?”
“여기 감정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
“그게 무슨 뜻이야? 그건 사람이 많은데서나 느껴지는 일이잖아.”
“응. 근데 여기는 사람이 가장 많은 놀이공원보다도 감정 농도가 높아.”
명아는 화들짝 놀라며 가방으로 맨발을 가렸다. 찰리는 그것이 참 특이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왜 발을 가려?”
“부끄럽잖아. 수풀 속에 사람들 많이 숨어 있는 거 아냐? 막 몰래카메라처럼.”
“그건 아니야. 인기척은 아예 느껴지지 않아. 그보단 평소엔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던 사물들이나 작은 생명체들에게서도 감정이 느껴져.”
“정말? 그건 어떤 건데?”
“저 시냇물을 따라선 슬픔과 기쁨이 같이 흐르고 있고, 저 산새 소리에선 희미한 열망과 흥분이 느껴져. 방금 전까지 저쪽에 있던 토끼들한테선 호기심과 즐거움? 두려움? 약간 까다로운 감정들이 미세하게 느껴지고. 응. 토끼들이 보이지 않는데도 감정의 잔류물이 남아있어서 위치가 느껴질 정도야.”
“그거... 정상이야?”
“아니. 나도 이런 건 처음인걸. 하지만 그 정도로 감정 농도가 짙어. 이런 장소는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
찰리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들이켰다. 삼켜지는 공기 사이로 여러 감정들이 녹아들어 흐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찰리는 곧 감정들이 4개의 큰 흐름이 되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긍정적이고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환희에 가득 찬 감정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와 정원 저 건너편의 어느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찰리는 직감적으로 저곳이 그들이 향해야 하는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언덕 너머에 이 모든 짙은 감정들이 모여들고 있어.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명아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두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한 채였다. 찰리는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명아가 함께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 그 순간에는 그렇게 믿었다.
찰리와 명아는 너무 오래되어 숲의 일부가 되어버린 정원길을 걸었다. 과거엔 분명 왕이 거닐었을 단단한 석재 오솔길은 이제 세월과 풀잎들에 가려져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중간중간 숲의 틈새 사이로 보이는 전각들은 이곳이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궁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자연 속에 부드럽게 녹아들어가 있었다. 색채도 자재도 어느 것 하나 튀는 것 없이 자연 본연의 색감과 곡선에 어우러졌고, 유려한 처마와 기와는 마치 산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허리를 휘감는 시냇물도, 달뜬 입술처럼 속삭이는 나뭇잎새도 궁궐과 정원과 산을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둘은 걸으며 멸종되었다고 여겨지는 여우들을 보았고, 킁킁거리며 나무뿌리를 파는 오소리를 보았으며 호기심 가득한 채로 움직이는 토끼 무리와 인사했다. 후원 안에는 단순히 한 개의 시냇물만이 흐르는 것이 아닌 조막만한 개울들이 이곳저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봄철이라 개구리들이 깨어나고 있었고, 붕어와 자라들은 느린 속도로 버들 사이를 유영했다. 명아와 찰리는 숨겨져 있던 신비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오래 감춰져 있던 고대 왕조의 마지막 정원이 지금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멀리 오솔길 너머로 탁 트인 공터와 오래된 담장들이 보였다. 갑자기 너른 공터가 나타나자 찰리와 명아는 마법에 걸린 것 같은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갑작스레 넓어지며 공터와, 그 가운데 있는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고 찰리는 직감적으로 이곳에 모든 감정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흐름은 오래된 담장을 넘어 안 쪽으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갔다. 북쪽과 남쪽에서 큰 기운이 몰려와 하나로 합쳐졌고, 동쪽과 서쪽에서 작은 기운들이 모여 용틀임을 하며 삼켜지고 있었다. 찰리는 저 어마어마한 풍경이 자신에게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담장으로 둘러싸인 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산들바람이라도 된 마냥 그녀의 주변에서는 부드러워지고 조용해졌다. 명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감정의 결을 헤치고 걸어가 대문 앞에 섰다. 찰리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무거운 문고리를 잡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진동했다.
“계세요? 저희 왔어요!”
그 경쾌한 말투에 찰리는 급박했던 긴장감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왔어요 라니. 할머니 집에 놀러 온 것 같잖아.”
명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런 기분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지 뭐.”
바로 그때, 문은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휘몰아치던 감정들은 하나의 흐름이 되어 찰리와 명아를 문 안 쪽으로 밀어 넣었다. 감정을 세밀하게 느끼지 못하는 명아마저도 그 움직임은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휩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찰나에 둘은 이미 뜨락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둘의 등 뒤로 문이 다시 조용히 닫혔다.
둘의 눈앞에는 어마어마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담장 안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연못이 찰랑거렸고 정사각형의 맑은 연못은 신비로운 푸른빛 물로 가득했다. 가끔가다가 금빛과 붉은빛의 거대한 잉어들이 밑바닥에서 용처럼 꿈틀대는 물속은 마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 같았고, 물가를 따라 지어진 3개의 수려한 전각들 사이로는 반짝이는 반딧불들이 흘러나와 연못가를 날아다녔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모든 전각들이 바라보게끔 지어진 연못의 중앙의 섬이었다. 그 섬에는 그 누구도 여태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궁궐을 다 안을 것 같이 꿈틀거리는 둥치와 온 세상으로 뻗어나갈 듯 힘찬 모양새로 하늘을 뻗어나가는 그 나무는 생명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찰리와 명아는 적어도 수천 년은 되었을 것 같은 그 나무의 잎사귀 사이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반딧불들의 모습에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찰리와 명아는 잠시 넋을 잃고 궁궐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눈에 담았다. 그 안에는 사계절 모두가 녹아있었다. 봄꽃이 피고 지는가 하면 여름의 하늘이 걸려 있었고, 물가에 비친 것은 분명 타오르는 단풍이었다.
연못의 가장 먼 뒤쪽으로는 드높은 계단들이 나있었다. 그 꼭대기의 오래된 건물은 마치 전설 속 사찰이나 신당처럼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찰리와 명아는 곧게 뻗어진 그 계단 위, 너르게 퍼진 건물의 대청마루에 누군가 단정히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문도 모르는 둘의 앞쪽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왔구나. 다행이다 너무 늦지 않아서.”
그 높다란 대청 위에는 세월을 초월한 것 같은 나이 든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정좌한 채로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그들을 곧게 바라보았다.
찰리와 명아는 마루에 걸터앉아 나이 든 여성이 가져다준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겉모습만으로는 그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여성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때로는 장난기 가득한 10대의 눈빛이, 때로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깊은 현명함이 그녀의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이 든 여성은 둘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로 물어보았다.
“오는데 너무 힘들지는 않았니.”
찰리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힘들었지요. 지하수로를 통해서 왔는걸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래. 그런 것이 있었지. 나도 한 번도 그 길로 가본 적은 없는데 용케 찾았구나.”
오래된 여성은 긴 시간 전에 자신의 친구도 그 지하수로를 통해 이 후원을 찾았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오래 전의 사건이 인연이 되어 자신도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명아는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그럼 물길 말고도 다른 입구가 있는 거예요?”
“그럼. 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궁궐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이 있단다. 고대의 왕족들이 걷던 길이지.”
“음..? 그 길은 열쇠가 없으면 아무도 못 간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저희도 물길을 찾은 건데.”
나이 든 여성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구나. 열쇠가 없으면 걸을 수 없는 길이지. 하지만 열쇠가 있다면 굳이 못 지나갈 이유도 없는 길이란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근처 사라진 학교를 통하는 지하 샛길도 있지.”
“할머니는 어느 길로 들어오셨는데요?”
“나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왔단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자세로 앉은 채로 나이 든 여성의 입에선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사라진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자 만년성의 최후의 자물쇠란다. 그리고 너희가 찾아 헤매는 감정 기기들의 최초 발견자이기도 하지.”
명아는 찻잔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당황했다.
“자.. 잠깐, 그러니까, 감정 에너지를 개발한 한여름 여사..이신데..?”
“그렇지.”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셨다고요?”
찰리는 명아를 쿡 찌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을 과거형으로 말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한여름 여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렇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 그리고 그 두 가지 사실 덕분에 이 만년성의 최후의 자물쇠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그것이 너희가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단다.”
한여름 여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얘기했다. 수도 전체에서도, 궁궐 내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인 이 작은 전각은 이 동쪽 땅의 모든 감정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예로부터 인간과 자연은 정순한 감정, 혹은 기(氣)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소통해왔는데 이곳이야 말로 그 모든 감정의 최후 목적지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궁궐이 지어진 이유였고, 그 감정들을 오랜 기간 갈무리하기 위해서 미로와 같은 정원이 생겨난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무언가 아주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인간은 마침내 감정에너지를 인위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깨달았던 것이다. 특히 감정을 집약시키고 집중시키고 통제시키는 ‘감정 기기’들의 등장은 중대한 위기를 가져왔다. 감정에너지를 원활히 사용하기 위해선 본래 미세하게 흩어지는 성향이 있는 감정들을 집중시키는 매개체가 필요했다. 젊었을 당시에 감정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되었던 한여름 여사가 만든 것도 바로 그런 매개체였다. 감정을 집중시켜 에너지화시키는 기술은 감정탑을 짓는 원천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한여름 여사는 예기치 못한 문제에 맞닥트려야만 했다. 감정탑과 궁궐은 지나치게 가까웠고, 덕분에 수백 수천 년이 지나야 축적이 될 감정에너지가 한순간에 정원 내에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에너지가 한곳에 집중되자 마치 물이 흘러넘치듯 감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는 여러 가지 기현상이 시작되었다.
비밀의 정원 안은 현재 감정에너지로 포화 상태에 이른 것은 물론이고 과밀화된 감정에너지에 영향을 받은 각종 신비현상들이 대거 발견되고 있었다. 동식물들은 시간이나 종을 초월한 채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언어체계를 확립한 종도 있었고, 집채만큼 크게 자라 버린 괴수들도 있었다. 모든 것에는 생명력이 무서우리만큼 짙게 깃들어서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신화 속에서나 나오던 인형설삼이나 천년 하수오와 같은 식물들이 자라나는 것은 물론이고, 한여름 여사는 용이나 구미호 비슷한 것도 정원 깊은 곳에는 존재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신비와 현실이 다 섞여 드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여름 여사는 그것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라고 짤막하게 끊어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인 이 연못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본래도 각지의 감정이 다 모여들던 이곳은 이제 포화상태의 감정 저장고가 되고 있었다. 문제는 포화상태가 지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감정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끊임없이 감정을 삼키고 축적하는 무언가가 연못 밑바닥에라도 있는 건지 에너지로 환산하면 도시 몇 개쯤은 사라지고도 남을 무시무시한 감정들이 연못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그 감정들이 정원 밖으로 터져나가지 않도록 긴 시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어느 순간 한계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 가득 차 만월이 되는 순간, 연못 안에 담겨있던 모든 감정은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야말로 만월의 밤이었던 것이다.
찰리와 명아는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이 이야기를 넋을 잃고 들었다. 그리고 예견되어있던 만월의 밤에 자신들이 도착한 것이 어떤 종류의 운명이 아닐까 의심해야만 했다. 둘은 이 거대한 사건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한여름 여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희는 그저 이 기계를 원주인이신 한여름 여사님께 가져다 드려야 한다고, 그래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 온 건데요.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한여름 여사는 그리움 글썽이는 눈빛으로 손에 들어온 란을 어루만졌다.
“란이구나. 란이가 마침내 돌아왔어. 그래 아이야. 너희가 란아를 데려온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지.”
한여름 여사는 자신이 마주친 최초의 감정 기기가 란이며, 자신이 긴 시간 동안 프로그래밍하고 업그레이드하여 마침내 감정 이론을 정립하게 해 준 것도 란이라고 얘기를 했다.
한여름 여사는 부드럽게 란을 쓸어 만지며 찰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감정에너지가 기이하게 집중된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가끔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가 맞닿는단다. 란이 사라지기 전 열렸던 감정의 문 틈새에서 나온 존재는 이 문이 분명 다시 열릴 거라고 그랬었어. 그리고 이 문이 열리는 시점에 란과 함께 나를 도와줄 조력자가 분명 한 명쯤은 나타날 거라고 말야. 그게 아무래도 너인 것 같구나. 네 주변에서는 감정이 꽃처럼 노니는구나. 이처럼 강렬하게 감정을 빨아들이고 흡수하는 사람은 여지껏 거의 없었지. 힘든 삶을 살아왔겠구나 찰리야.”
찰리는 길었던 지난날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수준의 일들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이상 누구도 쉽게 죽지 않는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웠다.
한여름 여사는 찰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잘 버텼다. 그리고 여기가 새로운 시작이자 끝이겠구나. 오늘 밤, 만월과 함께 감정의 문이 열릴 테지.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감정을 삼키는 네가 열쇠다. 네가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저 문은 모든 것을 다 토해내며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거야."
찰리가 그 말을 이해했건 하지 못했건 밤은 서서히 찾아들고 있었다.
밤은 천천히 길어져갔다. 하루는 아주 천천히 아문다. 마지막 빛이 사그라지며 세상을 봉합하고 있었다. 밤의 흉터 사이로 온갖 감정의 마귀가 날뛴다. 그것은 욕망이기도 쾌락이기도 행복이기도 평온이기도 했다.
찰리와 명아는 연못가 정자에 앉아서 한여름 여사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수없는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그 작은 몸에 어찌 그리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새벽이 올 때까지 이야기로 밤을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에 빠진 작은 곰자리와 처녀에게 길들여진 전갈자리의 이야기가 어둑해지는 세상을 아른거렸고, 길 잃은 방울뱀과 눈먼 토끼의 이야기는 차가워지는 저녁 공기를 따사로이 데웠다. 찰리는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맸다. 어느새 그도 미래와 현재를 잇는 열쇠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그들에게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명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찰리는 세상 어디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이곳에서라면 자신이 감정에너지를 다룰 수 있을 것을 알았다. 찰리는 손 안에서 보이지 않는 끈을 가늘게 꼬았다. 마치 거미집을 잣는 거미처럼 손 안에서 박동하는 감정을 느리게 꼬고 또 꼬았다. 그 안에는 아릿한 그리움과 오래된 절망이 녹아있었다. 그 해묵은 감정들은 하나의 기다란 끈이 되었다. 이 폭풍 너머의 세상과 자신을 잇는 끈 말이다. 찰리는 처음으로 다뤄본 감정에너지의 아릿함에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는 그 끈을 세상 너머까지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을 알았다. 천천히 눈을 감자 그 감정들은 밤하늘을 따라 널리 널리 퍼졌다.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그 인과의 끈은 연못을 천천히 뒤덮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에게 무언가 족쇄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찰리의 마음에서 한결 한결 끝없는 그물이 흘러나와 세상을 그득히 덮었다.
한여름 여사는 흐뭇한 미소로 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서 익혀온 것을 저 아이는 단 몇 시간 만에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동안 삼키고 담아내 온 짙은 감정들을 자기 자신만의 무언가로 바꿔내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조의 황홀함에 취해 세상을 직조해내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의 눈빛은 맞은편 전각에서 찰리를 바라보는 명아에게로 향했다. 명아는 위태로운 자세로 찰리의 모든 것을 다 눈에 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서는 단 한 올의 감정도 요동치지 않았다. 되려 모든 것이 흐름이던 이 곳에서 명아는 멈춘 채 세상을 담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기이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찰리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존재들이 끊임없이 노래했던 '약속된 존재'는 그가 분명했다. 하지만 찰리와 함께 온 명아에게선 찰리만큼 위험한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것은 찰리처럼 흐름을 만드는 종류의 자극적인 에너지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은밀한 채 위험해 보였다. 그 예민한 찰리마저도 약간의 이상함 말고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힘은 그 순간 흐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명아를 고정시키고 잡아주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그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 마치 쐐깃돌 같다고 여겼다. 감정이 멎어버리는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사람이라니, 변화를 만들고 변화로 살아가는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 번, 또 한 번 찰리에게서 흘러나온 감정의 그물이 요동치는 연못가를 감싸 안았다. 자그마한 연못에 가득한 감정은 그물 안에 갇힌 이무기처럼 용틀임을 해댔다. 한 번, 또 한 번 명아에게서 흘러나온 멈춤의 진동이 연못을 가볍게 뒤흔들었다. 연못 안의 기운은 억누르려는 서로 다른 두 성질의 사람이 못마땅한지 점차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깨달으며 전각을 따라 설치해둔 감정 제어의 진을 발동시켰다. 차분한 감정들이 느릿하게, 계산된 장치들을 따라 연못 안의 기운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연못은 놀라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마냥 놀랍고도 환한 빛이었다. 그리고 가득 찬 만월의 빛이 연못 위를 정확하게 향하는 순간, 세상이 개벽하고 말았다.
그건 절대로 유쾌한 폭발은 아니었다. 연못이 열리는 순간 찰리와 명아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며 빛을 내던 연못은 이제 심연의 동공처럼 크고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억압되고 고이던 감정들은 형체를 지닌 채 연못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찰리가 익히 봐온 그림자인간들과 비슷했지만 훨씬 크고 맹렬한 기운을 띄고 있었다. 군데군데 튀어나온 날카로운 갈기와 질질 흐르는 침, 역관절과 여러 개의 부속지까지-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것들이 못 속의 세상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찰리의 눈에만 보이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괴물의 부속지가 찰리가 서있는 전각의 난간을 휙 하고 잡아채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난간은 요란하게 부서졌고, 괴물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못 속의 세계로 사라져 갔다. 찰리는 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한여름 여사를 쳐다보았다. 한여름 여사는 굳건한 눈빛을 보냈다. 계속 그물을 만들어. 저것들이 나오게 해서는 안 돼.
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왜 연못에서 이것들이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여태까지 봐온 그림자인간들과 이것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묻고 또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명아는 못이 열릴 때의 충격으로 나동그라져 기절해 있었다. 찰리는 명아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연못의 기운이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수백수천의 괴물들이 못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찰리는 감정의 진을 운용하는 한여름 여사의 기운이 급격하게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못의 밑바닥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태동하고 있었다. 수면 위를 뚫고 나오기 위해 쿵쿵 울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찰리는 안간힘을 다해 그물을 자았지만 역부족인 것을 알았다.
연못 표면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그림자는 용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거대한 웃음소리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백의 마귀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허공으로 솟구친 거대한 생명체는 스스로를 휘감고 또 휘감으며 압축하더니 거대한 검은 까마귀 같은 형태가 되었다. 찰리는 그 괴물이 그물을 끊고 곧 날아갈 것임을 알았다. 찰리가 만들어놓은 감정의 그물은 그 무지막지한 날갯짓 앞에서 금세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튀어나온 마귀들이 기절해있는 명아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미 진은 깨진 상태였고, 그녀로선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가 사람에 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나이가 무색한 바람 같은 발걸음으로 명아를 향해 뛰었다. 검은색 그림자는 쇠꼬챙이 같은 검은 팔을 들어 명아를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한여름 여사는 손을 쭉 뻗어 긴 감정의 속박끈을 만들어 던졌다. 속박의 끈은 마의 팔에 정통으로 걸렸지만, 그 정도로도 마의 행동을 잠시 동안밖에는 저지할 수 없었다. 마귀는 손을 높게 들었다가 강렬하게 내리꽂았다. 한여름 여사는 멀리서 찰리가 "안 돼!"하고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찔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작 무서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난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한여름 여사는 눈을 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괴물이 명아를 찔러가는 것을 본 찰리는 살면서 느껴온 괴로움과 답답함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생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다시 봐야 한다는 두려움, 그 뒤 닥쳐올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는 찰리에게 놀라운 힘을 선사했다. 찰리는 두 팔에 맺힌 불꽃같은 감정을 휘둘렀다. 그 감정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사그라트렸다. 분노의 업화는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의 마를 태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명아를 찔러가는 마귀를 막을 수 없었다.
한여름 여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분명 명아는 기절해있었다. 하지만 명아를 찔러가던 마귀는 명아의 주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에 씌이는 것과는 분명 다른 현상이었다. 명아는 마가 낀 사람에게 나타나는 그 어떤 특징도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평온하게 기절해있었다. 한여름 여사가 당혹을 가다듬기도 전에 수십 마리의 마가 명아의 전각을 휩싸며 덮쳐 들었다. 결과는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흡수라도 되는 마냥 명아의 몸을 찌르고 깨물고 짓누르는 모든 마귀들은 차례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어떠한 위해도 그 작은 소녀의 몸에 끼치지 못한 채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 떼 마냥 이지를 상실한 마귀들은 전각으로 물밀듯이 짓쳐 들어갔지만, 그만큼 차례로 사라져 갔다.
분노의 업화를 휘두르던 찰리는 점차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허공에서 그물을 뜯던 거대한 까마귀는 밤을 삼키며 찰리에게로 날아들고 있었다. 분노로 가득한 손 안의 불마저도 그 까마귀는 부리로 가볍게 튕겨냈다. 그것은 검은 부리와 검은 눈빛을 빛내며 찰리의 앞에 거세게 내려앉았다. 그것의 웅얼거림은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공포를 찰리의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네가 이 문을 닫는 열쇠인가."
찰리는 어느새 차가운 공포가 두려움과 분노의 불길을 꺼트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까마귀는 부리를 탁 튀기며 다시 말했다.
"그물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무슨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군. 네 죽을 곳은 네 알아서 선택하거나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 같으니."
그 순간 찰리는 자신의 어두운 마음속으로 무언가 이상한 것이 스미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마치 타인의 격렬한 감정 같으면서도, 너무나 이질적인 자기 자신만의 것이었다. 찰리는 그 순간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 완벽하게 깨달았다.
찰리의 감정 그물은 까마귀만큼 검은빛으로 변했다. 세상을 삼키는 것 같은 기세로 축소한 그 그물은 검은 까마귀의 날개에 진흙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은 채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당혹한 채 검은 까마귀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단 까마귀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못을 빠져나온 모든 마귀들은 몸을 옥죄는 그물에 발버둥 쳐야만 했다. 아직 채 수면 밑 세계에서 올라오지 못한 괴물들은 수면 위에 단단한 검은빛 장막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장막은 조금 전 한여름 여사가 얽기 설기 쳐놓은 감정의 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거대한 괴물들이 아무리 머리를 박아대도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찰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쫘악 폈다가, 손 안의 것을 으스러트리는 마냥 꽈악 쥐었다. 조금 큰 마귀들은 그대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터져나간 그것들은 검은 연기가 되어 공중에 감정의 잔재로 사라져 갔다. 검은 까마귀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 폭풍 같은 고함은 장원을 온통 뒤흔들며 메아리로 남았다. 찰리는 한 번 더 손을 꽈악 쥐었다. 남아있던 대부분의 마귀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폭풍 같은 비명을 내지를 까마귀는 가까스로 그물을 떨쳐냈다. 단 한 번의 놀라운 날갯짓으로 까마귀는 하늘 저 멀리 솟구쳤다. 찰리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모아 까마귀를 향해 쏘아 보냈지만 까마귀는 어느새 공간 저 너머로 희미해져 있었다.
찰리는 무의식을 장악하던 타자적 힘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찔해지는 느낌과 함께 그의 안에서 무언가 울컥 흘러나왔다. 그림자같이 옅게 흘러나온 그것은 천천히 고이며 형체를 이루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다고 생각하며 찰리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