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을 향해 빛나는 별 5화

5화 : 만년성과 이 시대의 마지막 공주

by 이원호

Chapter 5: 만년성과 이 시대의 마지막 공주



명아는 하루 종일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열심히 써본 기획기사는 망신을 당했고, 글을 쓸 시간도 없이 이런저런 잡무에 치여서 바빴다. 그래서 사실 중요한 선택을 한 찰리에게도 신경을 써줄 새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던 명아는 겨우겨우 퇴근을 마친 뒤에 부지런히 찰리를 향해 걸었다. 멀리서 보이는 찰리는 핸드폰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명아는 하루 동안 한 번도 짓지 않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찰리. 그래도 무사히 하루를 마쳤네.”

“아직 아니야. 굉장히 이상한 하루였어.”

“왜? 또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 요동쳐?”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일이야.”

찰리는 손에 있는 금빛 기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명아야, 혹시 ‘란’이라는 기계에 대해서 알아?”

“음? 란? 뭔가 역사시간에 들은 것 같은데.. 감정탑하고 관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최초의 감정에너지를 사용한 기계잖아! 유명한 통역기.”

“아 이게 세상의 첫 번째 통역기야?”

“엥? 이게 그 란이라고?”

“응. 어쩌다 보니 얻게 되었어.”

“이거 무슨 역사서에서나 나올 법한 유물인데 이런 걸 선물 받았다고?”

“선물은 아니고 잠시 맡아놓은 건데 첫 주인을 찾아야 한다네. 혹시 역사서에 이 기계의 원래 주인도 나와있을까?”

“음.. 뭔가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로는 감정에너지를 발견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거든. 아! 생각해보니 그 사건들도 고도(古都)의 중심지인 이 부근에서 있었다고 들었어! 지역 도서관에 가면 나오지 않을까?”

명아의 그 말을 듣고 찰리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들이 앉아있던 공터야말로 지역을 담당하는 오래된 도서관 앞의 공원이었던 것이다.









“서가 1289B.122.33. 이 책인가 보다. 169페이지.. 여기 나와있네.”

명아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책장을 훑었고, 곧 놀라운 이야기가 활자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그 화해의 장에서 그 놀라운 기기 ‘란’은 양측 진영의 입장을 조율해내는데 지고한 역할을 해냈다. 이 당시의 파장으로 인해 감정에너지가 마침내 사회 전반에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란’을 개발한 무성 연구소는 후에 헌정의 의미에서 당시 사태에 희생된 ‘이가을 번역가’에게‘란’을 선물했다.』

찰리는 설명문을 읽으며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이가을 번역가? 그런 사람은 처음 듣는데?”

“나도! 그것도 검색해보면 나오겠지 뭐.”

『이가을 – 번역가, 감정에너지의 최초 발견자 중 한 명. 감정에너지에 기반한 통역을 통해 분쟁 단체들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었다. 근대 문명의 역사에 큰 기여를 했으나, 문화광장 폭동 당시에 사망했다.』

“음? 거의 7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감정에너지를 발견한 사람인데 되게 안 유명하네. 발견하자마자 요절하셨나.”

그쯤 되어서 찰리는 당황하는 것 말고는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찾아야 하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니, 이거야 말로 오갈 데 없는 수수께끼인 셈이다. 안절부절못하는 찰리를 보며 명아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걸 찾는 게 왜 중요하다고?"


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림자인간들과의 조우와에 대해 말한다면 명아가 믿어줄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처럼 헛소리 취급할지도 모른다. 찰리 자신도 일어난 일들에 대한 확신이 없을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반응이 어떨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찰리는 이야기를 약간 변형해서 얘기했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억지로 쥐어주었다고, 이 장치의 작동방법을 알아와야지 살려준다고 협박했다고 말이다.

찰리 본인도 그다지 믿기지 않을 만큼 부실한 이야기였는지라 그는 명아가 어처구니없어할까 봐 잔뜩 겁을 먹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명아는 얼굴에는 감정이 가득했지만 찰리는 그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명아는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말했다.

"당장 그 사람의 무덤이라도 찾아가자. 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찰리. 지체할 수 없어.”

찰리는 그 오밤중에 낯선 번역가의 무덤을 찾아가자는 명아를 말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날 밤 찰리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온갖 종류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뒤를 쫓는 밤이었다. 그동안 말을 걸지 않았던 감정들은 이제 찰리에게 짙고 음습한 이야기들을 건네었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었다. 검은 입을 크게 벌린 죽음이 찰리를 기다렸다. 그것은 찰리가 생각했던 그 어떤 죽음과도 달랐지만 동시에 달콤하고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찰리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를 통해 악몽에서 깨어났다. 받자마자 귓가에는 달뜬 명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아냈어! 알아냈다고!"

찰리는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약간 데시벨이 낮아진 이후에 대답했다.

"뭘 알았다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지 알았어!"

찰리는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그 공포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 굴려본 뒤에 약간 순화해서 질문했다.

"사령술이라도 배운 거야?"

"하하. 짱 웃긴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하나도 안 웃겨. 이제 조용히 하고 들어 봐. 그 기계의 첫 '주인'은 그 번역가가 아니었어. 그는 선물 받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때 즈음해서 이미 세상을 떠났었고,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것은 한여름 여사야."
"한여름 여사? 그게 누구지?"

"이 바보야. 감정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설계한 프로그래머 있잖아! 이거 봐봐."

명아는 어느 오래된 신문의 기사를 읽어주었다.

<감정 기기의 최초 사용자는 한여름 여사로 알려져 있다. 문화광장 사건에서 희생된 이가을 씨에게 기증된 최초의 감정 통역 기기 '란'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 한여름 여사의 수중에 있었으며, 후에 한여름 여사가 만들어낸 감정 제어 프로그램의 기반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여름 여사의 독보적인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감정 통역기들은 전반적으로 성능 면에서 한여름 여사가 직접 프로그래밍을 한 ‘란’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 그럼 최초의 사용자가 한여름 여사라는 거네.”

“응. 빼어난 프로그래머이기도 한 한여름 여사는 사실 감정 언어체계 전반을 프로그래밍 언어와 접합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 대. 그런데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잖아.”

"괜찮아. 그래도 번역가 무덤 찾아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도 한 번 알아볼게.”

하지만 그 날 하루 종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찰리와 명아는 한여름 여사의 종적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출생기록은 무려 90년 전이었지만, 사망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기록에 등장한 것이 23년 전 감정탑 완공 행사 때뿐이었으니 오리무중이었을 뿐이다. 각자 동사무소와 국가 사망기록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던 찰리와 명아는 점심때쯤 탈진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앞뜰에 앉아서 찰리는 명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리며 부산히 자료를 뒤지고 있을 명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져오고 있었다.

"명아야. 그쪽은 좀 진전이 있어?"

"아니... 국가기록 보관소 쪽에도 전혀 없어. 이렇게 유명한 분이면 분명 별세하셨을 때 기록이 있을 텐데 말이야."

"아직 안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70년 전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 당시 평균수명은 130세잖아.”

"내 생각에도 아직 안 돌아가셨을 것 같아.”

"응. 근데 이 쪽에는 출생기록이 엄청 많아서 뒤지는데 오래 걸렸어. 하지만 막상 찾아보니 사망신고는 별로 없네.”

"그래? 이 쪽도 마찬가지인데. 혹시 돌아가셔도 신고 안 하는 집안이 많은 건가?”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그냥 더 이상 사람들이 잘 안 죽는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니 좀 무서워! 난 점심 먹고 좀 더 찾아볼게 전화 잘 받아!”

"응.”

찰리는 전화를 끊고 다시 서가로 기어들어가던 중, 한 권의 책에 눈길이 갔다. <만년성의 비밀>라고 쓰여있는 그 책에는 오래된 가죽 표지 위에 빛바랜 별이 하나 수놓아져 있었다. 그제야 찰리는 어제 란이 꺼지기 직전에 만년성과 마녀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출력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호기심에 빠진 찰리는 잠시 멈추어서 책을 열었다.

그 오래된 책에는 고도의 수많은 신비가 수록되어 있었다. 감정에너지의 발견 이전부터도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왕조들은 기운(氣)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땅이나 물, 건물에도 다 기운이 깃든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 기운은 현대의 감정에너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긍(肯)의 감정이 가장 강하게 모여든 곳에 고도를 세웠다는 것이다. 특히 궁궐의 위치를 사방의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는 ‘만년성’의 자리에 잡았는데, 이는 서쪽의 음기, 동쪽의 양기, 남쪽의 긍기, 북쪽의 부기가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책에서는 만년성의 위치에서 때때론 비정상적인 감정에너지의 맥이 생겨나는데, 이 덕분에 세상 어느 곳보다도 감정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찰리는 그 내용에 푹 빠져서 읽던 중 허리춤에서 진동이 오는 것을 느꼈다. 문자가 왔나 싶어서 확인해보았지만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 이후에도 허리춤에서는 계속 진동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은 뒤에야 찰리는 주머니에 란을 넣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통신기기처럼 란은 진동을 울려대고 있었다. 찰리는 화면 위에 나타난 약간 철학적인 문장을 읽었다.

- 넌 뭐냐?

찰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장을 보냈다.

- 나는 납니다??? 철학 수업인가요.

- 잡소리는 집어치워. 넌 나를 꺼트렸어. 어떻게 한 거지?

- 그러게요. 고장 난 거 아니었어요?

- 나는 고장 나지 않아.

- 그런데 왜 꺼져요.

- 그러니까 너는 뭐냐는 거다. 네 주위엔 오래된 감정과 해묵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쳐. 어떻게 나를 꺼트린 거지?

- 뭔 소리예요. 내 주변에 있는 다른 감정 기기들은 고장 난 적도 없는데. 5000년 어쩌고 저쩌고 했죠? 오래되어서 고장 났나 보네.

-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고?

- 네. 떨어트리거나 밟지 않는 이상은요.

- 것 참 이상하군.

- 인공지능 기계랑 대화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평범한 일은 아니에요.

- 나는 인공지능이 아니야.

- 어.. 그럼 뭐죠.

- 말했을 텐데. 오래된 감정의 집합체라고. 인공지능보다는 유령, 영령에 가깝겠지. 최근 뭔가 감정의 이상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나?

- 감정의 이상상태요?

- 그래. 너라면 주변 감정들이 느껴지겠지. 그 감정들이 요동치거나 평상시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인 적 없어? 이상한 일이군 정말. 아직 마(魔)가 등장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야.

- 마귀요?

- 그래그래. 그러고 보면 너는 아직 마귀를 보지는 못했겠군? 아. 네가 그 사건의 당사자였나? 이제 차츰 헷갈리는걸. 네가 이 세계에 마를 들여놓는 장본인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찰리는 갑작스레 불거져 나온 이 황당한 비난에 잠시 당황하여 손가락이 떨렸다.

-제가 세상에 악마를 불러들인단 말이에요?

- 그래. 네가 평생 원했던 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찾아.

- 뭐를요?

- 내 첫 주인을. 그녀가 없이는 나도 말할 수 없어. 내가 이 시간대에 들어온 것에는 그 목적을 완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찰리는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 뭐가 뭔지 똑바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뭘 어떻게 찾으라는 거냐.

- 어쭈? 감히 반말을 해?

- 반말하면 뭐. 어쩔 건데. 말로 혼낼 거냐? 또 공포감 조성하면서 꺼져버리게?

-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텐데.

- 지금도 별반 도움이 되고 있지는 않아 너인지 당신인지 모를 해괴한 것아.

- 죽음을 목전에 두니 짜증이 났나 보군. 평생 동안 바라마지 않는다고 확신하던 것마저도 막상 눈앞에 도래하니 두려운가. 가련한 인간 같으니.

그 말에 찰리는 역정을 냈다.

- 내가 죽는 건 그렇게 두렵지 않지만 네가 박살 나는 건 어떨지 한 번 시험해볼까!

하지만 되려 란위에 나타난 메시지는 차분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 찰리는 더 이상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 24시간 뒤. 해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지는 순간에. 하루의 첫 번째 만년성이 뜨는 순간에. 그 문은 한 번 열릴 거야. 그 안에 찾아야 해.

- 그래서 그게 어디입니까......

- 이 땅 위에서 감정이 가장 짙은 공간. 저 드높은 감정탑 마저도 그 공간을 가리기 위해 지은 거짓말에 불과하지. 그곳에 그녀가 있어. 그녀는 마지막 문을 닫고 있지.

찰리는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단서를 얻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모든 감정이 모여드는 곳, 감정탑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때마침 찰리의 무릎 위에 펼쳐진 책 위에 그곳의 사진이 반짝거렸다. 그곳은 오래된 고도에서 사람의 발길이 드나들 수 없는 유일한 만년성의 장소, 비밀의 정원을 지칭하는 수식어였던 것이다.






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