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거미에게 거는 말
Chapter 4 : 거미에게 거는 말
겨울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찰리는 틈틈이 명아를 만났고 그만큼 둘 사이의 인터뷰는 아주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대신 찰리와 명아는 도서관과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감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감정이 모여 어떤 작용을 하는지, 왜 찰리에게만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 생겨나는 것인지 둘은 함께 조사를 했다. 대단한 소득은 없었지만, 어느새 둘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소득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찰리가 학교로 돌아갈 날이 되었을 때, 명아는 얇고 멋진 만년필을 하나 사주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모든 변화를 기록해보라고, 아마 꽤 멋진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찰리는 머쓱해하며 그 고마운 선물을 받아 들었다. 그 펜은 명아가 쓰는 것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고 덕분에 찰리는 마치 특별한 사이라도 된 것 같은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 펜을 주머니에 넣은 채라면 학교건 어디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찰리는 굉장히 오랜 시간 만에 밖에도 나가고 싶고 글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로 가는 첫날, 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아주 특별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게 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대기 중에 가득했던 것이다. 안경은 갑자기 어디다 놓고 잠들었는지 알 수 없었고 일순간 오늘 무엇을 하려고 계획했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찰리는 갈 길을 잃은 묘한 기분 속에서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운 채로 시작하면 특별한 일들이 깃들기 마련이라고 자기 자신을 다독이면서 말이다. 좋은 일이 깃들지, 나쁜 일이 다가올지 그건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런 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특별한 일은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쁘건 좋건 상관없이 멋진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찰리는 가방을 챙겨서 식탁에 앉았지만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찰리는 이 역시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냉장고를 뒤져본대도 신통방통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던지라 찰리는 시원한 물만 한 잔 들이켜고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명아는 물을 많이 마시면 살도 빠지고 건강해진다고 그랬던 것이 기억났다. 너무 창백해 보이면 감정 뱀파이어처럼 보일 테니까 좀 혈색이 돌 필요가 있다며 말이다. 그 말을 하는 명아의 모습은 꽤나 진지했던 것이라 찰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물과 행복한 기억을 마시니 기운이 좀 났는지라 찰리는 경쾌하게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찰리는 아무도 없는 대문에다 대고 ‘학교 갔다 올게!’하고 마음속으로 외쳤고, 덕분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신발 끈을 묶는 손놀림이 서툴러지고 말았다. 학교 갔다 올게- 라니. 초등학생이 때로 돌아온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근 몇 년간 저 말을 외칠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학교에 돌아가는 것도 1년 만이다. 오랜만이라 조금 들떠있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학교 다녀온다는 생각을 자꾸 떠올려서 확인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기쁜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찰리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경쾌하게 대문을 나섰다.
이상한 일들은 버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철제 촬영 가방을 들고 있던 대학생 아가씨는 찰리의 발등 위에다가 그 무거운 가방을 떨어트렸다. 잠시 멍해지는 아픔 속에서 인상을 쓰자,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고 미안하다는 말만을 거듭했다. 버스 아저씨는 정류장을 조금 지나친 채로 정차했고, 정류장의 승객들은 비둘기 떼처럼 열린 버스 문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상한 기분에 시계를 보니 8시 08분이었다. 명아는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는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그랬었다. 찰리는 잠시 마음속에서 명아를 그려보았다. 명아는 특별한 일이 생길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어쩌면 정말 특별한 일이 생기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출석부에는 찰리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간 행정실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해댔다.
“죄송한데, 복학 조회가 안되시는데요?”
찰리의 신상정보를 신나게 두드려본 뒤 단발머리의 교직원은 눈썹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마치‘오늘 짜장면은 주문이 안 되시는데요?’하는 것과 비슷한 말투여서 더 의아했을 뿐이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뭔가 오류가 있나 봐요. 일단 학적상으로 등록은 되어계신데, 복학 처리를 하려고 하면 오류가 떠요.”
찰리는 물끄러미 책상 너머의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학기 복학은 못하는 건가요?”
교직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미안해했다.
“분명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오랜만에 학교 나오셨는데 헛발걸음하게 해서 죄송하네요.”
“어쩔 수 없지요. 다 처리 완료되면 전화 주시나요? 그때 다시 와야 하는 건가요?”
“그런데 다음부터는 인터넷으로 복학신청을 하실 수 있으니 인터넷으로 등록만 해주셔도 돼요! 지금처럼 번거롭게 안 오셔도 되고요.”
“인터넷으로 등록을 하면 여기서 처리를 해주시는 거죠?”
“네. 그렇죠.”
“그럼 인터넷으로 등록을 했어도 지금쯤 똑같은 오류를 겪고 계시겠네요.”
여직원은 잠시 당황하다가 생긋 웃었다.
“그래도, 헛발걸음은 안 하셔도 되잖아요.”
찰리는 여직원의 웃음 속에서 당혹과 미안함과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죄책감과 부담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았다. 찰리는 살면서 헛발걸음이 아닌 순간이 얼마나 되고, 또 헛발걸음이라 할 만큼 낭비되는 순간이 얼마나 있겠느냐 싶었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 다시 오면 되겠냐는 찰리의 질문에 여직원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조치 취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 해결되면 바로 전화드릴게요. 영 처리가 안 되면 퇴학되신 거니까 그래도 전화드리고요. 전화번호는 여기 적혀있는 그대로 이시죠?”
찰리는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좀 이상한 농담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여직원이 자신을 빨리 쫓아내고 싶어 한다는 감정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렸다. 안녕히 가시라고 유쾌하게 말하는 여직원의 모습에서 이상하리만큼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맞닥트리다니, 역시 특별하고 이상한 일들로 가득한 하루가 되려는 것 같았다.
행정실에서 나올 때쯤 되어서 세상은 아예 작정이라도 했는지 찰리의 하루를 다 꼬아놓고 있었다. 오전 내내 하기로 한 일들은 신통방통하게도 다 엉망진창이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잠시 만나기로 했던 은하 누나는 늦잠이라도 자는 건지 전화를 받지를 않았고, 간만에 책이라도 읽어볼까 싶어서 들어간 도서관은 찰리의 출입증을 무슨 벌레 뱉듯이 토해냈다.
-삑. 사용기간이 만료된 출입증입니다.
이쯤 해서 찰리는 매우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뭔 개소리야. 복학생은 도서관 출입도 안 시켜 주냐. 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직 복학 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어쩌면, 학교에 제대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 시설을 이용하게 해 주는지도 모른다. 돈을 낸 것이 확인되어야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교육기관인데 돈 확인이 안 된다고 이렇게 무례하게 카드를 뱉어내는 건 좀 너무하잖아. 찰리는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땅바닥에서 카드를 집어 들고 도서관을 도망치듯 나서야만 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찍은 교통카드는 잔액이 10원 부족해서 찰리를 튕겨냈고, 철제 몽둥이에 얻어맞는 기분으로 나동그라진 채 찰리는 슬슬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쯤 되어서야 이미 평범한 하루가 아니다. 어디 교통사고가 나거나 입원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서 슬슬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셈이다. 운수가 대통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운수가 대박 나쁜 날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 쓰건 말건 지하철은 배차간격 조정을 한답시고 찰리의 정거장을 한 정거장 남겨두고 20분간 정차해 있는 풍경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를 몰라서 결국 찰리는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버린 뒤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운이 나쁜 하루라면 어디 고층빌딩에서 피아노가 떨어져서 맞아 죽는 불상사를 겪을지도 모른다. 괜한 생각에 흠칫 겁을 먹은 찰리는 빌딩 사이의 그늘을 피해서 걸었다. 빌딩 골목 사이의 그늘에서는 고양이 두 마리가 날카롭게 울어대고 있었다. 겨울철이라 마음이 많이 추운가 보다. 찰리는 그 순간 주변의 감정이 급속도로 냉각하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삶은 언제나 징조들을 먼저 보내온다. 그건 마치 버스 창문에다가 집을 짓고 있는 거미에게 수많은 경고와 조언과 징조들을 던져지는 것과 같은 일이다. 엔진이 부르릉거리며 떨리는 진동, 사람들이 창문을 똑똑 두드리면서 ‘안 돼, 거기다 집 지으면 망한다고’ 하고 걱정하는 소리, 이상하리만큼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자꾸만 땅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 이 모든 것들이 거미에게 그곳에 집을 지으면,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날아가 버리고 말 거라고 이미 다 얘기해주고 있다. 하지만 거미는 개의치 않고 꿋꿋이 집을 짓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다 집을 지으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이렇게 많은 징조들이 있다면 하나도 모른대서야 그게 더 이상하다. 하지만 거미는 작고 세상은 크기에, 그 짙은 의미가 담긴 메시지들을 거미는 하나도 읽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거미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어쩌면 잘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이곳에서라면,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인간도 그렇다. 세상은 우리에게 수많은 힌트를 주고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지만, 사람은 귀 기울이지 못하고, 망상이겠지 하며 무시한다. 그리곤 희망을 갖는다. 내가 만든 선택이기에, 나를 옳은 방향으로 데려가리라고 믿어버린다. 그래서 버스 창 위의 거미처럼, 가느다란 실 하나에 매달린 채 무서운 속도로 멀어지는 세상을 붙들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살아가곤 한다.
그때의 찰리는 몰랐다. 세상이 거미에게 말을 거는 방법은 감정을 통해서인 것을 말이다. 그리고 세상은 줄곧 감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찰리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걸어오는 내내 찰리의 머릿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일까. 세상은 대체 내게 어떤 의미를 보내오고 있는 걸까. 온 우주가 다 말해주고 있지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해진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찰리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덜컥 겁이 나고 괜시리 걱정이 되는 마음이 짓쳐들었다. 내게 가까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또? 이제는 그런 일들을 견딜 수 없는데. 찰리의 걱정은 전화기를 꺼내고 번호를 눌렀다. 수화음이 울리는 내내, 심장도 같이 박동하고 있었다. 받아야 해. 꼭.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여보세요?”
“명아.”
“응 찰리. 웬일이야. 학교는 잘 다녀왔어?”
“응. 이제 집에 가고 있어. 복학 처리하는데 오류가 좀 생겨서 나중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아.”
“천천히 해. 오늘 이렇게 간 것만으로도 대견해.”
“그럴게.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출근은 잘했어?”
“그럼 그럼. 요샌 착실히 잘 다니고 있다고 이상한 사람 인터뷰 안 하구.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인 너도 점심 잘 챙겨 먹고. 저녁때 보자.”
“그래. 명아야”
“응?”
“우리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으럼. 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있어?”
“그냥. 오랜만에 학교 가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너무 불안해 말고. 이제 다 잘 될 거야. 맘 편히 먹어!”
“그래. 좋은 하루 보내고 저녁때 보자.”
명아에게 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찰리의 마음은 그래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어쩌면 너무 과민반응인 걸지도 모른다. 또 혼자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호들갑을 떨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찾아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에도 기묘한 일들은 그치지 않았다. 유모차를 타고 가던 쌍둥이 아이는 찰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젖병을 떨어트렸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에그, 흙이 다 묻었잖아.’하며 멈추어 투덜거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국인 관광객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보지 않다가 인도 끝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곧 분명한 형태로 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문 앞에 섰을 때 찰리는 20여 년을 열고 닫은 대문인데도 이상하게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서늘한 3월의 겨울바람이 목깃을 훑고 지나간다. 으슬으슬한 열병 같은 기분이 잠시 옷 틈새, 채울 수 없는 영혼과 육체의 간극을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수 천 번은 더 열었을 저 문을 여는 게 두려워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걸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상한 기분에 아주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래도 그리움에 문을 연다.
찰리네 집의 강아지들은 찰리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당 건너편의 한 구석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찰리는 마음이 덜컹하는 기분이 들었다. 강아지들은 주춧돌 위에 네 발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꼬리도 젓지 않은 채, 그 투명한 갈색 눈동자로 마당 너머를 미동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짖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사람의 모습 너머를 가만히 보고 있는 그 시선에 기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어느 순간, 개들은 짖기 시작했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라도 있다는 마냥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오랜 기간 알고 있었던 일이 펼쳐졌다. 공간이 흩어지고 응축되며 흔들리다 굳어지며 나타난 것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뚜렷한, 그리고 눈빛을 형형히 빛내고 있는 그림자 인간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마냥, 어슴푸레한 그림자인간은 그 자리에 나타나 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찰리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책 속에나 나올법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찰리의 불안을 넘어 그것은 말을 걸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이 시간과 이 공간을 몇 천 번을 헤매었는지 모르겠다 아이야.”
"작은 감정들이 아우성을 치더구나. 이곳에 네가 있다고 말야.”
"아이야. 어서 말해다오. 내가 보이니.”
그것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 마냥 동시에 여러 가지가 들려왔다. 하지만 찰리의 눈에는 태곳적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던 것 같은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형체만 눈에 담겼을 뿐이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색채, 평범한 모습이다. 짙은 회색, 고풍스러운 형태와 먹으로 쓴 듯한 고운 선들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 인간 형태의 무언 가였다. 찰리는 자신이 알았던 세상이 아득하니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들은 본능적으로 짖는다.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 가까이에 있으니까 짖는다. 말이 없는 찰리와 시끄러운 강아지들을 번갈아보던 그림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공기가 대번에 내려앉았다. 경쾌한 겨울의 오후는 대번에 무거운 감정들로 가득해졌다. 강아지들은 낑낑거리며 툇마루 밑으로 숨었다. 찰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숨은 말이 되어 나왔고 그림자인간은 눈빛을 빛냈다.
"보이는구나. 보여. 보이는 것이 확실해. 말소리도 들리니? 움직임도 보이고? 이 모든 것이 다 느껴진단 말이지?"
"마침내, 드디어, 긴 수난이 끝나고 변화의 시간이 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오래 헤매지는 않았을 텐데."
찰리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신은 뭐죠. 대체 뭐예요."
그림자인간은 춤을 추듯 일렁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애도, 그리고 너의 마지막 여행의 길잡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본 자들이고 죽음 그 너머의 의미기도 하지.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인도자이자 동반자이기도 해.”
"그래 꼬마야. 우린 너를 찾아 600개의 세계와 6억 개의 삶을 헤매었단다."
찰리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내 눈에만 보이는 거죠. 내게 바라는 것이 뭐예요. 왜 나를 찾는 거죠."
그것의 대답은 뻔뻔하리만큼 담담하게, 기쁨으로 가득 찬 채로 들려왔다.
"그것은 말이다 아이야. 네가 죽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너의 죽음으로 세상은 완성된단다.”
겁에 질린 찰리를 곁에 두고 그것은 웃음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악령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섬뜩한 모습이었다. 찰리는 오래된 종교들이 말하던 악마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단 이름부터 그렇다. 애도라니, 무엇에 대해서 애도하던지 그것이 좋은 일일 리는 없었다. 뒷걸음치며 찰리가 돌아서려는 찰나, 그것이 다시 말을 걸었다.
"살고 싶니 꼬마야. 이 죽어가는 삶을 살고 싶으니. 물론 너에겐 살 기회가 있단다. 하지만 그럼 세상이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네 보잘것없는 삶을 지키기 위한 뒷걸음질은 참으로 무시무시하구나."
그 말은 찰리를 멈춰 세웠다.
"그게 무슨 말이죠?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왜 나를 죽이려는 거죠?"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꼬마야, 너는 누구보다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니? 그리고 꼬마야, 누구나 죽고 싶어서 살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은 아니지 않더냐. 나는 죽어서도 산 사람을 본 적이 없구나."
그 말은 찰리에게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단, 자기 자신을 토막 내고 흩뿌려 악마의 제사를 올릴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장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찰리 본인이라는 말은 기묘했다. 확실히 찰리는 오랫동안 삶을 이만 떠나가고 싶어 해 왔었다.
"말이 이해가 안 가요. 내가 죽고 싶어 했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아니 아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너는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지. 이 세상 모든 감정을 위해서라도 말야."
"왜 그렇죠 대체."
"네 주변에서 감정이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없니 꼬마야. 감정이 형태를 가지고 움직이고, 일렁이며 읽히는 선율이 되고, 미래와 과거를 잇는 거친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없니?"
물론 있었다. 찰리에게 감정을 읽는 것은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정의 춤이라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언가 약간 다른 것 같았다. 그 순간 찰리는 그동안 봐온 그림자인간들이 무엇인지 깨달아버렸다. 그들은 잔재였다. 그것도, 세상 만물에 깃들어있는 감정의 잔재였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감정의 잔류물들이 형체를 이루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당신들은... 감정이군요."
"그렇단다 꼬마야. 네가 매일 마주치는 감정의 퇴적물들은 소감정들이지. 소감정들과 소통을 하려면 지금보다도 더 예민해야 하는데 현세의 인류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구나. 우리는 대감정에 속한단다. 소감정 2천억 개 정도가 합쳐진 것과 비슷한 에너지양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니?"
찰리는 거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사실 이 대감정이라는 것이 자신을 토막 내거나 잡아먹을까 봐 여전히 두려웠다. 애도는 큰 눈을 껌뻑거리면서 말했다.
"아이야 너는 찾아야 해."
"무엇을 요?"
"사라질 방법을. 그리고 선택을 만들어야 해. 너는 이 세상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단다. 해가 질 거야. 세상을 이루는 해가 사라질 거야. 너는 사라져야 한단다."
이 괴상한 자살 강요에 찰리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애도는 약간 더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을 받아서 말했다.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 우리가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을 안다. 어차피 선택은 너의 것, 우리는 도와줄 수밖에 없을걸 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은 저를 당장 회쳐서 잡아먹지는 않을 거라는 말인가요?"
그 말에 그것은 쿡쿡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리가? 너를 말이냐? 감정이 인간을 삼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우리는 너를 선택의 미래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이지 너를 먹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럼요?"
"너는 찾아야 한다 아이야. 너의 선택의 순간을. 너는 반드시 그곳에서 선택을 해야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구나. 아직 감정의 폭이 너무 적어. 너는 반드시 감정을 풀어줘야 해. 아이야 너는 억압자이고 구원자이구나.”
"무슨 말이에요 대체.”
"그래. 그거다. 알을 사용해. 그녀가 아직 이 세상에 있었지. 알이 인도해줄 거야. 그럼 다시 얘기할 수 있겠지. 가자, 감정 밀도가 너무 희박해진다.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그것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찰리는 기겁을 했다.
"무슨 소리예요!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멀어져 가는 목소리로 애도는 대답했다.
"알을 사용해. 그녀는 그곳에 있어.. 그곳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칠 거다.”
희미해지기 직전, 그것은 손가락을 퉁겼고, 우울한 공기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한 장의 종이가 마법처럼 생겨났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게 끝이었다. 서명이 되어있지도 않았고, 자세한 설명이 붙어 있지도 않았다. 찰리는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를 찾으라니!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온갖 종류의 혼란을 초래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서야 무언가 새롭게 삶을 시작해보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 생긴 셈이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은 찰리에게 삶의 끝을 종용하고 있었다.
찰리는 편지를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편지지 뒤에는 정교한 동그라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문자 같기도 하고 기계어 같기도 한 그 문양은 깔끔한 하얀 편지지 위에 금빛으로 고풍스럽게 빛났다. 찰리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문양의 한가운데를 눌렀고, 그 순간 여러 조각들의 문양이 빛을 내며 한 조각으로 모여들었다. 다음 순간 찰리의 손에 남겨진 것은 주먹만 한 황금빛 기계였다. 핸드폰 같기도 하고 계산기 같기도 한 이 기계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으로 빛났다. 찰리는 기계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어떤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 자판을 누르면 문자가 잠시 화면에 표기되었지만, 곧 썰물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용설명서라도 있나 해서 편지의 구석구석을 다 만져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는 않았다. 찰리는 망연자실한 채로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명아를 만나기 전에 찰리는 잠시 은하 누나를 만났다. 덤벙대기는 해도 박학다식한 은하 누나라면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새로 생긴 파스타집에서 '왜 면을 포크로 먹어야 한다는 거야! 젓가락이 더 편한데!'하고 투덜거리는 은하 누나를 보던 찰리는 황금빛 기계를 눈 앞에 내밀어 보였다. 은하 누나는 멋도 모르고 기계를 받아 들며 물어보았다.
"이게 뭐야?"
"오늘 모르는 사람한테 선물 받았는데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몰라서. 혹시 누나는 뭔지 알아?"
은하 누나는 누구한테 뭔지도 모르는 선물을 받았냐고 물어봤고 찰리는 그냥 철 지난 생일선물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글쎄, 구세대 감정 통역기 같기는 한데 어떻게 작동시키는 건지는 모르겠네."
"감정 통역기라고?"
"응응 한 70년쯤 전에 개발된 것 있잖아. 여자 언어랑 남자 언어를 효과적으로 판독해줘서 커플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 있었대. 박물관에도 많아. 성능 좋은 감정 통역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다 통역할 수 있었다던데."
"근데 왜 요새는 안 써?"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이 '정확하게' 파악되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거든. 사생활 침해다 뭐 다해서 감정 통역 방식보다는 언어의 직접적 통역 방식이 다시 주류로 자리 잡았지."
"그래? 이건 감정 통역 방식이라는 거지?"
"응 근데 작동하지를 않네. 문자가 새겨지는 걸 보니 배터리는 있는 것 같은데. 문장을 완성시켜야 하나? 감정에너지로 구동되는 건가? 난 잘 모르겠다야."
은하 누나는 곧 통역기에 관심을 잃었고, 둘은 저녁을 먹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요새 별 고민은 없어 찰리?"
"고민? 많지. 누나는?"
"나도 그래. 사는 건 고민이지. 네 고민은 뭔데 찰리이이 귀여운 꼬맹이가 왜 맨날 고민이 많아."
"응. 누가 나보고 죽어야 한다고 그래서 고민 중이야."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어? 그거 흔한 일이잖아."
"아니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뭔가 영화처럼 엄청 멋지게 짠하고 등장해서 울림 있는 목소리로 '넌 죽어야 해 꼬마야!' 하고 말하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살인마! 악마! 나가 죽어!' 이런 느낌이었는데 말야. 악마한테 설득당하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죽을 거야 찰리?"
"늘 그렇듯 고민해봐야지. 누나는 삶이 행복해?"
"아니. 하지만 이 삶이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죽음도 선택은 아닌 것 같아.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지."
"그래? 어쩌면 '살 수 있을 때'까지 산다는 것은 연명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의미는 아닐까? 꾸역꾸역 버티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선택하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지! 긍정적인 마인드로!"
"근데,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까 누나의 논리대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으응?"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방향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아까 그랬잖아, 이 삶이 내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 멋대로 포기해버려서도 안된다고 말야. 삶이 내 것이었다면 죽음도 내 것일 수 있지 않을까?"
"뭐래 너 요새 여자 친구도 있잖아. 걔 귀엽던데. 걔 있는데도 계속 예전처럼 죽느니 마느니 하는 소리 할 거야?"
찰리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며 궁시렁거리기는 했지만 명아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이 확 약해졌다. 연인 같은 거창한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명아는 확실히 점차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확실히 소중한 것이 있을 때의 삶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관계라는 것은 서로를 견고하게 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구속하는 의미도 된다. 찰리는 애써 주제를 돌렸다.
"그냥 해본 생각이었어. 누나는 요새 어떻게 지내는데?"
은하 누나는 결혼하기 싫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본인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부모님이 왜 그렇게 난리 인지도 모르겠고 결혼을 하는데 왜 집은 여자가 사고 혼수는 남자가 하는 규칙 따위가 있는 건지도 의문이라고 바락바락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는 제대로 된 배우자 하나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말이다. 남자랑 결혼하던 여자랑 결혼하던 난장판이라고 말하는 은하 누나를 보며 찰리는 약간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끄덕 거릴 수밖에 없었다.
은하 누나는 집에 행사가 있다며 저녁을 먹은 뒤 사라져 버렸고 명아를 만나려면 시간이 아직 좀 비던 찰리는 사람 없는 공터에 앉아서 통역기를 계속 살펴보았다.
‘그 그림자인간들이 뭐라고 불렀지 이 기계를? 란이라고 했던가? 알같이 생겨서 그런가. 그럼 깨야 하나?’
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핸드폰으로 메모를 해두는 습관이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화면 위로 부드러운 글씨가 번지듯이 새겨졌다.
- 어떻게 해야지 작동하는 걸까
그 순간, 놀랍게도 답변이 물감 번지듯 화면 위에 스르륵 생겨났다.
- 반말하지 마.
찰리는 나타난 답변을 읽으며 잠시 현실감각을 잃었다. 아. 반말하지 말라니. 질문지가 인격체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답변을 채워 넣었다.
-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기계분께서 살아계신 줄 모르고.
- 살아있다는 정의는 아직 현인류의 수준에서 보편타당하게 내릴 수 없는 것인 것 같네. 하지만 AA.
- AA? 그게 뭐예요?
- Apology Accepted. 사과받아준다고. 쓸데없는 질문이 많구나 너.
찰리는 기가 막히고 말았다. 영어도 쓴다니. 생각보다 박학다식한 기계인 셈이다. 통역 기기라고 하더니 이건 통역하고도 번역하고도 다른 것 같았다. 찰리는 이 기계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굉장히 궁금해지고 말았다.
- 작동방식이 뭐죠? 누가 원격으로 대답하나?
- 너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느니라. 넌 누가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니?
- 이상하잖아요. 대답하는 기계라니.
- 아직 감정 전도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 감정 전도체?
- 말이 짧군. 한 번만 더 봐주지. 감정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한 지역에 비상식적으로 집결하는 경우를 의미. 공동묘지나 정신병원에서 보이는 심령현상이 그런 예. 감정 전도체는 그런 이상 감정 결집 현상을 에너지화’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하지만 때론 아주 오래되거나 초밀도의 감정 집약 현상에서는 인간이‘귀신’이라고 부르는 자아 비슷한 것이 생기는데, 그런 초밀도 에너지를 이요한 감정 전도체는 자아가 생김. 강한 에너지를 이용할수록 뚜렷한 자아가 생길 수 있음.
- 그러니까 귀신 들린 통역기라는 거군요...
- 비슷해. 믿고 말고는 자유. 내 안에는 500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감정에너지들의 축적되어있지.
- 5000년 전에는 문명 자체가 없었는데요.
- 그건 이 시대에서나 그렇지. 너에게 나를 건네준 것들이 현생인류와 같아 보였니?
- 스스로를 ‘대감정’이라고 부르던데요.
-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비틀렸을지언정 그들은 감정의 집약체이기는 하니까. 감정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축적되고, 이동하며 존재함. 그런 자들의 손에 있다 보면 5천 년의 감정쯤은 손쉽게 쌓이곤 하더군.
- 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물어보았다.
- 그럼 귀신 달걀 씨, 이 괴상한 이야기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뭐죠. 왜 그런 대단한 존재들이 나를 찾아오고 당신은 내 손안에 있는 건가요.
란위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글자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 너는 찾아야 해.
- 뭐를요?
- 일단 나의 첫 번째 주인을 찾는 것이 가장 좋겠지.
- 첫 번째 주인? 왜요?
- 내 첫 번째 주인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라도 너는 그녀를 찾아야 해.
- 그래요? 그분이 어디 계신데요?
그 순간, 계속 느려지던 란은 갑자기 버벅거리며 깨진 문자들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 È´\ÄÜÝ|á(Öy®ê£ꠓS-äꠔC<ꠛ...마..마녀ÂCL?߯·?E ÔÎç¡É.3C]É{ðÞG¼AÜèEÌ만년성 ... Hg À¨}¢¾` Sq ?¼ä[<¨ðr¢8rÓ ¯4¾MÀeïÞ» [ôDÄýE'ÓÁlDi£1zp2<ýåï±1zÓÚíhývÍ%¹¥ç,óZûM의..마지막 공주..Ø)¿T'¥xä®WÐÊ6îá©ìëÏR(\¤exªë³ø¡tSæÒ³<C]àꠕ£×D\f©É½îÓ͍t¤Ü..... .....
그 말을 끝으로 란의 화면은 어두운 침묵 속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