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피는 꽃 3화

3화 : 오래된 동네

by 이원호


3화 : 오래된 동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선연이는 말없이 전학을 갔다. 현진이에게 물어보아도 잘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 뿐이었다. 곁에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마음속의 자리가 큰 줄 몰랐는데 갑자기 삶에서 사라지니 큰 서러움이 남고 말았다. 때로는 어떤 일들은 그렇다. 사라진 뒤에야 그 소중함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선연이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커서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외로움과 그리움의 흔적을 흉터처럼 남겼다.

나는 거의 선연이를 찾아 나설 뻔했다. 출발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치기 어린 부끄러움과 뒤에 남겨진 사람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과 자존심에 찾아 나서지 못한 내 모습에는 서글픔이 내려앉았다. 떠난 그 아이가 밉기보다는 남겨진 나 자신이 못내 서글퍼지고 있었다.

어느새부턴가 아이들이 성당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다. 다들 학원에 공부에 치여서 바쁘게 살았고 개울가를 뛰어놀거나 벽에 그림을 그리며 어울릴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묵주 팔찌도 손목을 떠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한 번 귀찮아서 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아쉬움 속에서 변하고 사라져 갔다. 한 때는 사랑하던 이들로 가득 차 있던 마음속 자리들은 이제는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 빈자리에는 서글픔이 내려앉아 오래도록 나를 애잔하게 괴롭혔다.

현진이는 부모님의 권유로 근처에 있는 여자중학교로 갔고 나는 배정을 조금 이상하게 받아 조금 멀리 떨어진 큰 남녀 공학으로 입학했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90년대에 나름대로 명문 중학교라고 불렸던 곳이었다. 마치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듯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선배를 비롯한 연장자에게 깍듯할 것, 머리는 단정할 것, 성적은 잘 나올 것, 좋은 고등학교에 갈 것. 선생님들의 엄격한 분위기에 학생들 역시 영향을 받았다.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내고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했다.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아이들은 철없고 순진하던 모습을 세상이 제시해준 구도에 맞추어 첨예하게 깎아나갔다.

친구가 아닌 경쟁자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외로움은 나날이 색채를 더했다. 입학 첫날 느낀 교실의 분위기는 싸늘하고 적대적이었다. 아이들은 긴장한 눈매로 서로를 훑었고, 그것은 누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보다 좋은 성적을 받을지 가늠해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진저리를 치고 또 쳤다. 3 학급뿐이었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학교는 스무 학급이 넘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이름을 잘 몰랐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성적으로만 평가했고 학생들은 선생님들 앞에서는 가식적으로 살가웠지만 뒤에서는 악독한 말들을 침을 뱉듯 쉽게 뱉어내었다. 누구나 친구였고 누구나 가까웠던 초등학교 때와는 참 많은 것이 달랐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는 외로움이 자랄 수밖에 없었다.


외로움은 때로는 저릿한 감각으로 가슴 어림을 눌렀고, 그것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남겼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그 마비에 문득 홀로라는 것을 더욱더 실감하곤 했다.

가끔씩 너무 외로워질 때면 현진이를 찾아갔다. 현진이는 주말이면 함께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을 했고, 그 편의점은 이상하리만큼 고즈넉한 곳인지라 찾아가기 좋았다. 특별히 사야 할 것이 없더라도 현진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편의점으로 가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대화는 참 묘한 것이라 무언가 나누어 덜 외로운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현진이는 나를 특별히 반기지는 않았지만 또 불편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 사실 덕분에 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한 명씩 동네를 떠나 사라져 간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더듬기도 했다. 가끔가다가 편의점에 물건들이 새로 들어와서 일이 바쁘면 나도 직원이라도 된 마냥 도와주기도 했고, 그렇게 일을 마치면 현진이네 집 앞까지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우리는 밤에 기대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번화한 종로 뒷자락에 숨겨져 있는 우리들의 동네는 밤이 되면 회사원들은 집에 가고 가게들은 문을 닫아서 조용했다. 불이 다 꺼지면 동네에는 아름다운 적막이 맴돌았고, 그 적막에는 세상을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주는 힘이 있었다.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오래된 한옥동네에 굳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거나 오래도록 동네를 지켜온 나이 지긋한 노인들뿐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집값과 불편한 주변 환경을 견디지 못하며 떠나갔는지라 동네는 한층 더 고즈넉함을 자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어린 시절의 추억들 역시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화랑과 카페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만화책방이나 비디오방, 그리고 아이들이 놀만한 오락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마치 추억도 나이를 먹고 죽는 것만 같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동네에는 밤만 되면 지나간 하루를 애도하는 듯한 침묵이 한옥 처마 위에 달빛처럼 머물러 있었다.

현진이와 밤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태껏 잘 몰랐던 생소한 삶의 감각들이 느껴졌다. 우리는 외로움을 더듬고, 미래를 향해 손짓해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미래는 안개가 낀 듯 희끄무레하기만 했다. 삶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직 채 몇 년 살아오지 않은 인생인데도 삶은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때로는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서 아팠고, 때로는 아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서 아팠다. 때로는 모든 것이 잘 풀려서 주어지는 기대감에 괴로웠고, 때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함이 우리를 짓눌렀다. 그것은 다 삶의 무게였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말고는 그 무게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현진이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고, 가끔씩 날카로운 핀잔과 유쾌한 놀림을 건네주며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끔씩 현진이가 조용한 어조로 또록또록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현진이는 유쾌한 친구가 아닌 감수성 예민한 소녀였다. 선연이는 언젠가 내게 ‘현진이는 내가 본 아이들 중에서 가장 명랑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아이야. 내가 남자애였다면 현진이 같은 애를 좋아했을 거야.’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은 몇 년이 지난 이제야 마음에 와 닿았고 있었다. 현진이의 명랑한 성격은 마음을 쓰다듬으며 친구들을 많이 잃고 외로웠던 내게 고마움이 되어주었다.

오래된 동네에 머무르며 우리는 오래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어떤 것들은 오래되었기에 버거워지는 반면, 또 어떤 것들은 오래될수록 향기를 품는다. 삶은 오래될수록 외로움으로 버거워지고 있었고 친구는 오래될수록 향기를 품어갔다. 함께 자라나며 향기를 머금는 그 느낌을 그 순간들에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가끔씩 현진이에게 선연이 소식을 물어보았다. 아예 연락조차 안 되던 나와는 달리 현진이는 그래도 가끔씩 선연이와 연락을 주고받는 듯했다. 현진이는 1년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그렇게 가끔씩 연락이 닿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현진이는 이상하게도 선연이에 대한 질문들을 불편해했다. 언제 한 번 셋이서 다 같이 보면 좋지 않을까? 하고 물어보아도 말을 얼버무리고 다른 주제로 돌릴 뿐이었다. 의아해하면서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선연이에게도 현진이에게도 다 나름의 이유와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락이 끊겼던 선연이를 다시 만난 것은 긴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동네를 기웃기웃 거리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친 것이 인연이었다. 나는 몇 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에 망설이다가 어설픈 인사를 건네었고, 선연이는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서글서글한 웃음을 내게 지어주었다. 그건 마치 시린 겨울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같은 웃음이었다. 비록 그 슬픔과 두려움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아끼던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웃음에 안도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동안 왜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대신 머뭇거리며 이 동네에는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선연이는 ‘그냥.’이라는 천 마디 속뜻이 담긴 대답을 건네어주었고, 그 시린 모습은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서로 바뀐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뒤돌아서며 흘낏 본 선연이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애잔한 슬픔의 향이 머물러 있었다. 그건 초등학교를 떠난 뒤로 내게도 오랫동안 머무른 감정들과도 참 흡사한 향기였다.

그날 밤 새벽 2시에 홀로 밤을 곱씹던 메신저 상으로 선연이에게 쪽지가 왔다. 낮에 교환했던 연락처를 곧바로 사용한 것 같았다.

-자니?

-아니. 너는 왜 안 자고 있어?

-그냥. 난 잠이 잘 안 와.

-자장가라도 불러줘야 하려나.

-넌 아직도 거기에 살아?

-응. 벌써 16년째네.

-성당도 계속 나가고?

-아니. 요샌 애들이 안 나오더라. 바쁜가 봐 다들. 나도 아주 가끔씩만 가.

별말이 아니었지만 익숙한 느낌의 마음에 턱 하니 걸렸다. 익숙했지만 사라진 것들. 사라졌지만 익숙한 것들. 그 모든 것이 이야기의 꽃이 되어 삶을 틔웠다. 우리의 대화는 새벽 샛별이 창문턱에 걸릴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날 밤도 그다음 날 밤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나는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메신저를 켰고 선연이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참 아팠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밝은 모습은 많이 사라져 있었고 여름날의 산들바람 같았던 미소는 서글픈 새벽녘의 달빛으로 변해있었다. 무엇이 선연이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는지 궁금했지만 쉽게 알 수는 없었다.

밤이 깊으면 이야기도 깊어져 갔다. 서로의 여렸던 가슴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상처들은 밤이 되면 별빛이 되어 스미어 나왔다. 선연이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쫓겨나듯 전학을 갔던 어린 날의 일들과 전학을 간 뒤에 있었던 수많은 괴로움, 자괴감, 삶의 무게들에 대해서 말해주었고 나는 중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방황하던 고뇌와 외로움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는지, 어떻게 우리가 갑자기 서로의 삶으로 되돌아와 마음을 열 수 있었는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냥 삶의 어떤 일들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까워지고, 알 수는 없지만 닿아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가끔 이메일이나 편지를 선연이에게 보냈다. 선연이는 답장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이 묵묵히 편지를 읽어 주었고, 그래서 더 큰 고마움으로 남았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선연이는 말없이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부담감도, 미안함도 없이 마냥 듣기만 해도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채팅이나 편지로 자주 기대어갈 수는 있었을지언정, 선연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그 해 겨울에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힘들기만 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달팠던 만큼 그 끝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나는 학교 일정이 괴상하여 2주 정도 빨리 졸업했고 선연이와 현진이는 한창 눈이 내리던 2월의 마지막 주에 졸업식을 눈앞에 두었다.

눈이 침묵 속에서 쌓이던 겨울이었다. 밤을 자고 일어나면 온 세상이 하얀색 침묵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침묵은 외로움으로 마음을 두드렸고, 그 외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더듬을 수 있었다. 조금 성숙해진 기분도 들었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기분도 들었다. 조심스레 삶을 되짚어볼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현진이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유학을 간다는 것이었다. 나도 선연이도 그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렸고, 슬픈 소식에는 제대로 반응을 할 줄 몰랐다. 어찌나 혼이 나갔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현진이가 출발하는 날이 이틀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을 정도였다.

선연이는 졸업식이 끝나는 대로 오겠다고 얘기했고, 나는 현진이의 졸업식에 혼자서 가야만 했다. 오랜만에 선연이를 만나는 것도 긴장인데 현진이에게는 졸업식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야 했는지라 나는 말도 못 할 정도로 긴장을 했고, 결국 꽃다발을 건넬 때는 쭈뼛쭈뼛 제대로 건네주지도 못하고 어설픈 손짓만을 건네고 말았다. 현진이는 수많은 꽃다발 속에서 환하게 빛났다. 내 조촐한 꽃다발은 그 사이에서 그림자가 될 것만 같았다. 머뭇거림은 가슴에 다시금 저릿한 아픔을 새겼다. 그 아픔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세상이 멎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굳어져가며 나를 짓누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현진이는 짐을 싸야 한다며 집으로 휑하니 사라져 버렸고, 나는 땅바닥에 쌓인 눈을 발로 비비다가 선연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연이는 그럼 학교로 가지 않고 바로 공항으로 갈 테니 1시간 뒤 서울역에서 보자는 답장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어깨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을 채 털어내지도 못한 채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송이도 내 마음처럼 혼란스러운 궤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서울역에는 이상하게 사람이 없었다. 늘 붐비는 것만 봐온 장소이기에 생소한 느낌이 마음을 채웠다. 지하철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지만 곧 빗물이 하수구로 빠지듯 어디론가 흘러나가 버렸다.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점멸하는 상황판만이 5분 뒤에, 그리고 10분 뒤에 기차가 한 대씩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선연이에 대한 생각과 이제 몇 시간 뒷면 기약 없이 외국으로 나가버리는 현진이에 대한 생각은 이상한 초조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삶이 지나치게 빠르게 변화하는 느낌, 가까웠던 이들이 변해가는 그 느낌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이질적이었다. 나는 삶에 고정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변해가고 있었다. 사는 곳이 변하고 사는 방법이 변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가고, 함께하기로 한 미래가 변화한다. 그 변화는 마른하늘의 번개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오늘은 현진이가 떠나고, 내일은 또 누가 떠날까. 오래된 우리 동네처럼 나 홀로만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선연이는 갑자기 나타나서 손을 흔들었다. 조용한 미소와 함께였다. 한참 만에 만나는데도 나를 바로 알아보는 그 손짓은 참 고마운 것이었다.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유치하고 우스운 초등학교 때 그대로라서 바로 알아본 걸까 봐 조금 두려워졌음은 덤이다. 나는 그렇듯 그대로인데 선연이는 많이 달라져서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동네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어깨 위에서 흔들거리던 단발머리는 이제 허리에 닿을 듯 곱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키도 그새 더 컸던 것인지 아니면 늘씬해졌던 것인지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165cm쯤 될까? 거의 170cm일까? 나보다 키가 커버린 건 아닐까? 원래 이렇게 말랐던가? 원래 이렇게 예뻤던가? 자꾸만 부끄러움으로 움츠러들어서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러자 선연이는 그런 내 모습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이러다 현진이 못 봐.”

그리고 우리는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텅 빈 서울역을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시간과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안개가 자욱하니 내려앉아 있었고, 기차는 그 안개를 뚫고 달렸다. 멀리서 경적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갯벌 위에는 주홍빛 진흙 꽃이 한가득 피어서 빛나고 있었고, 그 묘한 빛은 등불처럼 우리의 이야기를 비추어주었다.

선연이는 가방을 주섬주섬하더니 편지를 한 통 꺼냈다.

“자 받아.”

“이게 뭐야?”

“편지.”

“현진이한테 주는 게 아니고?”

“그러게. 가는 건 현진이 인데 나는 너한테 편지를 썼네. 괜찮아. 현진이한테는 네가 썼겠지.”

그 말에 나는 뜨끔하며 가방을 움켜쥐었다. 가방에는 현진이에게 주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벌통을 뒤지다 벌에 쏘인 오소리 같은 내 표정을 보며 선연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딱 들킨 표정이네.”

우리는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질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멀리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바다내음을 듬뿍 머금은 안개에 삼켜졌고, 다시 고독이 되어 세상을 치달았다. 나는 그 외로운 안개를 바라보다가 선연이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바로 알아봤어?”

“뭘?”

“아까 서울역에서 내 모습을 보고 바로 인사했었잖아. 나는 예전 모습 그대로야?”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무슨 대답이 그래.”
“사실이 그런 걸. 겉모습은 좀 달라진 것 같아. 머리카락은 좀 우스꽝스럽게 헝클어져있기도 하고.”

무의식 중에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선연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근데 겉모습 하고 내가 널 알아보는 것 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걸. 첫인상도 아닌데.”

“그래? 겉모습이 안 중요하단 말이야?”

“그으렴. 특별한 사람한테는 겉모습과는 별개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어.”

“그건 그냥 내가 너한테 잘해줘서 그렇게 보이는 거 아냐?”

“아냐. 네가 나한테 뭘 해줬는지는 별로 안 중요해.”

내 딴에는 나름 선연이에게 많은 걸 건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해버리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기분은 무언가 특별한 뒷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다리게 해 주었다. 선연이는 부드러이 입술을 열었다.

“누가 무언가를 해줬다고 해서 특별히 더 고맙거나, 특별히 더 소중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떤 사람이 좋아지는 건 그 사람이 뭔가를 해줘서 그런 건 아니니까. 소중하고 고마운 건 처음부터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거야. 처음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어서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거지. 그런 게 정말로 고마운 거고, 그러니까 멀리서도 너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거고 말이야.”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이해하기 직전의 것들 사이에서 질문은 곧 하나 더 마음 위로 떠올랐다. 줄곧 나를 맴돌던 질문들 중 하나가 왈칵 쏟아져 나온 셈이다.

“너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좋은 사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데?”

“그걸 알면 이미 좋은 사람일 것 같아.”

“세상에게 바라는 건 뭐야?”

두 번째 질문은 참 이상한 질문이었다. 차마 ‘내게 바라는 건 뭐야?’라고 부끄러워서 물어보지 못한 15살 소년의 수줍은 고백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선연이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속마음을 더듬기도 힘든 이상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괴상한 변화구를 던졌음에도 선연이는 정확하게 안타를 쳤다.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건 아마 온 세상에 대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나 홀로만을 위한 대답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 말은 시속 200km의 기차가 부딪혀오는 듯한 충격으로 나를 들이받을 수밖에 없었다.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멈칫거리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본 줄 알았지만 이상하게 선연이의 대답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나 자신조차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몰랐다. 선연이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봐 주었다. 묘한 분위기를 타고 기차는 계속해서 공항으로 향해갔다. 외로움의 안개가 조금 옅어지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내리자 대여섯 명의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우리를 반겼다. 다들 초등학교 때 한 번씩은 같은 반을 했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보는 선연이를 보며 무척이나 시끄럽게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렇게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많으니 떠났던 선연이도 떠나는 현진이도 조금은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아이들은 그에 비해 내게는 그렇게 상냥하고 애틋하지 못했다. 어느새 똘똘 뭉친 아이들은 마치 5년 전에 여름수련회에서 그랬듯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학대라기보다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들의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여자아이들은 치한이니 변태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곤란함을 느끼며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을 수밖에 없었고, 선연이는 그런 내 모습에 조용하게 웃었다.

현진이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말고 송별을 온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서 나왔다. 아이들은 씩 웃으며 가지고 온 선물을 하나씩 건넸고 나도 엉거주춤 서서 써온 편지를 건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연이는 내가 머뭇거리자 뒤에서 응원의 손짓으로 나를 살짝 밀어주었고, 그제야 겨우 용기가 조금 나서 현진이에게 편지를 건넬 수 있었다. 현진이는 편지를 받으며 잠시 주춤하더니 따로 할 얘기가 있다며 구석으로 불러냈다. 고백하는 거냐고 여자아이들이 꺄악꺄악 거리는 가운데 나는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현진이에게 끌려갔다.

현진이는 굳어진 표정으로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자 마지막 충고라며 이야기했다. 나와 선연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만약 더 깊은 감정을 가지려고 한다면 나도 아플 거고 선연이도 크게 상처 받을 거라고 말이다. 우리 둘은 사람을 좋아하고 아끼는 방식이 참 다르다고 자신은 우리 둘이 아프지 않게 앞으로도 쭈욱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고맙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바란 충고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오늘 떠난다는 아이에게 속상한 내색을 하기는 싫어서 담담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현진이는 가볍게 등을 돌렸다.

출국하는 게이트 앞에서는 한바탕 울음바다가 펼쳐졌다. 의외로 현진이는 담담해 보였다. 아무래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본인도 떨떠름한 것 같았다. 그 담담함 앞에 참 많은 여자아이들이 눈물을 펑펑 흘렸다. 꼭 연락해야 한다고, 우리 사이 잊으면 안 된다고, 매주 금요일마다 전화하라고, 그렇게 지켜지지 않을 약속들이 만들어지고 스러져갔다. 현진이는 울지 않았다. 선연이도 서글픈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나도 아까 들은 말 때문인지 눈물이 나지 않아서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서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현진이는 손을 한번 흔들고 게이트 사이로 뒤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현진이가 사라진 뒤에도 우리는 한참을 서서 굳게 닫힌 게이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 너머에는 다른 세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총을 든 보안요원들이 지키고 있는 육중한 철문이 저 세계와 이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핸드폰 단축번호만 누르면 여전히 닿을 것을 알면서도 내게는 현진이가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왠지 눈물만큼은 나지를 않았다. 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저 멍하니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여자아이들은 하나둘씩 돌아섰다. 현진이 부모님께서는 태워주시겠다고 제안하셨지만 우리는 승용차 한 대에 타기에는 너무 많았다. 현진이 부모님께서는 나를 보며 ‘남자아이 혼자서 고생이 많네.’라고 하셨고, 그 말에 여자아이들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부터 눈물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먹잇감을 찾은 고양이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아이들의 얼굴에 되돌아와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내 핸드폰을 빼앗고 그 안에 찍혀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문자까지 읽으려 들었다. 문자가 버스 안에서 낭독되기 직전에야 가까스로 핸드폰을 빼앗을 수 있었다. 핸드폰 다음으로는 MP3 플레이어가 빼앗겼고 그 뒤에는 공책이 빼앗겼다. 아이들은 공책을 뒤지다가 나중에 일기장에 옮겨 적으려고 베껴두었던 몇 가지 글귀들을 큰 소리로 읽어대었다. 버스 안은 참혹함과 부끄러움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공책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자 여자아이들은 또다시 변태니 치한이니 경찰을 불러야 한다느니 하면서 꺅꺅거렸다. 덕분에 경찰이 정말로 온다면 이 아이들을 사생활 침해와 성희롱 중 어느 것으로 일러바쳐야 할지 고민하며 공책을 가방에 구겨 넣어야만 했다. 1시간가량의 끔찍했던 운행이 끝난 뒤 버스에서 내렸을 때에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원숭이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탈출한지라 나는 저 앞에 재잘대며 무리 지어 가는 여자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걸었고, 여자아이들은 그런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로 이제는 서로의 이런저런 연애 이야기에 신나 있었다. 내가 갑자기 따로 사라져 버린대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아서 내심 슬픔과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선연이는 부드럽게 아이들의 무리를 떠나 내게로 다가왔다.

“고생했어.”

“뭘?”

“애들이 좀 짓궂지.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은 잔잔한 여름 산들바람 같은 미소와 함께였고 내게 지표면의 운석처럼 깊은 자국을 남겼다. 나와도, 나를 저리도 못살게 구는 다른 여자아이들과도 같은 시간을 겪었으면서 우리 모두를 잔잔하게 배려해주는 모습에서는 다른 세상에서 나타난 것만 같은 성숙함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물떼새 사이에 섞여있는 백로 같고 별빛 가운데의 달빛인 찬연함이었다. 선연이의 그 말 한마디 속에서 나는 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살며 처음으로, 가족 의외의 누군가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할 말을 찾아내어 선연이에게 대답해주었다.

“아냐.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잖아.”

그러자 선연이는 배시시 웃으며 전혀 대답 같지 않은 알쏭달쏭한 대답을 남겼다.

“같이 와줘서 고마웠어. 보고 싶었거든.”

아이들을 보고 싶었다는 것인지, 현진이를 보고 싶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나를 보고 싶었다는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선연이는 웃으며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악수하듯 그 손을 잡자, 선연이는 두 손을 모두 모두어 어색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깜짝 놀라서 엄지손가락으로 선연이의 고운 손등을 꼬옥 누르자 선연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가. 기억할게.”

역시 무엇을 기억하겠다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손끝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사뭇 고마워서 그동안 잘 짓지 못했던, 늘 어색하다고만 생각던 미소를 입술 끝으로 지어 보였다. 새하얀 치아를 살짝 드러내며 선연이는 웃어주었다.

다음 순간 선연이는 지하철에 타고 있었고, 지하철은 플랫폼을 떠나고 있었다. 손에 새겨진 눈꽃 같이 시린 감촉이 선명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련한 아쉬움을 담아서 떠나는 지하철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흔적조차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서야 뒤로 돌아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주머니에서 선연이가 준 편지를 꺼내보았다. 편지에는 가지런한 글씨가 오밀조밀 담겨 있었다.


안녕 수호

떠나는 건 현진인데 나는 너에게 편지를 썼네요. 괜찮아요. 현진이는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까. 셋 다 어른이 되어서 만나면 재미있을 거예요. 그동안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던 것들도 다 해볼 수 있겠죠? 대학생이 되어서 술도 마시고 홍대 거리도 돌아다녀 보려나요. 조금은 기대되어요. 지금 떠나는 것은 언젠가 돌아오기 위한 것일 테니까요.

그동안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요.

편지를 써 본 지 굉장히 오래되었어요. 예전에는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 잘 안 써지더라고요.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연필을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잡아서 그런지 조금만 써도 손이 저려오거든요. 지금도 쓰면서 쉬었다가 오고 그러고 있어요. 내용이 엉망이 되더라도 이해해줘야 해요!



편지는 크고 작은 편지지 7장 동안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 흐름이 끊긴 부분에서는 손이 저려서 잠시 책상을 떠나갔다가 온 선연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편지는 때로는 밤에 책상머리에서, 때로는 침대에 누워서, 때로는 학원 쉬는 시간에 쓰이면서 끊임없이 흘렀다. 그건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진솔한 마음이었다. 편지의 끝에서 선연이는 말했다.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 말의 끝에는 안타까운 여운이 맴돌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지금은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안타까움이 나를 문득 그립게 만들어 나는 선연이가 그곳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도시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온 세상이 다 그리워지고 먹먹해지는 그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았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외로움이 찾아들고 있었다.


문득, 어렴풋한 느낌 속에서 조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닿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심연은 사람을 초월하는 무언가로만 넘어설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것도, 닿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억겁의 세월을 노력한대도 닿을 수 없었다. 그 간극은 외로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외로움은 밤이 되어 어둠 속에서 일렁였다.

나는 어쩌면 영원히 선연이에게 닿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고자 한들 언젠가는 상대방이, 때로는 내가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꼭 맞는 조각으로 빚어지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그렇게. 나는. 너를.

그럴 수밖에.

너는 내가 처음으로 눈에 담은 세상 밖에서 온듯한 아름다움이었으니까. 새벽녘의 달빛이요, 가장 그리운 밤하늘이었으니까.

그 우주에는 꼬리를 길게 끄는 나그네 별이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고 해도, 때로는 나쁜 짓을 한다고 해도, 영원히 닿을 수 없어도 사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지난한 일일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른대도 너를 사랑한다는 건 온통 변하는 세상 속의 너를, 네가 걸어온 과거와 머무른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다 끌어안겠다는 것이니까.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바람뿐인 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랑은 인간이 하도록 빚어지지 않았다. 세상을 초월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해보기로 했다. 그만큼 그 첫 마음은 풋풋하고 강렬하며 다시없을 황홀한 것이었다. 그 마음이라면 닿지 못할 그 간극을 조금은 좁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