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연옥
Chapter 11: 연옥
찰리는 명아를 보며 혼란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여전히 명아의 감정은 읽히지 않았지만, 찰리는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다시 무언가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정해져 있는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비틀리고 달라지고 있었다. 명아는 찰리를 보면서 씩 웃고는 딱밤을 때렸다.
“아야! 왜 때려!”
“맞을 짓 했어 안 했어!”
“내가 뭘!”
“기절시켜놓고 버리고 갔잖아! 그것도 으슥한 궁궐 구석에다가!”
찰리는 뭔가 크게 모함당한 기분이었지만 버리고 간 것은 사실이라 크게 변명할 수는 없었다. 명아는 두 눈을 크게 부라리며 찰리를 혼냈다.
“그러고 혼자 나가 죽어버리겠다고 온갖 비장한 폼은 다 잡았으면 제대로 된 계획이라도 있던가! 왜 찌질이처럼 어두운데 틀어박혀서 울고 앉았어!”
“내가 언제!”
“내가 문 열기 전에 너 쭈그려서 울고 있었잖아 어둡다고!”
“안 그랬어!”
명아는 찰리를 짐짓 흘겨보며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이제 안 울어도 돼. 여기는 밝아. 나도 여기 있어.”
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수족관으로 통하는 직원용 출입구 중 하나였고, 탑 지하의 거주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캄캄해진 수족관과는 달리 이 곳에는 약간의 빛이 있었다. 찰리는 아주 높은 곳의 유리천장에서 햇살이 새어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오래 잠겨 있다 보니 그 불빛은 가을 하늘의 별처럼 밝게 느껴졌다. 찰리는 빛과 함께 도착한 명아의 손을 마주 꼬옥 잡았다.
지하 거주구역의 내부는 마치 오래된 계곡 같은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층층이 단층이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잇는 여러 통로들은 거대한 고목의 뿌리처럼 도시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고, 엘리베이터와 계단들은 나무의 몸통을 형성하고 있는 본 탑으로 통했다. 평소라면 수많은 사람들과 물건들을 실어 나르며 혈관 역할을 했을 통로들은 지금은 텅텅 빈 채였다. 찰리와 명아는 아무도 없는 지하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둘은 한 참을 걸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의아함과 약간의 불안을 느끼자 명아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듯이 말해줬다.
“대피령이 떨어져서 다들 도망간 거야. 지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초기에 다들 빠져나갔고, 지금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있어. 뉴스에서는 고급 주택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갔고 도시에서 제공해주는 무상임대 주택가 사람들이 갇혀있다고 하더라.”
“그럼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3개 층마다 비상 대피소가 있어. 탑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중이니 다들 그 대피소 안에 숨어있겠지. 지상층은 출입 통제고 이제 대부분의 입구가 군부대나 경찰들로 막혀있어. 집 안에 숨어있는 사람들도 꽤 될 걸 이 지하 지역 거주인구만 10만 명이니까.”
“넌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니 그보다 나를 어떻게 찾았어?”
명아는 기절한 자신을 찰리가 비밀의 정원에 두고 떠난 뒤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한여름 여사는 명아에게 찰리가 왜 떠났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해주었고 명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져있던 명아는 그래도 찰리가 어디로 사라졌던지 간에 결국 돌아와야 하는 곳은 한 곳뿐임을 깨달았다.
“그 뒤론 한여름 여사님께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어. 한여름 여사님은 왜 인지 알 수 없지만 내 주변에서 감정 농도가 극히 희박해지기 때문에 나보고 감정을 다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뒤에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어서 궁궐을 나올 수 있었어. 특히 감정벽을 만드는 건 아주 대단하지.”
“감정벽이 뭐야?”
찰리는 명아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며 뭔가 잘못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명아는 손을 쭉 내밀었고, 그 순간 찰리는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힌 것처럼 머리를 콩 부딪히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명아는 이마를 문지르는 찰리를 보면서 깔깔 웃었다.
“그게 감정벽이야!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막아낼 수 있지. 감정에너지가 짙은 존재일수록 통과하지 못한댔어. 한여름 여사님도 뚫지 못했는걸.”
찰리는 큰 흥미로움을 느꼈다. 이 정도면 명아가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명아는 찰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머뭇거리다 말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어. 언젠가 말했듯이 네가 내리는 선택에 대해 비난하지도, 참견하지도 않아.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지켜보고 기다리고 결과에 순응하는 건 싫어. 가야만 한다면 내 손 닿는데 까지는 밀어서 올려 줄 거야.”
찰리는 그 순간에 마저도 명아의 절절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서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들이 함께 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명아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그들은 잠시 서로의 온기를 만끽했다.
명아는 가는 머리카락으로 찰리의 입가를 간지럽히며 말했다.
"한여름 여사님은 사람마다 8개의 성징 중 한 가지를 강하게 타고난댔어. 하늘, 땅, 별, 나무, 바다, 새, 태양, 몰라 하나는 기억 안 나. 너는 하늘이야 찰리. 8개 성향 중에서 하늘 만이 감정을 그렇게 강하게 끌어당기지. 그것도 짙고도 짙은 밤하늘일 거야."
"너는?"
"나는 땅이야. 한여름 여사가 그랬어. 나라면 묶여있던 널 다시 원래의 밤하늘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하늘로 돌아간다는 선택이 내가 죽는 것이라도?"
"응 찰리. 죽음은 대단하고 거창한 선택이 아니야.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내리는 것들이지. 지금 이것처럼."
명아는 살짝 발을 들어서 찰리의 목을 끌어안았다. 찰리는 품속에서 꿈틀대며 올라오는 명아를 가만히 받아주었다. 찰리를 끌어당긴 명아는 살포시, 그리고 확실하게 서로의 입술을 포개어 닿았다. 마치 일몰처럼, 너무나도 다른 둘은 그 순간 같은 빛과 감정으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찰리는 명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고 명아는 찰리의 죽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둘의 마음은 그 순간에 하나로 이어졌다.
길고도 짧은 입맞춤이 끝난 뒤 명아는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그마하게 '난 몰라'하고 중얼거렸다가 애써 담담한 척,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척 말했다.
"그러니까 찰리, 나와 같이 올라가자. 어떤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나는 응원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이 탑의 꼭대기에 네가 살아서 도착해야 해. 그 뒤는, 나머지 자잘한 것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 고민하자. 같이 있어줄게."
찰리는 얼굴을 붉히며,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함께 걸어줘."
찰리와 명아는 침묵에 잠긴 도시를 걸어서 지상으로 향했다. 대피소 안의 사람들은 꿈틀거리는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찰리를 뒤쫓는다고 생각하며 수로를 통해 탑에 들어왔던 명아는 우연히 보안카메라실을 발견했었고, 그곳에서 찰리가 아직 수로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명아가 cctv를 훑어보며 발견한 것은 사람들이 지하는 물론이고 탑의 곳곳에 빼곡히 갇혀있다는 점이었다. 입구가 나있는 지상층이나 주차장은 경찰과 군대로 인해 확실하게 봉쇄되어있었고 입구 앞에는 목불인견의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살고 싶다고, 살아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군중을 앞에 두고 경찰들은 순간고형제 폭탄을 설치해서 입구를 막았다. 콘크리트가 거품처럼 불어나며 입구를 막아버리자 안에 갇힌 사람들은 울고 비명을 지르며 저주를 퍼부었다. 지하층에 살고 있던 거주민들은 물론이고 지상 200층까지 빼곡한 쇼핑 지구를 이용하던 대부분의 이용객들이 탑 안에 갇혀있었다.
찰리는 정부가 사람들을 왜 가두어 두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안전을 위해서 탑 내부의 대피소에 머물러달라는 방송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지만, 탑이 간헐적으로 진동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탑 상층부에서 회오리치는 거대한 감정과 마찰을 일으키며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사라지고 큰 소리와 강렬한 감정들만이 남은 그곳은 가까이 가기엔 영 위험해 보였다. 찰리와 명아는 입구 쪽에 몰려있는 인파를 피해 조심스레 상층부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탑 지상부터 200층까지 뻗어있는 문화 지구에는 거대한 놀이공원과 쇼핑몰, 수영장 등 다양한 여가시설이 들어서있었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이용하는 탑 내부의 시설에는 여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살려달라고 창문에 몸을 길게 빼고 옷을 벗어서 휘두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구석에 틀어박혀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탑 곳곳에 머물러있었고,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상점가는 이미 약탈이라도 당했는지 곳곳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비싸 보이는 전자기기 상가들이나 명품 상가가 가장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찰리는 그것도 감정이 거세어져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인간 본래의 욕망이 발현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약자는 버려졌고 강자들은 집단을 이루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탑 안에 갇혀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두가 약자이기는 했다. 찰리는 누가 강자일 수 있는지,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한시라도 빨리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야지 무언가 바꿀 수 있었다. 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걷고 또 걷는 것뿐이었다.
탑을 오르는 계단들은 미로처럼 뒤엉켜있었다. 중앙에는 탑 중심까지 단 번에 올려주는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탑이 폭발할 때 중심축이 흔들리며 박살이 난 것 같았다. 찰리는 그 엘리베이터가 추락할 때 안에 사람이 없었기만을 기원했다. 중앙 엘리베이터 시설이 우그러지고 구겨진 것을 보면 그 안에 있던 탑승객들이 얼마나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찰리와 명아는 때로는 계단을 오르고 때로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랐으며 때로는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파편들을 밟고 다음 층으로 향했다. 때때로 무너진 파편 밑에서 고통받으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제발 물 한 모금만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찰리와 명아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찰리는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연옥에서 이토록 괴로워해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태어난 것은 그 자체로 죄인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이렇게나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닫았지만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은 영혼 그 자체를 두들겼다. 찰리는 마음이 서서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는 그 고통은 상대방에게 동조하고 공감하며, 흘러 들어오는 감정을 받아들이며 생기는 일이었다. 타인을 나처럼 느끼는 것은 찰리의 가장 큰 트라우마이자 삶을 멎게 만드는 가장 끔찍한 감정이었다. 명아는 찰리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녀의 온기가 찰리의 부서짐을 잠시 막았다.
그 순간 찰리는 무언가 미약한 움직임을 느꼈다. 명아에게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느껴진 것이다. 잡고 있는 작은 손 너머로 그간 느껴지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에 불꽃같은 감정이 흘렀다.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찰리는 무언가 의아함을 느꼈다. 그건 마치 찰리가 가지고 있던 괴로움이 흘러나와서 명아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큰 괴로움을 삼킨 것치곤 명아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약간의 안타까움과 두려움은 표정에 녹아있었지만 괴로워하는 기색은 없었던 것이다. 찰리는 자신이 잠시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고민해야만 했다.
찰리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에 그들의 앞에 쌓여있던 탑의 잔해가 폭발하며 터져나갔다. 찰리는 먼지 너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왜 군과 경찰이 탑을 그토록 봉쇄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 앞에서 사지를 비틀며 나타난 것은 찰리와 명아가 궁궐에서 마주쳤던 마귀와는 달랐다. 그것은 확실히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형질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희번득한 눈에는 초점은커녕 눈동자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고, 피와 같은 붉은 혈광이 눈은 물론이고 입가나 모공에서도 끈적거리며 흘러나왔다. 온몸의 털은 돼지처럼 빳빳하고 손가락이 갈퀴처럼 구부러진 그것은 누가 봐도 무언가에 씐 괴물 같았다. 찰리는 그 괴인의 몸 안에서 움직이는 강렬한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몸을 날려서 명아를 괴인의 공격 밖으로 밀어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넘어진 둘은 그들이 있던 자리를 할퀴고 지나간 붉은 괴인을 보았다. 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마에 물든 인간이야! 탐욕인 것 같아!"
괴인은 희번덕한 눈을 돌려 둘을 보더니 두 팔을 쭈욱 뻗었다. 그 장심에서 검은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 나오더니 괴인의 팔을 뒤덮었다. 괴인은 그대로 팔을 찰리 쪽으로 휘둘렀고 검은 기운은 채찍처럼 사나운 기세로 둘을 덮쳐 갔다.
명아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팔을 들었고 찰리는 검은 기운이 명아가 만든 감정벽에 부딪히며 튕겨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다급한 마음에 찰리는 감정으로 끈을 만들어 괴인의 발을 서로 엉키게 만들었다. 그 공격은 굉장히 효과적이라 괴인은 그 자리에 넘어져 성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찰리는 지상층에 올라온 이후로 감정 농도가 높아졌으며, 끈이 훨씬 질기고 튼튼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인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 찰리는 서둘러 명아와 함께 위층으로 향하는 감정끈을 만들어 묶었다. 괴인은 거미줄처럼 다리를 조여 오는 감정끈을 풀려고 애를 썼지만 거친 괴성만 씩씩거리며 내지를 뿐 둘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가까스로 위층으로 올라온 찰리와 명아는 사방이 쉭쉭 거리고 헉헉대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수만 가지가 넘었고 그것들은 지금 인간을 말 그대로 물어뜯고 있었다.
찰리와 명아는 스포츠용품 가게였던 곳 앞에서 불끈거리는 근육을 과시하는 괴물을 피해야 했다. 찰리는 저 괴물 안에 깃든 감정이 SNS 중독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과시욕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백kg는 될 것 같은 역기를 (정확히 말해서는 역기 정도가 아닌 역기 벤치를 통째로) 휘두르는 괴물을 보며 둘은 황급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감정벽이고 뭐고 저 물리적인 힘에 휩쓸리면 죽을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향수 가게 앞에서 그들은 유혹에 물든 인간이 숙주를 20마리쯤 만들어 여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보았고, 남성 정장 가게 앞에서는 권위에 사로잡힌 인간이 비대해진 두 손으로 꿈틀거리는 생존자들을 찍어 누르는 것을 보았다. 모든 곳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감정에 삼켜지며 악마에 물들고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고급 유흥가로 추정되는 층에서 마주친 성욕에 물든 거대한 인간이었다. 마치 거대한 염소의 뿔처럼 그 괴물의 머리에서 덜렁거리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남성의 성기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거뭇거뭇한 사타구니 사이에서는 뱀처럼 스멀스멀한 욕망이 거대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은 채찍과 쇠못을 손에 든 그것은 전설과 신화에 나오는 악마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귀를 직접 본 찰리와 명아로서는 그것이 진짜 악마가 아닌 마에 물든 인간, 악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침을 질질 흘리고 사악한 비명을 내지르며 살아남은 직업여성들을 우리로 몰아넣었다. 헐벗은 아가씨들은 공포의 눈물을 질질 흘리며 그것의 채찍을 피해 우리로 기어들어갔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찰리는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때, 찰리의 감각에, 거대한 염소 마귀보다도 더 강렬한 감정의 집합체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대기를 감싸 안는 그 감정의 기운은 음란과 성욕 그 자체였다. 염소의 뿔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며 성난 비명을 지르는 순간, 그 어둡고 아름다운 감정은 거대한 백조의 형상이 되어 우리 안에 갇혀있던 가장 어린 여성의 가슴 어림께에 내려앉았다.
찰리는 우리 안 여성의 눈동자가 까맣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공포감 속에서 그 어린 소녀의 마음이 짙고도 짙은 감정, 성욕과 음란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검은 감정에 휩싸인 소녀는 또 다른 성욕에 물든 마인이 되었다. 두 가슴은 봉긋하게 부풀어 올랐고, 엉덩이는 마치 비비 원숭이의 그것처럼 벌겋게 변했다. 배는 점차 불러와 임신한 것처럼 변했으며, 두 팔에는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감각기관이 새로 생겨났다. 새로 생겨난 마인은 비명을 지르며 염소를 공격했다. 찰리는 두 마인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보며 둘이 고통을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결투라기보다는 교합에 가까웠다. 교성과 체액이 난무하는 괴로움의 현장을 보며 찰리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명아는 다시 한번 찰리의 손을 꼬옥 붙잡고 무너진 계단 입구에 숨었다. 찰리는 두려움에 가득 찬 채로 여성형 마인이 염소 마인을 흡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감정이 모두 흡수된 자리에는 꿈틀거리고 추레한, 벌거벗은 젊은 남성이 남아있었다. 그 남성은 정기를 모두 빨린 것인지 간헐적으로 몸을 비틀며 숨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찰리는 성욕으로 물든 거대한 마귀가 다시 우리 안에 있는 직업여성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명아가 채 말릴 새도 없이 찰리는 두 손에 감정끈을 길게 만들었다.
찰리가 감정을 집중시키자, 근처를 날아다니던 검은 백조는 바로 그를 발견했다. 마에 덧씌운 인간과 달리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인 그것은 찰리를 즉시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명아는 다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감정벽을 만들어냈다. 전속으로 날아오던 검은 백조는 거의 20미터를 튕겨져 날아갔고, 찰리는 그 틈에 마인의 몸에 끈을 짙게 묶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마인은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며 찰리의 감정끈을 대번에 끊어놓았다. 찰리는 저 안에 녹아들어 있는 끈적끈적한 욕망이 대체 몇 명의 감정이 합쳐진 것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찰리는 다시 더 굵은 감정끈을 만들어서 마인을 묶었지만 그마저도 쉽게 끊겨 나갔다. 명아는 더 두터운 감정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날아드는 백조를 오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끈을 모두 끊고 짓쳐들어오는 마인을 보며 찰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찰리의 앞에는 잠시 명아의 것과 비슷한 감정벽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감자 찰리는 그의 앞에 있는 감정들을 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쿵쾅대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럼에도 상처 받은 감정, 비정상적으로 집적된 감정일 뿐이었다. 찰리는 평생을 두려워하며 해왔던 그대로 손을 뻗어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졌다. 그 강대하고 비틀린 소망들은 찰리의 손짓에 따라 자유로워지고 부드러워지며 꿈가루처럼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찰리는 자신이 그 감정을 흡수할 수도 다룰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적어도 인간의 마음에서 빼어내 올 수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찰리는 마음을 비우고 마인의 마음도 비워냈다. 텅 빈 마음에 공허가 깃들기 전, 찰리는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마지막 소망만을 남겨놓았다. 그러자 검고 괴로운 감정만 가득했던 그 마음의 공간 속에서는 평온과 환희, 인간 본연의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모든 것을 다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찰리는 살며시 눈을 떴다. 마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에 물들었던 묘령의 여성은 다시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라의 상태라 계속 보고 있기는 영 민망했지만 호흡도, 형태도, 감정도 다 인간 그대로였다. 찰리는 그가 가진 ‘감정을 끌어당기는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명아는 찰리를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찰리!”
찰리는 눈을 돌려 감정벽이 깨어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검은 백조, 음란은 명아가 만들어낸 감정벽을 깨트리고 그녀의 가슴어림께에 내려앉고 있었다. 찰리는 다급한 마음에 두 손을 뻗었고, 대기 중에 농밀한 감정은 얽히고설키며 음란에게로 날아갔지만 그 부리가 명아에게 닿아가는 속도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천천히, 수면 위에 꽃잎이 내려앉듯이 마는 명아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명아의 가슴에 음란의 부리가 꽂히는 것을 보며 찰리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주변에서 요동치던 모든 감정들이 쇠사슬처럼 굵어지고 단단해지더니 찰리의 손 안에서 하나의 길고 굵은 막대기- 창 – 벼락으로 변했다. 찰리는 그 감정을 있는 힘껏 내던졌고, 명아를 파고들던 음란은 사냥총에 맞은 물새처럼 수 미터를 날아가 파르르 떨더니 죽어버렸다. 찰리는 그 감정이 그 순간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깃털을 떨구며 음란은 희미해져 갔지만, 동시에 찰리는 부리에 찔린 부분부터 명아를 잠식해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냐, 아냐, 내가 다시 바꿀 수 있어. 마에 물들게 하지 않을 거야.”
찰리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을 집중했지만, 명아의 안에서는 여전히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폭주하기 시작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마음을 열고 정화할 수 있는데 찰리는 명아의 안에 닿을 수가 없었다. 찰리는 분노하며 다시 주변 모든 감정들을 다 끌어모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찰 리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끌어모아 실체화시킬 수 있었던 감정들은 이제는 맥없이 흩어지고 사라졌다. 덧없이 흩어지는 감정들을 보며 찰리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또다시 지켜내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절박함과 괴로움을 마음에 심어놓고 있었다.
명아의 몸에서는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가슴 어림께의 검은 감정의 흉터로 감정이 빨려 들어가고 집적되고 고착되어가고 있었다. 찰리는 애를 쓰고 또 썼지만 그곳으로 감정이 모여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찰리는 명아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닿았을 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명아는 실눈을 뜨고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울어 찰리.”
“명아야...? 너.. 괜찮아...?”
“네가 울어서 별로 안 괜찮아.”
“이상한 기분 안 들어..? 난 너의 감정이 안 읽힌단 말야.. 아까 그 사람들처럼 감정에 잡아먹히는 거 아니야..?”
“그냥 나른한걸. 그 나쁜 새가 날 물었어. 가서 때찌해 줘.”
찰리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여름 여사는 마귀에게 물리거나 공격당한 인간은 마에 물들어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랬다. 평생토록 감정의 노예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하지만 찰리는 마에 물든 여성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렸고, 명아는 마귀에 물렸음에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명아는 자리에 일어나 앉으며 부리에 쪼인 가슴을 쓸어 만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런 자국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는 어디로 갔어?”
“사라졌어. 마치 먼지로 돌아가듯이. 그리고 그 일부는 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래? 어쩐지 배가 부르더라니만. 꽤 큰 오리였어.”
찰리는 이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응.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배부른 것 빼곤 정말 괜찮아.”
찰리는 명아에 상태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고, 덕분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명아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둘은 혼비백산한 직업여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들여보낸 뒤 탑 꼭대기로의 등반을 계속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감정의 농도는 짙어졌고, 둘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은 자꾸 늘어갔다. 찰리는 어느새 마에 물든 사람들의 감정을 다독이는 것에 능숙해지고 있었다. 거의 한 층을 통째로 때려 부수다시피 과격하게 다가온 분노에 물든 사람도, 스멀스멀 어두운 곳에서 새어 나온 음울에 물든 사람도 찰리의 손짓에 다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인들은 찰리가 상대할 수 있었다면 감정의 본질인 마귀들은 명아에게 맥을 못 추었다. 명아는 마귀들이 자신에게 닿으면 되려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단 마에 물들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마귀들을 무력화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찰리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명아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것과 무언가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둘은 100층 즈음해서 거대한 마인 – 찰리는 근심에 물든 사람일 거라고 주장했고 명아는 자기 비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 이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맞닥트렸다. 창문을 통해 침투한 것으로 보이는 특수부대원들은 화려해 보이는 신식 장비로 거대한 껍데기를 두르고 있는 마인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대한 콩벌레 같이 부풀어 오른 마인은 둥글게 회전하며 총탄과 폭탄을 튕겨냈고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산개했다. 찰리는 가느다란 촉수가 콩벌레의 각갑사이에서 튀어나와 군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것을 보았다. 특수부대 1개 중대가 전멸한 것은 순식간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다시 마에 물든 인간이 되어 한 때 동료였던 이들을 감염시키려고 애썼다.
찰리와 명아는 가까스로 난전에 뛰어들어 그들을 중화시킬 수 있었지만, 목숨이나 손가락 한두 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만 했다. 마귀도 마귀였지만 군인들이 쏘는 눈먼 총탄은 그들에게 큰 위협을 가했다. 감정벽은 감정에너지에 대해선 방어해주었지만 물리적인 충격에 대해선 거의 백지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비록 신형 총탄이라고 해도 감정에너지를 사용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되려 콩벌레를 처치하면 처치했지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찰리와 명아는 군인들이 콩벌레에게 거의 다 잡아먹힌 다음에야 그들을 중화할 수 있었다.
기절한 군인들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콩벌레를 탑의 잔해 속에 숨겨준 뒤에 찰리와 명아는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둘은 재래식 무기가 마귀들에게 무용지물인 만큼 탑의 붕괴가 지속될 경우 도시 자체가 마에 물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아주 대응책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것 봐 봐 찰리.”
명아는 군인 아저씨 허리춤에서 도둑질해온 번쩍이는 칼을 꺼내보였다. 전통 도검의 양식을 띄고 있는 그것은 칼 끝봉우리에서부터 도파까지 최신의 금속기술로 완성되어 있는 무기였다. 명아는 감정 에너지를 그러모아 칼에다가 집어넣었고, 곧 도신 전체가 웅웅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찰리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그렇네. 이 정도면 마귀에게도 손상을 줄 수 있겠어. 이런 걸 어떻게 준비한 거지?”
“한여름 여사님도 20년 전 탑 꼭대기에 가기 위해 마귀를 상대하셨다고 그랬잖아. 그때 살아남은 인원들은 그 뒤로 연구를 거듭했대. 그 사람들이 너를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찰리는 명아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분명 그를 감시하던 검은 양복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일이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거구나.”
“그건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인간이 완전 속수무책으로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찰리는 감정 기술을 증폭시켜주는 칼을 들어보았다. 분명 마귀에게든 마에 물든 인간에게든 끔찍한 피해를 끼칠 것이 분명한 그 흉측한 무기는 찰리에게 몸서리치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가자.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떤 선택이던 해야지.”
찰리는 먼 미래의 인간들은 감정과 싸우지 않기를, 자신 안에 깃든 감정과 화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 소망과 함께 석양이 도시에 내려앉고 있었다.
1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