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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톨로지 Jan 15. 2018

누구에게나 아픈 처음은 있다.

생존체력의 시작 : 잃어야 깨닫는 것들 

Part 1.잃어야 깨닫는 것들 


다이어리
 
-2월 7일
2년 만의 인천국제공항. 한국에 도착했다. 게이트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 사람은 결혼을 했다지. 나랑 결혼한댔으면서… 두리번거려 봐야 아무도 없다는 거 안다. 알고 있는데도 두 눈은 연신 그 사람을 찾는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모든 걸 잃었다. 학위에 실패했다. 그 사람도 떠났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다. 캐리어에 넣어 놓은 까망삭이 자꾸 생각난다. 어제도 마시고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시겠지. 이렇게 마시다가 그냥 확 뒤져버렸으면 좋겠다. 
 
-2월 15일
밤 공기가 차다. 아직 나갈 엄두가 안 난다. 집 앞 마트에서 세일하는 와인을 산다. 빠리에서 마시던 그 맛이 아니다. 적도를 지나면 뭐든 변하나 보다. 그 사람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다시 돌아온 서울은 거지같이 와인 값만 비싸다. 가격을 두세 배쯤 올려 파는 맛없는 와인을 열고 천천히 마셨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뒤져 대충 때운다.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하다.
 
-3월 2일
언제부턴가 잔이 없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꺼진 TV에 비친 나를 보니 갸르 뒤 노르를 지날 때 본 노숙자 꼴이다. 해묵은 지린내에 절어있던 주제에 보르도를 병나발로 까고 있던 노숙자 할배.
한때 윤기가 넘쳐흐르던 머리는 푸석푸석하고 매끈하게 잠기던 바지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싸구려 레깅스만 줄창 빨아 입는다. 레깅스에 핀 보풀이 딱 나 같다. 차라리 빠리에서 죽…
아니, 아니다.
 
 
-3월 11일
내 이십대는 반짝반짝 빛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년에는 몰디브 해변에서 결혼식을 하자며, 평생 연인처럼 살자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34 사이즈 질 샌더 정장은 커스터마이즈처럼 내 몸에 착착 감겼고 홍콩이든 도쿄든 전세계 어디를 가든 크리스탈을 쏘는 친구 한둘은 있었다. 그랬었다.
나는 이제 이십대의 내리막에 앉아있고 부모님은 내 귀국을 모른다. 잠실 구석 아파트에 이렇게 사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갑다. 공기는 건조하고 세상은 죄다 회색이다. 마음이 저릴 때마다 마시던 와인은 이제 술인지 물인지 분간이 안 간다.
쓰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3월 22일
숙취로 오락가락하면 에스프레소를 위장에 들이붓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와인을 부었다. 낮과 밤이 저녁과 아침 없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취기에 기대 아침에야 잠들었고, 정말 몸이 뒤틀릴 것 같으면 늦은 시간에 깨어 아파트 단지 앞까지 기어가 커피를 마셨다. 아파트 앞 카페의 에스프레소는 사약 같은 맛이 난다. 조금 더 걸으면 괜찮은 로스터리가 나온다. 가진 건 실패자의 낙인 밖에 없는 주제에 프랑스에서 고약한 입맛을 배워왔다.
 
-4월 6일
이제는 술을 마시면 토한다. 빈 속에 와인을 퍼부어대면 한동안 검붉은색 액체가 나오다가 신물이 역하게 넘어온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자지만 토하고 나서의 고통 때문에 술을 마시기가 무섭다. 겨울 한 철 노숙자 할배처럼 병나발을 불고 매일 밤 통곡을 해대니 우는 것도 지쳐서 가끔은 넘어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간다더니 정말 지나가기는 하는 걸까. 베란다 문을 여니 아직은 쌀쌀하지만 따뜻한 햇볕이 메마른 몸으로 쏟아진다. 까농의 한적한 해변에서 맞던 햇살이 생각났다.

빠리에서는 늘 걸었다. 생각보다 도시는 작았다. 버스를 타도 항상 반대방향으로 타는 나 같은 길치는 걷는 게 빠르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오래 걸어야 하니까 무슨 옷을 입던지 항상 말랑말랑한 플랫슈즈를 신었다. 에펠탑을 향해 걷다 보면 집이 나왔지. 빠리에 있는 내 집은 16구와 15구 사이. 창문을 열면 바로 옆에 에펠탑이 보이는 곳이었다. 걷는 건 익숙했다. 

햇살이 따뜻해지니 습관이 나온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플랫슈즈를 신고 나와 잠실을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햇살이라 눈이 아렸다. 조금만 걸어가면 석촌호수가 나오고 반대로 가면 한강공원이 나온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바람 불 때마다 눈 내리듯 쏟아지는 벚꽃이 예뻤다. 기분이 이상했다. 괜찮아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눈물마저 말라가는 걸까. 어딜 가도 벚꽃이 흐드러진다.

벚꽃구경을 하며 낮술을 마셨다. 평일 오후라 거리가 한가롭다. 이렇게 아파트가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벤치에 앉아 텀블러에 담아온 테이블 와인을 홀짝였다. 사람들이 트랙을 따라 어디론가 한없이 걷고 있다. 촌스럽게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파워 워킹을 하는 아줌마. 마라톤 쫄쫄이를 입고 뛰는 아저씨. 다들 나만 빼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벚꽃이 너무 예뻤고, 외로웠다.

사람이 보고 싶은데 아무도 내가 귀국한 걸 모른다. 생각해 보면 오랜만에 취하지 않고 나선 바깥이다.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찾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찌질이 집돼지 K
 
세련돼졌냐고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지만, A누나를 처음 만났던 시절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찌질한 서울대생이었다. 서울대생 하면 떠오르는 안 좋은 이미지는 다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할 줄 아는 건 공부뿐이었고, 몸을 쓰는 일은 극히 싫어했다. 얼굴도 별로고, 몸은 더더욱 별로였던 나는 게임도 공부도 식사도 모두 책상에서 해결했다.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늘 시골에서만 살아서 사람이 많은 곳이 부담스러웠던 내게, 왠지 음침해 보이는 신림동 고시촌은 마치 나를 위한 동네 같았다. 그 비좁은 동네를 돌아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지만, 학교와 집만 왕복하면 된다는 게 좋았다. 어쨌거나 갓 이십대가 된 나는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을 가지고 있었고, 운동을 왜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일상은 남들과 다를 게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고시촌 주변 식당에서 4천원짜리 제육덮밥이나 5천원짜리 돈가스 같은 것을 먹고, 가끔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가는 게 전부였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였으니 살이 붙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티가 나지는 않았기에 밥을 좀 많이 먹었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찌됐건 나를 둘러싼 학교도 사람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신춘문예로 등단해 작가로 살 거라는 허세를 부리던 시절, 만일 여자친구가 계속 나를 만나 주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옷 아래로 출렁거리는 가슴살과 뱃살을 껴안고 사무실 책상에 붙어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차였다. 인간이 덜 됐다거나 가진 게 없다거나 하는 이유는 접어두고서라도, 살이 그렇게 쪘으면 차일 만도 했다. 그나마도 거울을 뚫어져라 보다가 깨달았다. 170cm를 겨우 넘는 키에 젖가슴이 갈비뼈까지 내려온 돼지가 청룡동 불가마 찜질방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무게를 재니 108kg이 나왔다.

사실 그때 속으로 엄청 웃었다. 백팔 킬로 돼지. 백팔돼지. 오, 어감 좋다. 백팔번뇌 백팔돼지. 66kg였던 스무 살에 비해 40kg이 넘게 쪄 있었으니 웃을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C컵은 충분히 넘을 것 같은 가슴을 주물거리다 제자리에서 살짝 뛰니 젖가슴과 뱃살이 몰아치듯 한 차례 출렁거렸다. 이런 미친, 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는 데도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바지가 맞지 않아서 치수를 늘리다가 끝내 고무줄 바지를 입고 다녔으니 할 말 다 한 거 아닌가. 거기다가 거사라도(?) 치를 요량이면 조금 움직이기도 힘에 부쳐서 나중에는 잘 하지도 못했다. 스무 살 때에 비하면 형편없는 체력이 그 원인이었다. 살이 서서히 붙은 만큼 체력도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눈치를 못 챈 게다. 생각해 보라. 이십대의 딱 중간에, 38인치의 허리에 고무줄 바지를 매 놓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짧고 뚱뚱한, 숨이 차서 밤일도 제대로 못하는 아저씨를. 이러다 당장 죽는 건 아닌가 싶었다. 비만이 남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면 이 책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기에는 내가 너무 게을렀다. 애초에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하고 싶어도 할 줄 아는 운동이 없었다. 관악산에 올라가보려고도 했지만 만남의 광장 시계탑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고시촌에서 거기까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발목과 무릎이 시큰거렸다. 방향을 틀어 식이요법에 도전했다. 단식부터 시작해서 건포도, 닭가슴살, 오이, 허벌x이프 같은 여러 시도를 해 봤지만 108kg가 101kg 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늘어진 가슴과 뱃살은 다시 올라올 줄 몰랐다. 급기야 나중에는 먹고 토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변기를 잡고 혀를 문지르면 10분 전에 먹어치웠던 피자나 치킨조각이 튀어나왔다. 이런 건 여자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거울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살이 빠지면 체력이 좀 좋아질까 생각했는데 괜한 식도염만 얻었던 나는 곧 서울로 돌아와 대학원에 가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겠다. 살은 살대로 찌고, 체력은 체력대로 후달리고, 소설이랍시고 써서 제출한 문예공모전에서 죄다 탈락해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은 상태였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고 흉이라도 볼까봐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누구를 만나지도 않았다. 앉아만 있으니 살이 빠지지도 않았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만일 그 날 연락이 온 게 A누나가 아니었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A누나에게 전화가 왔던 4월 어느 아침에, 나는 책 위에 침을 흘리며 엎드려 졸고 있었고, 우렁찬 벨소리가 고요한 도서관에 울려 퍼졌고, 누군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잠이 덜 깨서 전화기를 들고 뛰쳐나가 얼른 전화를 받은 것이다.
“여보세요?”
         ―야, 나야!!
“누구세요?”
         ―나라고, 나!!
누군지 몰라서 전화기 액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미친, A누나가 돌아왔다. 2년 만이었다.
 
 
A, 걷다
K는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졸업을 한 줄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바쁘지 않은 듯했다. 전화를 받고 그는 바로 근처 지하철역으로 오겠다고 했다.
텀블러에 든 와인을 홀짝이며 1시간 정도를 앉아있자 K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변을 돌아봐도 K와 비슷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윽고 발견한 K는 경악스러웠다.  2년 만에 만난 K는 덩치가 두 배는 돼 있었다. 날렵했던 턱선이 사라지고 눈과 코가 살에 파묻힌 그의 얼굴은 내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잠깐 놀랐다가, 너무 오랜만에 나를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게 기뻐서 눈물이 다 났다. K는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묻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귀국했는지, 학교는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건 일절 묻지 않고 내가 쏟아내는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서 친해지게 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살아 온 이야기를 했다. 나는 조금 울기도 했고, K는 그런 나를 달랬다. 몸만 변하고 성격은 안 변했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배가 고파졌다. 오랜만에 밥을 먹고 싶었지만, K가 밥을 먼저 먹었다고 했다. 혼자 먹기는 싫었다. 사람을 만나고 식욕이 돈다. 오랜만에 봄볕을 쬐고 싶어서, 그에게 서울에 돌아온 기념으로 한강이나 걷자고 했다. K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한강이 처음이라고 했다.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돼지가 된 K와 영양실조에 가까웠던 나는 한강을 걷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벤치에서 바라보던 폭신폭신한 우레탄 길을 아줌마 아저씨들을 따라 그와 함께 걸었다.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뱃살 출렁대는 빡빡이와 키 크고 초췌한 여자의 조합이 그렇게 보기 좋지만은 않다. 갑자기 이렇게 변해 버린 K가 어색했다. 우리가 지금보다 건강하고 밝았던 몇 년 전처럼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드문드문 말하면서 강변을 걸어 다리 하나를 지나쳤다.

비릿한 강바람과 덜 풀린 봄볕에 느적거리며 걷고 있고 있자니 술 생각이 많이 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K는 내색은 않는데 힘들어 보였다. 덩치가 두 배는 된 놈이 이상하게 더 작고 초라해보였다. 그의 초라함에 내 초라함이 묻히는 기분이라 죄책감 비슷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세상에 나 만큼 절망적인 인간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하나 있었다. 어쨌거나 술을 먹지 않았으니 토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낀다. K는 웃으며 말했다. 살이 쪄서 여자친구가 자기를 찬 것 같다거나, 2학기를 내리 휴학하고 고시원으로 들어갔다거나, 작가가 되기를 포기했다거나 하는 것들을. 그러다 문득 몹시 수척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누나 나 다시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

다리를 세 개쯤 더 지났을 때쯤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라 실망했지만, 붙잡고 있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돈이 없을 게 뻔한 K에게 택시비를 쥐어 보내고 나는 그대로 한강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취해있지 않은 멀쩡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었다. K와 느릿느릿 걸었던 그 길을 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뻣뻣해진 다리가 몹시 욱신거렸지만, 맨정신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안도감을 놓치기가 싫었다. 봄이라 낮이 길어졌음에도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옷도 못 벗고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취하지 않고 잠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토하지도 울지도 않았고 꿈도 꾸지 않았다.
 
 
걷는 K, 달리는 A

그 뒤로 K와 A는 당분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A가 잡아 준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온 K는 그대로 앓아 누웠다. 10km는 족히 되는 거리를 걸었다. 살이 찌고 나서 그렇게 걸어보지 않았기에 발목과 무릎과 허리가 모두 아팠다. 그렇지만 그날 K는 도저히 중간에 A에게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2년 전과 지금의 A가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A의 망가진 모습에 K는 아픈 다리를 끌고 계속 걸은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건 도저히 무릎의 통증을 참을 수 없게 된 다음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던 K는 한의원에 갔다. 많이 걸어서 아프다는 말을 했더니 한의사가 위아래를 훑어보며 한 마디 던졌다. 

“살을 좀 빼셔야 할 것 같네요.”

다이어트를 해도 번번이 실패를 했다고 K가 말하자 한의사는 운동을 권유했다. 헬스클럽에 가서 러닝머신이라도 조금 하면 훨씬 나아질 거라고. 식이요법에 이미 많은 돈을 허비한 상황이었다. 더 나빠질 게 없다고 생각했던 K는 동네 헬스클럽에 대뜸 6개월을 등록했다.
 
반면 A는 즐겁게 걷고 죽은 듯이 잠을 자고 깨어나, 자신이 술을 마셔온 것은 삶이 즐겁지 않아서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앉아 강변을 걸으며 맞던 바람을 떠올렸다. 코끝이 시큰거렸고, 즐거웠다. A는 이미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을 걸어 다녔고, 꽤나 마른 편이었기에 K와 같은 다리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드디어 걷기 시작했다. 마시다 남은 미지근한 와인을 담아 K와 갔던 거리를 그대로 걸어가, 둔치에서 몇 모금을 마시며 자전거를 타거나 혹은 걷고 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는 조금씩 늘어났고, 와인 텀블러 대신에 작은 캔맥주를 들고 다녔다. 2개월쯤 지나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그녀는 편의점에서 캔맥주 대신 생수를 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잠실에서 여의도공원까지, 햇살 가득한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여의도공원에서 그녀는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공원 주변의 트랙을 뛰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풍경을 멀찍이서 바라보다 그녀는 문득, 한번 뛰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7월 첫째 주, A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우레탄 바닥에 엎어졌다. 플랫슈즈 대신 운동화를 신은 첫날이었고, 뛴 지 고작 1km 정도 되는 지점이었다. 하, 뒤질 것 같네. A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입 안에서 피 맛이 감돌았다. 그래도 왕년에는 잘 뛰었는데, 하고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트랙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았다. 다들 어디론가 열심히 뛰거나 걷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비록 석 달 동안 거의 매일 걸었다고는 해도 한때 술에 절어 있던 A였다. 이렇게 빨리 몸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가쁘던 숨이 어느 정도 편안해지고 나자, 그녀는 조금 더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돌아 저릿거리는 근육의 느낌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다가 천천히 잦아드는 땀의 느낌이 좋았다. 이대로 공원을 한 바퀴만 돌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뛰다가 힘들면 걷고, 걷다가 숨이 편해지면 뛰기를 반복했다. 하루가 가고 달이 바뀌며 공원 한 바퀴에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졌고, 걷는 시간보다 뛰는 시간이 길어졌다. 예쁜 신발 대신 편한 러닝화를 신게 된 그녀는 예전과 같은 식욕을 되찾았으며, 밤을 뜬눈으로 보내다 아침에서야 잠드는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9월이 될 무렵, A는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10km를 중간에 쉬지 않고 뛸 수 있었다. 작정하고 10km만 뛰어보자고 결심한 날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 앞이 아찔했지만 그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아무리 즐겁게 취해도 여기에 비할 수 없었다. 취한 것보다는 차라리 오르가즘에 다다르기 직전의, 조금만 더 하고 싶은 기분에 가까웠다.

10km를 뛰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맛본 그녀는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제 자신이 고작 걷기나 달리기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발길을 돌려 집 근처PT샵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199만원짜리 PT(Personal Training)를 끊었다.
 
A가 아직 캔맥주를 들고 다니던 5월, 우리의 가엾은 백팔돼지 K는 4월부터 시작한 러닝머신에 맛을 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6km/h의 속도로 5분만 걸어도 아팠던 다리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걷기에 익숙해졌다. 다리의 관절이 아프지 않게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K의 눈에 주변 상황이 보였다. 근사하게 생긴 기구가 여러 대 있었고, 구석에는 올림픽 경기에서나 볼 법한 쇠막대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멸치부터 근육돼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걷기만 해서는 운동이 안 된다
그 가운데 K가 선택한 것은 기구 운동이었다. 남들이 하는 운동을 어깨너머로 보다 보니 쇠막대에 원판을 끼워서 하는 운동은 위험해 보였고, 기구로 하는 운동은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이 하기 쉬워 보였던 탓이다. 그가 처음에 고른 것은 이른바 ‘버터플라이’로 알려진 팩 덱 플라이 머신이었다. 기구 옆의 설명과 그림을 보며 따라한 운동은 생각만큼 쉬웠고, 무엇보다도 걷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늘어진 가슴살 아래로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는 느낌이 왔을 때 현실감이라고는 없는 백팔돼지 K는 자신이 곧 몸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쯤 되면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K가 헬스클럽에 출입한 횟수는 근력운동을 시작한 5월에는 매일이었던 것이 넉 달쯤 지나고 나니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운동이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물론 안 하던 운동을 했으니 살이야 조금 빠졌지만, 몸짱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지녔던 그에게 운동은 너무 지지부진한 과정이었다. 목표가 너무 높았기에 좌절감만 커져가던 8월의 어느 날, 헬스클럽 출입증을 잃어버린 K는 다시 발급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피톨로지의 아주라와 클레사가 생존체력을 쓰게 된  첫이야기

운동책을 쓰는데  하라는 운동얘기는 안하고
마음에 담긴 하소연이 너무 많아 
시작부터 감성에 전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다
에디터의 불호령(?)으로 담백하게 대폭 수정한다고
세상에 내놓지 못한 '생존체력 , 이 것은 살기위한 최소한의 운동이다'의 
초고입니다.
 
이렇게 벌써 십 년 가까운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신의
여러분의 시작은 어떤가요?
우리는 당신이 우리처럼 다 잃고나서야 비로소 깨닫고 아프게 시작하는 
바보같고 미련한 우리 둘의 전철을 밟지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올해는 함께 더 가까이에서 
당신의 옆에서 시선을 맞추며 당신의 시작들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낮은자리에서 
천천히 함께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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